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콰과광!!
창으로 청동 그릇을 내려찍자 무참히 부서졌다. 파편이 이리저리 날아가 바보 같은 헌터 녀석들을 덮쳤지만, 그들도 나름 요령 있게 철 덩어리를 피했다.
[뒤틀린 존재들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평온해집니다.]
[무너졌던 질서가 올바르게 돌아갑니다.]
[경계가 닫힙니다.]
[감지된 생명체의 수 : 4]
B급 게이트의 경계는 큰 피해 없이 잘 닫혔다. 숨을 천천히 고르며 들고 있던 칼리의 창을 다시 흩어지게 했다.
“저기 위에……!”
“아니, 저 녀석 뭐야?”
‘젠장.’
칼리를 빙의시킨 상태에서 전투에 열중하다 보니 은신 스킬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어느 틈엔가 은신이 풀린 모양이었다.
녀석들이 내 얼굴을 보기 전에 정신을 집중해 은신 스킬을 사용했다. 갑자기 사라진 나로 인해 헌터들은 우왕좌왕하며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아니, 어쩐지 아까 감지된 생명체에 4명이 떴길래 민간인이라도 휩쓸려 들어온 줄 알았더니……!”
“멍청아, 아까 그 자식 검은 망토였잖아!”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던 여자가 왁왁대며 소리를 질렀다.
“검은 망토? 그게 뭔데요?”
“아, 너 헌터된 지 이제 두 달 됐다 했지.”
“그렇긴 한데… 아무튼 검은 망토가 뭐예요?”
“갑자기 나타나서 몬스터 쓸어 버리고 사라지는 놈 있어.”
‘이상한 별명이 다 붙었군.’
던전 내부 몬스터들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참이라 슬슬 빠져나가려 했는데, 녀석들의 대화가 조금 궁금해졌다.
“게이트 터지거나 생길 때마다 나타나. 영웅 놀이를 하고 싶은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실력 좋은 녀석이라는 건 확실하지.”
“왜 정식 헌터로 활동 안 하는 걸까요?”
“돈 몇 푼 받고 관리국에서 개처럼 일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
“에이, 해외 길드에 비할 건 못 되지만, 국내에선 나름 먹고살 만하잖아요.”
녀석들의 대화 주제는 어느새 자신들의 지갑 사정으로 넘어갔다. 듣자 하니 여전히 임금은 바닥인 모양이다.
-후웅.
신세 한탄하는 녀석들을 뒤로하고 게이트 쪽으로 날아갔다.
‘이게 벌써 몇 번째냐…….’
디브나의 바보 같은 방법을 따른 지 어느새 1년이 흘렀다. 게이트가 열리거나 폭발한 곳에 몰래 찾아가서 몬스터를 해치우고, 사람들을 구했다.
언젠가 내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긍정적인 여론을 만들겠다는 명목하에 시작한 일이었는데, 이제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렸다.
게이트 발생 경보가 울리면 자다가도 눈이 떠지는 수준에 이르렀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내가?”
헌터들 틈에 유유히 섞여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오자 칼리가 키득거리며 말을 걸었다.
“디브나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라나 왕가를 몰살시키고 진짜로 도피 생활을 했을 텐데. 그 아이가 여러 사람 살렸군.”
“그냥 귀찮은 꼬맹이야.”
“그런 것 치고는 매일 모모도 사다 주고, 가족들 안부도 들려주고 있지 않느냐. 언니랑 다를 바가 없는데.”
“시끄러워.”
-탁.
디브나의 방에 도착하니 녀석은 의자에 앉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슬쩍 눈으로 훑으니 종교와 철학이 섞여 제법 수준이 높은 책이었다.
“음?”
바로 옆까지 오고 나서야 나의 기척을 느낀 디브나가 고개를 위로 들곤 활짝 웃었다. 제멋대로 튀어나온 칼리를 향해서도 예의를 표한 후 서랍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안 다쳤어?]
딱 봐도 멀쩡한데 녀석은 내가 던전에서 돌아올 때마다 가장 먼저 저 말부터 꺼냈다.
“멀쩡해.”
[별다른 소식은 없어?]
녀석에게 할 만한 이야기가 있을까 싶어 잠깐 생각에 잠겼다. 곧이어 아까 봤던 헌터 녀석들의 대화가 생각이 났다.
“나를 검은 망토라고 부르는 것 같더군.”
“와……!”
“싸우다가 나도 모르게 은신 스킬을 푸나 봐.”
디브나가 눈을 빛내며 요란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다 이내 손을 빠르게 움직여 글씨를 마구 적어갔다.
[비밀 결사대 같아! 진짜 멋있어!]
[검은 망토가 더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비스의 정체를 궁금해하면 좋겠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것 아니냐?”
내 말에 디브나는 즐겁다는 듯 꺄르륵 웃었다.
[넌 정말 멋있는 사람이야, 비스.]
“…뭐허?”
갑작스럽게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는 바람에 입 밖으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웃을 법도 한데 녀석은 입을 꾹 다물고 열심히 글씨를 써 내려갔다.
[사실 내 말을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잖아.]
[비스는 어른이고 나는 그냥 앤데…….]
[하지만 넌 내 말을 들어줬고 진짜로 사람들을 구했어.]
디브나가 잠깐 생각을 하다 다시 글을 이었다.
[꼭 탈레주 님 같아.]
-쿵.
그 말을 본 순간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 감각이 묘하게 중독적이었다.
탈레주의 현신으로 살아 온 그 시간이 저주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 아이에게 탈레주 같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그렇게 불쾌하지 않았다.
‘아, 나 지금 기쁜 거구나.’
인형처럼 앉아 사람들의 이마를 몇 번 짚어 주는 걸로 구할 수 없던 생명을, 지금은 확실하게 구하고 있으니까. 이제야 나의 존재 이유를 찾은 기분이었다.
