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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비명헌터-217화 (217/366)

217화

-쾅!!

반쯤 부서진 쿠마리 사원의 문을 발로 차서 들어가자 이미 몬스터의 습격이 수차례 있었는지 아수라장이 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비스!!”

그리고 그 가운데 쓰러져 있는 비스가 보였다.

비스의 옆엔 코피샤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비스의 어깨와 쇄골 부근을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아이의 행동을 자세히 보니 손바닥 틈새로 찐득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마……?’

나는 오른쪽 눈을 감고 코피샤의 스킬을 다시 확인했다.

[C급 치유계 스킬 ‘시탈라의 피’ : 눈을 마주친 상대의 병을 알 수 있다. 시전자의 피를 먹은 자는 병이 일부 치유되며, 외상 부위에 떨어트리면 상처가 치료된다.]

코피샤의 치료 스킬이었다. 자신의 피로 사람을 치유하는 스킬이다 보니 아이의 얼굴도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녹두야!”

“아우우-!”

-쿵.

뒤따라온 녹두를 부르자 녀석은 영리하게 배리어를 펼쳐 비스와 코피샤를 감쌌다. 새하얀 빛무리가 아이와 비스의 몸 위에 내려앉았다. 코피샤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다 옆에 온 내 기척을 느끼곤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어어…….”

“무서웠지? 잘 버텨 줬어.”

코피샤는 내 말을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래도 안심한 듯 손등으로 눈물을 벅벅 닦으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비스.”

“…기막힌 타이밍에 나타나는군.”

가까이서 보니 비스의 몸은 더 엉망진창이었다. 붉은색 망토는 이리저리 찢겨 더 이상 방어구의 기능을 하지 못했고, 검은색 목폴라 티는 피에 젖어 얼룩덜룩했다.

팔 관절과 다리도 너덜너덜해져 있어,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그쪽 상황은… 정리됐나?”

“응. 다 해치웠어. 밭쪽에서 폭발음이 몇 번 들리긴 했는데 칼리가 잘 싸워 준 것 같더라고.”

“그렇군…….”

비스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걸렸다. 그 얼굴에서 왠지 모를 후련함이 느껴졌다.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봤던 비스의 얼굴 중 가장 편해 보였다.

“신지의.”

“어?”

“이렇게 발음하는 것 맞나?”

그때 그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뜻밖의 발언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자, 그는 한 번 픽 웃곤 눈을 감았다.

“쿠마리에서 쫓겨난 그날, 나를 살게 한 건 왕실에 대한 복수심뿐이었다.”

“…….”

“그런데 웬 바보 같은 쿠마리 하나가 내게 이야기하더군.”

-텁.

그가 제 이마 위에 손등을 올렸다.

“죽이지 않고 복수하는 법을 알려 주겠다고.”

“아…….”

“네 녀석의 발상과 꽤 비슷하지.”

비스가 다시 손을 내렸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한 눈이 멍하니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칼리의 창이 되어 던전을 수습한 것도 전부 쿠마리 시스템을 무너트리기 위한 여론 형성의 일부였다. 계획은 그 바보 같은 쿠마리가 짰다.”

“똑똑하네.”

“맞아, 아주 똑똑한 아이야.”

비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게 그 터무니없는 봉사 활동을 시키면서 인간들을 사랑하게 만든 거야. 쿠마리가 아닌 인간까지 전부 사랑하게 만들었다고.”

“…….”

“어쩌면 그 애는 정말로 신이었을지도 몰라.”

-바스락.

몸이 많이 회복됐는지 비스가 천천히 상체만 일으켜 나를 바라보았다.

“지의, 나는 이 땅의 쿠마리들을 전부 인간으로 만들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건 결국 인간이니 말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건 결국 인간…….’

그의 말이 가슴을 후벼팠다. 세상을 파괴하려는 신, 세상의 유지에만 몰두하는 신, 그리고 인간의 희생으로 종말을 막으려는 세상. 그 어느 것도 인간의 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있던 모든 삶 속에서 오직 인간만이 인간의 편이었다.

“나도 도울게.”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후 말을 덧붙이자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고맙군.”

비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웃어 보였다.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의 ‘언젠가 모든 사람들이 네게 구해 줘서 고맙다고 할 거야’의 씨앗 개화]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는 각성자 ‘신지의’의 말에 영향을 받는다.]

[고유 스킬 ‘호령여산(號令如山)’의 파괴력 증가]

비스의 마음속에 심어 둔 말의 씨앗이 화려하게 피었다. 인간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너무도 눈부셔서 사원 안이 밝아진 것만 같았다.

-텁.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하는 자를 절대자에게서 뺏어올 수 있게 되었다.

* * *

“…사람이 많군.”

비스와 함께 광장 쪽으로 돌아오자 어느새 관리국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기자들로 바글거렸다.

비스는 칼리의 품에 안긴 채 성가시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녹두의 등에 타고 있던 코피샤도 쿠마리일 때의 모습처럼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일단 비스는 보낼까.’

나는 비스를 등지고 선 채로 입만 열어 말을 덧붙였다.

“빨리 은신 스킬 써. 이 애는 내가 데리고 갈…….”

“아니.”

-탁.

