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쿠마리로서의 생활을 끝내고 폐허가 된 집에 들어갔을 때보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앞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얼굴을 쓸었지만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왕궁 안의 쿠마리 사원이 파괴되어 있었다.
-쾅!!
사원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사원과 가까워지는 동안 머릿속에서 최악의 상황이 그려졌고, 심장이 빠르게 뛰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내가 던전을 도는 동안 다른 게이트가 터지기라도 한 건가?’
사실 원인은 뭐든 상관없었다. 그저 디브나만, 제발 디브나만큼은 살아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쿵.
“디브나!”
사원의 가장 높은 곳에 발을 딛자마자 녀석의 이름부터 불렀다. 허리를 숙여 구멍 뚫린 바닥을 내려다보니 이미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바스락.
그때 뭔가 발에 밟혔다, 디브나가 항상 몸에 걸치던 붉은색의 두꺼운 숄이었다. 그것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앞으로 가져왔다.
짐승의 발톱처럼 굵은 것으로 찢긴 숄은 피에 완전히 절여져 있었다.
숄이 아직도 축축한 걸 보니 상처가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것이다. 부상을 입은 채로 대피했겠지. 아니, 대피했어야만 한다.
절망적인 미래를 억지로 밀어냈다. 디브나는 분명 살아 있다. 그걸 믿고 움직여야 한다.
“거기 누구야! 여긴 통제 구역이…….”
-쾅!
내게 소리친 녀석 바로 앞에 착지해 목에 창을 들이밀었다. 칼리의 팔로 녀석의 머리를 잡아 도망가지 못 하게 하자 공포에 질린 갈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여기 있던 쿠마리 어디있어.”
“뭐, 뭐…….”
“디브나 바즈라차르야 어디 있냐고!!!”
-드르륵.
녀석이 내 말에 대답하기 전에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먼저 귀에 꽂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바퀴 달린 침대 위에 누군가의 몸이 새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 나는 창을 거두고 그대로 침대를 향해 발을 옮겼다.
‘아니야, 아닐 거야. 아니라고.’
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게 디브나일 리 없다. 녀석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다. 아니, 죽어선 안 된다.
나와 함께 쿠마리가 사라지는 걸 보기로 했는데, 이렇게 떠나보낼 수 없다.
“자, 잠깐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펄럭.
나를 막는 구급대원들의 손을 뿌리치고 천을 걷었다.
“아, 아…….”
“저기…….”
“아아아악!!”
그리고 그곳엔 이 침대에서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쿠마리의 얼굴이 있었다.
* * *
[다음 소식입니다. 며칠 전 랄릿푸르에서 발생한 C급 게이트 오픈 사고로 인해 로열 쿠마리 디브나 바즈라차르야가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왕실은 애도의 뜻을 표했고, 유가족의 뜻을 따라 장례는 비공개로 치러졌습니다.]
-탁.
텔레비전을 끄자 좁은 여관 방은 순식간에 적막에 빠졌다.
랄릿푸르에서 생성된 C급 게이트는 비행형 몬스터들로 바글거리는 던전이었다. 하필 놈들 중 하나가 왕궁 쪽으로 날아가 그대로 사원을 날려 버렸다고 했다. 사원 안에서밖에사원 안에서만 생활할 수 없던 디브나는 놈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결국 디브나는 갈기갈기 찢긴 망토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후두둑.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닦을 새도 없이 떨어지는 터라 그냥 흐르게 두었다.
내가 디브나의 말을 듣고 하루만이라도 더 늦게 출발했다면, 녀석을 구할 수 있었겠지. 이 사원에서 공격받고 피를 흘리며 죽을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겠지.
죄책감이 내 몸을 짓눌러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비스.”
칼리가 나를 불렀지만 입 밖으로 목소리를 어떻게 내는 건지 잊어버려 대답할 수 없었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않느냐.”
“…….”
“너의 슬픔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 슬픔이 너를 갉아먹게 하는 건 두고 볼 수가 없구나.”
지금 내가 후회와 죄책감으로 이성이 마비된 상태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만약 우리가 쿠마리가 아니었다면, 다른 존재로 만났다면. 더 나은 결과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
디브나가 있었기에 누군가를 도와주는 기쁨을 알았다. 디브나가 있었기에 쿠마리가 없는 세상을 꿈꿀 수 있었다.
디브나는 내 존재를 가치 있게 만들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끼익.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쿠마리 사원이 왕궁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눈에 담으며 한참을 서 있었다.
“꼭 탈레주 님 같아.”
디브나의 목소리가 귓가를 선명하게 맴돌았다. 네 말대로 나는 탈레주일지도 모른다. 쿠마리가 죽어 가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칼리를 바라보았다. 목이 메여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최대한 목에 힘을 주고 소리를 뱉었다.
“칼리 님.”
“…뭐?”
예상했지만 칼리, 아니 칼리 님은 내가 부르는 호칭에 눈을 크게 떴다.
“너, 너 방금 날 칼리 님이라고 부른 것이냐?”
“네. 아무리 불러도 도움 한 번 안 주는 신보다는 당신께서 더 높은 존재라고 느껴져서요.”
칼리, 아니 칼리 님은 내 말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그 호칭에 익숙해지신 듯호칭이 마음에 든 듯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려 웃어 보이셨다.