“몸에서 피비린내가 나는데 탈레주는 무슨 탈레주.”
내 감정을 들키는 게 싫어 입 밖으로는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 그러자 디브나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펜을 쥐었다.
[어… 그럼 칼리 님?]
“아하하학!!”
“야……!”
내 귀 바로 옆에서 녀석이 소리 내어 웃었다. 방 전체가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지만 당연하게도 나와 디브나에게 밖에 들리지 않았다.
“푸흐흐…….”
디브나는 문틈으로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그 큰 눈이 다 접히도록 웃었다.
피를 뒤집어쓰고 야만스럽게 몬스터를 해치우는 것도 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신이 되어 누군가를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은 삶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 *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사람들을 구하는 건 내게 엄청난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나를 향해 괘씸하다고 말하면서도 결국은 다들 나의 도움을 반가워했다.
디브나와의 만남도 어느새 5년을 훌쩍 넘겼다. 내 허리쯤 오던 키는 어느새 어깨까지 자랐다.
[S급 게이트라고 했지?]
디브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메모지 너머로 걱정 가득한 얼굴이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걱정하지 마. 열린 지 꽤 됐으니까 헌터 녀석들도 어느 정도 공략한 상태겠지. 아마 나는 보스나 좀 상대할 거다.”
[A급 갔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잖아.]
[너무 급해.]
내가 무리한다고 생각한 건지 녀석이 웬일로 나를 말렸다.
“사람들 열심히 도와달라고 했던 사람이 누구였더…….”
“왕실 신년 축사할 때 정체 드러내려고 그러는 거지?”
이번엔 제 목소리까지 내며 내게 물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디브나가 말한 대로, 나는 왕실이 신년 축사를 할 때 카메라 앞에 나타나 모든 부조리함을 폭로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엔 쿠마리의 해방을 이야기해 여론을 뒤집으려 했다.
“비스, 네가 노력해 준 덕분에 국내 게이트 수는 많이 조절됐어. 나라가 안정화가 되니 제 자식을 쿠마리로 내모는 부모들도 서서히 줄었고.”
“…그건 좋은 소식이군.”
“하지만 네가 너무 무리하고 있잖아.”
녀석은 입을 비죽이며 내 망토 자락을 잡았다.
‘제대로 쉬어본 날이 거의 없긴 하네.’
신년 축사 계획을 이루려면 나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필요하다. ‘검은 망토’이자 ‘칼리의 창’인 나를 소위 ‘영웅’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게이트가 발생하고 폭발하는 현장에 무조건 나타나야 했다.
-텁.
디브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호기심 많던 어린 애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 내 걱정까지 한다. 우습고 기특한 아이다.
“괜찮다. 오히려 슬슬 끝이 보이니 에너지가 솟는군.”
“…미워.”
“그래. 미워해라.”
-펄럭.
망토를 뒤집어쓴 후 다시 창틀을 밟고 나갈 준비를 했다.
“비스.”
그러자 녀석이 나를 불렀다. 디브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꼭 돌아와야 해!”
오늘따라 유난히 녀석이 나를 붙잡았다. 나는 그런 디브나를 향해 웃어 보인 후 손을 흔들었다.
“알겠어. 한 3일 정도만 기다려.”
-후웅.
창밖으로 몸을 던진 후 교외의 S급 게이트 오픈 현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이번 게이트만 수습하면 쿠마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길에서 죽어 가던 어린아이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할 수 있다.
오직 그 생각만으로 던전에 몸을 던질 수 있었다.
* * *
-쿵.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 원숭이 몬스터가 결국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놈의 몸뚱이는 모래 알갱이처럼 산산이 부서지더니 바람에 쓸려 사라졌다.
“클리어했다!”
“으아아아!!”
함께 싸웠던 헌터 녀석들이 소리를 지르고 양손을 번쩍 들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야, 칼리의 창! 고맙다!”
“아~ 새끼 얼굴 좀 보여 주지.”
“신비주의 언제 깨지냐?”
“으하학!”
전투의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녀석들은 시답잖은 말에도 깔깔거리며 웃었다. 바보 같은 녀석들을 눈 앞에 둔 채 인벤토리에 넣어 뒀던 스톱워치를 꺼냈다.
‘던전 밖 시간으로 이틀 좀 넘게 걸린 것 같군.’
다행히 디브나와 약속한 3일보다는 적게 걸렸다.
예상치 못한 부상이 있긴 했지만, 광역 치유 스킬을 가진 놈 덕분에 이 정도면 약국에서 파는 약으로 대충 상처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후웅.
창 상태로 둥둥 떠 있던 칼리를 내 몸에 빙의시킨 후 열린 게이트 틈 사이로 빠져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헌터들에 의해 게이트 밖 몬스터들도 얼추 정리되고 있었다.
‘칼리의 창’에 대한 신화는 헌터들의 입을 타고 계속해서 퍼지고 있었다.
신문에서도 나의 존재를 궁금해하고 있고, 관리국은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애타게 나를 찾고 있다.
드라마틱한 연출을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춰진 것이었다.
‘신년 축사 때까지는 디브나랑 만나면서 좀 쉴까.’
연이은 전투의 피로 때문에 몸 전체가 저릿하고 욱신거렸다. 오늘만큼 휴식이 절실한 적이 없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을 디브나를 먼저 만나야 했다.
-휘이잉.
“…연기 냄새?”
수도 쪽으로 들어서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변에 불이라도 났나 싶어 둘러보았지만 따분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그럼 도대체 왜…….’
무심코 고개를 들어 왕궁을 바라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디브나를 가둔 사원의 반이 누군가 도려낸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SS급 비명헌터』
지추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