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18화 (218/366)
  • 218화

    “짐은 다 챙긴 거지?”

    “네.”

    “비스는? 오늘 만나기로 했던가?”

    “오늘 8시요. 걔 여관으로 제가 가기로 했어요.”

    “어쩌다 보니 너무 길게 있었네~”

    내 방에 놀러 온 하미준 헌터가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홀짝거렸다. 그의 말대로 생각보다 너무 오래 머물렀다.

    ‘그래도 잘 풀려서 다행이지.’

    던전 관리국과 정부 관계자가 왕궁을 매일같이 드나들며 비스의 제안을 두고 토론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하루 종일 뉴스를 통해 흘러나왔다.

    -지익.

    캐리어를 잠그고 비스를 만나러 나갈 준비를 마치자 하미준 헌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2시간 안에 안 오면 창조자의 파편인지 뭔지가 열린 걸로 알고 구하러 갈게.”

    “알겠어요.”

    그의 다정한 걱정과 함께 방을 나섰다.

    * * *

    -휘이잉.

    비스의 여관을 향해 허공을 가르는 동안 머릿속으로 상황을 천천히 정리했다.

    비스가 갖고 있는 음악가의 파편은 지금 바로 수습하지 않기로 했다.

    S급 게이트가 나타난 바람에 네팔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써서 더 머물렀다간 김강희의 의심을 피하기 힘들고, 비스도 부상을 크게 입은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김강희를 제외한 창조자의 사도 네 사람 중 이미 두 사람은 창조자와의 관계가 끝났다. 녀석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 상황을 인지했을 것이고, 거기에 내가 엮여 있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을 것이다.

    비스에게 창조자가 어떤 녀석인지, 그리고 내 계획을 간단하게 말해 주는 선에서 끝내고 지금은 물러나야 한다.

    -끼이익.

    여관의 옥상에 도착하자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옥상의 문이 열리고 비스가 나타났다. 병원에서 나온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팔은 붕대로 친친 감겨 있었고, 얼핏 보이는 티셔츠 밑으로도 치료의 흔적들이 보였다.

    “망토 벗은 건 처음 보네.”

    “적응해라. 이젠 진짜 헌터용 방어구를 입어야 할 수도 있으니.”

    비스가 픽 웃으며 대답한 후 옥상의 난간에 기댔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나?”

    “응. 꼭 해야 하는 말이 있거든.”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비스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창조자, 만난 적 있지?”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당황]

    비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몇 달 전쯤 사도들을 모아 놓고 나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거고.”

    “네가 그걸 어떻게…….”

    “너 말고도 다른 사도들을 만나 봤거든.”

    “잠깐, 잠깐…….”

    그는 내게 손을 펼쳐 보이며 잠깐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비스가 머릿속을 정리하듯 미간을 잠깐 찌푸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는 것이냐?”

    “…응.”

    “어떻게?”

    핵심을 짚는 질문이다. 회귀에 대한 건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한 말인데도 여전히 긴장됐다.

    “나도 사도였던 적이 있으니까.”

    “사도였던 적?”

    “응. 이번 생이 아닌 지난 생에서.”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혼란]

    “여러 세상을 살다 온 자…….”

    비스가 중얼거렸다.

    “창조자 놈은 널 그렇게 불렀다.”

    “비슷하긴 하지만 조금 다르네. 여러 번 산 건 맞지만 난 계속 이 세상에서 살았거든.”

    어깨를 으쓱인 후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다 알고 있는 거야.”

    “…….”

    “널 만난 것도 사실 내 계획의 일부였어.”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상태창 너머로 보이는 비스의 눈을 마주 보는 것이 조금 힘들었다. 시선을 살짝 피한 후 다시 말을 계속했다.

    “창조자가 아마 소원을 대가로 부적을 맡아 달라고 했을 거야. 맞지?”

    “…그렇다.”

    “그거 거짓말이야.”

    “뭐?”

    “그 부적은 사실 창조자의 파편이고, 나중에 세상을 집어삼킬 거대한 게이트인 지옥도의 재료로 쓰여.”

    [발언 결과 : 충격]

    -사아아.