“뭐,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거라. 나는 내 신도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 줄 것이니 말이다.”
“전 디브나와의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쿠마리를 없애는 그 약속 말이냐?”
“네. 그러니 힘을 계속 빌려주십시오.”
칼리 님은 내 등을 끌어안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나로 존재하는 동시에, 네 힘이기도 하다.”
“…….”
“그러니 빌리는 게 아니다. 네가 내 힘을 쓰는 것뿐.”
“…감사합니다.”
‘내 힘…….’
그래, 내 힘으로 디브나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나에게 살아갈 목표를 준 디브나와 약속했으니까.
“재밌어 보이는 약속이네에에~”
“헉……!”
-챙!
그때였다. 등 뒤에서 느껴진 서늘한 기운에 곧바로 몸을 왼쪽으로 틀자, 칼리 님이 창으로 소리가 난 쪽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낡은 여관의 풍경이 순식간에 평화로운 해변으로 바뀌었다.
“깜짝 놀랐네에에…….”
바뀐 풍경에 혼란스러워하기도 잠시, 검푸른색을 가진 도마뱀이 히죽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녀석의 주위를 맴도는 검은 빛무리가 왠지 모르게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바스락.
녀석은 내 앞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나는 창조자야아. 이 세상을 만들었지이.”
“…네가?”
칼리 님이 나와 도마뱀 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놈을 밀어냈다. 도마뱀은 끙끙거리며 한발 물러나더니 말을 덧붙였다.
“비스 바즈라차르야, 맞지? S급 어둠 속성 각성자에, 로열 쿠마리였고오.”
“…도대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지?”
“그냥 거래를 좀 하고 싶어서어~”
녀석은 기묘한 말투와 함께 히죽 웃곤 다시 입을 열었다.
“쿠마리를 없애겠다는 그 계획, 내가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아아아.”
* * *
“커헉……!”
“비스 님, 비스 님!”
잠깐 정신을 잃은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걸 본 기분이었다. 주마등이 스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어쩌면 디브나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나타난 창조자 녀석 때문에 나의 계획은 라나 가문의 꿈을 조종해 그들 스스로 쿠마리 시스템을 포기하도록 만들도록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녀석들이 단번에 포기하길래 모든 일이 잘 풀릴 줄 알았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그것마저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지.
‘그래도 이번엔 이 꼬맹이는 구했네.’
묘하게 디브나를 닮은 각성자 꼬맹이는 여전히 내 앞에서 목놓아 울며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죽음에 눈물 흘려 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꽤 괜찮았다.
비록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진 못했어도 이만하면 최선을 다한 거겠지.
‘이제 다 끝이…….’
-후두둑.
무거운 눈꺼풀이 그대로 감기도록 두려 한스르륵 감기는 순간, 가슴께 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감각에 눈이 번쩍 떠졌다.
“너……!”
“크흣……!”
코피샤의 손바닥에서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는 내 상처 위로 떨어졌고, 녀석의 손에 피를 낸 유리 조각은 녀석의 다른 손에 들려 있었다.
쿠마리가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내고 있는 것이다.
“뭐하는, 거야……!”
“죽으면 안 돼요!”
코피샤는 울먹거리며 손바닥에 한 번 더 상처를 냈고, 뜨거운 피가 내 상처 안으로 흘러 들어가게 했다.
-치지직.
그러자 울컥거리며 쏟아져 나오던 피가 조금씩 굳기 시작했다. 차가워지던 몸에 열기가 도는 게 느껴졌다.
“너… 쿠마, 리를 그만둘, 윽……! 생각이냐?”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그냥 볼 바에야, 차라리 쿠마리를 그만둘래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홍수가 나를 집어삼켰다. 녀석은 그 말을 하곤 제 옷을 찢어 상처에 고인 피를 흡수시켰다.
“비스 님이 탈레주 님인 척 왔다 가시고 나서, 저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요.”
코피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전 각성자인 동시에 쿠마리예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제 기도와 축복은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해 준다고 했어요.”
“…….”
“하지만 다친 사람들을 낫게 만들어 주진 못해요. 그 사람들을 진짜로 치료해 줄 수 있는 건 제 피고, 제 스킬이에요.”
-투둑.
눈물이 내 얼굴 위로 떨어졌다. 아득해졌던 정신이 녀석의 치료 덕분에 또렷하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녀석의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저는 영혼을 치유하는 신으로 살기보단, 상처를 치료하는 인간으로 살래요.”
아이는 스스로 신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녀석의 손바닥에서 흘러내리는 핏줄기는 내 생명이 되고,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영혼을 위로했다.
인간을 구원하는 건 역시 인간밖에 없구나.
길에서 죽어간 어린 쿠마리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구하지 못한 생명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바뀌지 않는 현실에 절망했다. 그럼에도 인간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인간들이 바뀌면, 그들을 둘러싼 세상 역시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쾅!!
그때 입구의 문이 완전히 뜯어졌다. 네모난 입구를 통해 밝은 빛이 들어오고, 그 한가운데 검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실루엣의 주인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다 이내 나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비스!!”
디브나 이후로 나의 존재를 찾아 준 최초의 존재, 신지의였다.
『SS급 비명헌터』
지추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