비스가 칼리의 팔에서 내려온 후 나를 슬쩍 보았다. 그러곤 절뚝거리며 코피샤에게 팔을 뻗었다.

“꼬맹이, 이제 쿠마리에 대한 미련은 없나?”

코피샤는 자기 손바닥을 한 번 보곤 손을 꽉 쥐었다.

“없어요.”

“잘됐군. 지금부터 이 세상에서 쿠마리라는 존재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러 갈 거거든.”

-스윽.

비스는 칼리를 제 몸에 빙의시키는 동시에 양팔로 코피샤를 안아 들었다. 코피샤는 비스의 목에 팔을 건 채 기자들을 바라보았고, 내가 아무 말 없이 비스를 응시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숨길 만큼 숨겼다. 이제 내가 할 말을 해야 해.”

“어떻게 얘기하려고?”

비스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나’를 조건으로 거래할 거다.”

그 말을 하는 비스의 얼굴은 당당했다. 부상 때문에 몸이 엉망진창이었지만 그의 반짝이는 눈빛엔 확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해 온 이 유치한 영웅 놀이를 끝낼 때가 됐어.”

-후웅.

비스가 공중으로 날아오르자 그가 걸치고 있던 망토 모자가 벗겨져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하지만 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코피샤를 더욱 단단히 받치며 광장을 향해 날아갔다.

-쿵.

“우와악!”

“뭐야?!”

“사, 사람이 떨어졌어!”

그는 기자들의 한가운데 착지했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한 발짝 물러나더니 곧 플래시를 터트리며 비스와 코피샤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저 꼬마, 쿠마리지?”

“다행이다, 살아 있었네.”

“네, 부장님. 쿠마리 생존 속보 기사 바로 발행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근데 저 사람은 누구야?”

코피샤가 플래시에 눈살을 찌푸리며 비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그때.

-쿵!!

검푸른 스파크를 뿜어내는 거대한 창이 바닥에 꽂혔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카메라의 셔터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칼리의 창’에게 쏠렸다.

“나는 비스 바즈라차르, 너희들이 그렇게 찾아다니던 ‘칼리의 창’이다!”

비스의 목소리가 광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카메라에 얼굴을 박고 있던 기자들은 어느새 하나둘씩 카메라를 내리고 자신들의 눈으로 비스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잠깐, 저 인간 진짜 칼리의 창이야?”

“저 창, 칼리의 창 맞는 것 같은데?

숨죽였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얹기 시작했다.

-쿵.

비스는 또다시 창으로 바닥을 내리치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아이처럼 쿠마리였다.”

비스의 말에 코피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아이의 얼굴을 보며 기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로열 쿠마리, 비스 바즈라차르야…….”

그때 기자 무리 중 한 사람이 목소리를 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그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글을 읽기 시작했다.

“20년 전 인드라 자트라 참사 직후 쿠마리를 은퇴하고 모습을 감췄다. 그의 가족도 행방을 모르는 상태다…….”

기자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비스를 다시 쳐다보았다. 비스의 붉은 눈동자에 기가 눌렸는지 기자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왕궁 내부로 대피했을 때 우리를 습격한 몬스터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각성했지.”

“쿠마리가 각성을……?”

“그런 얘기 없지 않았어?”

비스가 말할 때마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나는 녹두의 옆에 선 채로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가 자신을 숨기고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쿠마리들의 말로, 그럼에도 그가 던전에 뛰어든 이유를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쿠마리였던 애들, 다들 어떻게 됐더라?”

“아니, 정부는 이걸 보고만 있었대?”

“정부는 계속 폐지하려 했어. 왕실이 문제였지.”

“맞아. 왕실이 계속 변덕을 부렸잖아.”

왕실을 향한 쓴소리가 곳곳에서 튀어나오자 비스는 다시 창을 내리찍으며 말을 덧붙였다.

“과거의 일은 묻어 두겠다. 왕실의 사과도 필요 없다.”

비스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던 사람에게 사과조차 받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서 왠지 모를 비참함까지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것은 딱 하나.”

비스는 눈을 감은 채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다 곧 눈을 뜨며 크게 외쳤다.

“쿠마리 시스템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 땅에서 칼리의 창은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비스의 말에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광장이 조용해졌다. 그 말을 한참 곱씹어 보는 듯한 시간이 가기를 잠시, 상황 파악이 끝난 사람들이 말을 툭툭 내뱉기 시작했다.

“헉……!”

“잠, 잠깐 아까 여기 관리국장 있지 않았어?!”

“그 사람 당장 불러와!”

저마다 내뱉은 말로 광장은 어느새 소란스러워졌다. 기자들은 그제야 서둘러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비스와 코피샤의 모습을 담았다.

‘자신을 조건으로 거래한다는 것이 이런 거였군.’

비스의 저 말로 여론은 그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것이다.

안 그래도 칼리의 창을 정식 헌터로 영입하고 싶어서 안달 난 라울 국장과 정부는 왕실과 협상을 시도하겠지.

귀찮은 일은 전부 떠넘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기자들 너머의 비스와 눈이 마주쳤다. 소란스러운 풍경 사이에서 오직 그와 코피샤만이 또렷하게 보였다. 난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신으로서 살았던 기나긴 고통의 시간에 마침표가 찍혔기를 바라면서.

『SS급 비명헌터』

지추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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