    비스가 충격에 말을 잃었을 때쯤 검은 연기와 함께 칼리가 나타났다.

    “그건 네가 직접 겪었기 때문에 아는 것이냐?”

    “응.”

    “조금 더 증거를 대 보거라. 네게 정말로 전생이 있었는지 파악해야 하니까.”

    칼리는 전투할 때의 모습과 달리 매우 신중하게 내 이야기를 찬찬히 곱씹었다.

    종말의 증거는 따로 없지만, 내게 이전의 삶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영능, 가면, 탕자.”

    “아.”

    사도의 이름을 쭉 부르자 비스가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그리고 쿠마리.”

    “…….”

    “너한테 증명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

    “…아니, 충분하다.”

    비스는 마른세수를 하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럼 우리 비스에게 접근한 건 그 파편을 부수기 위함이었느냐?”

    “응. 그걸 부숴야 지옥도의 힘이 약해지거든.”

    칼리의 눈썹이 위를 향했다.

    “파편을 부수면 창조자가 네게 줬던 힘은 소멸해. 그래서 창조자의 힘 없이 네 목표를 먼저 이루려고 했던 거야.”

    “그러면 비스가 네게 창조자의 파편을 순순히 넘겼을 테니까?”

    “맞아.”

    난 숨을 들이마신 후 다시 입술을 뗐다.

    “실망했어도 이해할게. 쿠마리나 칼리의 창한테 관심이 있던 게 아니라, 비스 너를 만나려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니까.”

    말을 마치자 정적이 찾아왔다. 길을 돌아다니는 오토바이 소리만이 이따끔 들릴 뿐이었다.

    “하…….”

    비스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샜다. 그러더니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난 의도를 그렇게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다.”

    “…….”

    “나도 처음엔 여론전을 펼치려고 사람들을 구했다.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는 순수한 마음이 아니었지.”

    비스는 ‘순수’에 힘을 주어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 눈앞에서 누군가 다치는 걸 두고 볼 수 없게 됐다.”

    “비스…….”

    “그러니까 네가 내게 다가온 의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텁.

    비스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린 결국 도마뱀 놈의 같잖은 힘 없이 목표를 달성했으니까.”

    “…고마워.”

    그는 다시 손을 거두고 내게서 한 발 멀어졌다. ‘우리’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무튼 그 파편은 지금 부술 수 있는 거냐?”

    “아, 일단은 보류하려고.”

    “왜지?”

    “그 파편을 부수면 엄청 까다로운 던전이 나오거든. S급 경계보다도 더 까다로운 던전이야.”

    “흠…….”

    비스가 입술을 비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에 있던 칼리도 생각에 잠긴 듯 손가락으로 제 무릎을 두드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미 사도 네 명 중 두 명의 파편을 파괴했어. 여기서 네 것까지 부수면 창조자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상황을 좀 보자는 것이냐?”

    “응, 맞아.”

    칼리의 질문에 대답한 후 나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메모지를 꺼냈다. 비스에게 내밀자 그가 그것을 눈으로 슥 훑었다.

    “네 전화번호인가?”

    “응. 무슨 일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해 줘. 이제 너도 숨어다닐 필요 없으니까 핸드폰 정도는 만들어야 하잖아.”

    “하, 그렇지.”

    비스가 재밌다는 듯 짧게 웃음을 뱉곤 메모지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 도마뱀 놈이 무슨 짓을 꾸미려 하면 알려 주도록 하지."

    “알겠어. 나도 네 몸이 다 나을 때까지 사도 영능을 만나 볼게.”

    사도 ‘영능’은 일본의 초대 헌터 협회장인 센이다. 현역 헌터로서는 은퇴를 선언했지만, 인력이 부족할 때나 게이트 폭발처럼 비상사태일 땐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만만한 상대는 아닐 거야.’

    일본 헌터계의 전설적인 인물이자 일종의 정신적 지주 같은 존재다. 웬만해선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것이다.

    “지의.”

    “응?”

    “넌 잘할 거다.”

    불안한 내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비스가 나를 위로했다. 투박하고 담백한 말이었지만, 꾸미지 않아서 오히려 마음에 더 와닿았다.

    아무런 말 없이 웃자 비스도 나를 따라 웃었다.

    “그럼 나중에 연락하겠다.”

    * * *

    -쏴아아.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강희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그 소리에 집중하다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쿠구궁.

    평화롭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짙게 끼더니 이내 굵은 빗줄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세차게 내리는 비에 강희 자신도 젖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파스스.

    “그러게, 내가 뭐라 그랬어어어.”

    그때 모래사장이 높이 솟아오르더니 창조자가 나타났다. 그는 모래 위에 털썩 엎드리더니 고개만 올려 제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강희는 눈을 뜨고 큰 파도를 몰고 오는 바다만 볼 뿐 창조자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내가 걔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아.”

    “…이론상으론 완벽했는데.”

    “이론이 안 통하는 애를 이론적으로 처리한 게 문제야아.”

    -턱.

    창조자의 앞발이 강희의 발을 토닥거렸다. 나름의 위로였지만 이미 속이 뒤집힐 대로 뒤집힌 강희에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세빈이 각성했을 때 그는 미성년자였기에 후견 헌터였던 강희와 미준은 그의 스킬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아’의 부작용을 이용해서 세빈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언젠가 자신이 지의와 대립하면 당연히 세빈은 제 소꿉친구의 편에 설 것이고, 그럴 경우 승산이 없다.

    지옥도로 체력을 미리 소진시키고 자신이 창조자의 힘을 업는다고 하더라도 절대 쉽지 않은 상대일 것이다.

    -뚜둑.

    강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창조자는 아예 배를 보이고 누운 채로 투덜거렸다.

    “그 애는 나랑 조율자 둘 다 건드리지 않기로 한 애였다구우…….”

    “왜?”

    “매듭이 끊긴 자니까아.”

    “끊겼다고?”

    “응~ 그것도 여~러 번.”

    매듭, 그것은 삶의 마침표를 뜻한다. 강희는 지의에게 그 매듭이 수십 개가 있기 때문에 그가 여러 세상을 살다 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럼 매듭이 여러 번 끊겼다는 건…….’

    “강세빈의 존재가 사라졌던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소리야?”

    “그런 셈이지이.”

    창조자가 몸을 일으켜 강희를 마주 보고 섰다. 머리는 하얗게 세고, 얼굴엔 주름이 가득 졌지만 기묘할 정도로 밝게 빛나는 저 푸른 눈동자만큼은 30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같은 실 위에 매듭이 여러 개……?’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강희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창조자를 쳐다보았다.

    “여러 세상을 살다 온 게 아니야.”

    “어엉?”

    “네가 본다는 그 생명의 실, 한 개 맞지?”

    “그렇지이?”

    강희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위쪽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하, 하하하…….”

    “…뭔가 알아냈구나?”

    강희의 웃음에 창조자의 말투가 싸늘하게 바뀌었다. 호기심으로 빛나는 푸른 눈동자와 파괴의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검은 눈동자가 맞닿았다.

    “실이 한 개인데 매듭이 여러 번 생겨 있는 거면 뭐겠어.”

    “…….”

    “여러 세상을 살다온 게 아니라 같은 시간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거지.”

    -콰앙.

    커다란 파도가 모래사장에 부딪히자마자 높이 튀어올랐고 강희의 위로 쏟아졌다.

    -파아앗.

    하지만 그것은 강희와 창조자를 집어삼키기 전에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얼굴을 적시는 작은 물방울들이 불쾌하지 않았다. 정답을 찾아낸 후련함이 더 컸기 때문이다.

    “망한 게 한 번이 아니라면 더더욱 헛수고였겠네.”

    지의가 그 말을 자신에게 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크, 푸흡…….”

    ‘이미 다 알고 있던 거야.’

    자신을 대놓고 농락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이유 모를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이 이 세상의 미래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변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변수가 자신의 모든 계획을 틀어 놓기 시작했다.

    “재밌게 돌아가겠어, 안 그래?”

    “그런 것에 재미를 느끼다니… 역시 넌 이상해애.”

    창조자가 샐죽 웃으며 제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래서 너와 손을 잡은 거지만.“

    『SS급 비명헌터』

    지추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