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쿠마리, 탈레주 신의 그릇이 된 어린아이들.
국왕보다도 높은 자리로 받아들여지며, 신으로서 사람들을 축복하는 존재. 하지만 쿠마리의 삶이 끝나고 다시 인간이 되면 그들은 냉혹한 현실로 돌아온다.
수년간 제 발로 걸어본 적도, 사람을 사귄 적도, 제 감정에 따라 웃고 울어본 적도 없는 아이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소외되기 마련이다.
그뿐이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쿠마리였던 자와 함께 살면 정기가 빠져나간다는 미신 때문에 제 아이를 두고 떠나 버리는 가족들도 많으니까.
17살이었던 내가 쿠마리에서 다시 인간이 되어 집에 왔을 때, 나는 후자에 속한다는 걸 알았다.
텅 빈 집 안에는 먹을 거 하나 없이 벌레와 쥐가 들끓고 있었고, 깨진 창문을 통해 서늘한 바람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옷가지가 삐져나온 서랍장을 열자 지폐 다발이 든 봉투와 휘갈겨 쓴 편지가 있었다. 마치 도망가는 사람이 쓴 것처럼 말이다.
[비스에게
안녕, 아가. 이 편지를 볼 때쯤이면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왔겠구나.
우리 가족에게 있어, 너는 늘 자랑스러운 딸이었단다.
엄마의 병 때문에 용감하게 쿠마리 시험에 도전하고, 마침내 그 자리에 올랐으니.
우린 네가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사랑한다.
―아빠가]
-찌익.
편지를 찢었다. 아주 잘게 찢어버린 후 주변에 있던 벌레들을 밟아 죽이고 나서야, 내가 온 집안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허억, 헉, 허억…….”
분이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고작 몇 분 서 있던 것만으로 몸이 부서질 것 같았던 난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사라락.
그때 검은 머리카락이 내 눈앞에 떨어졌다. 고개를 드니 죽음과 파괴의 신이 안타깝다는 듯 나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야. 저건 신이 아니다.’
내 스킬로 만들어 낸 허상의 신일 뿐, 진짜 신이 아니다. 성가신 그 머리카락들을 치우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몸을 움직인 것뿐인데 주위에 먼지가 일었다.
“내가 싫으냐?”
“당연한 걸 묻고 있어.”
“그래도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이제 너와 운명을 함께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 운명…….”
그래, 운명이라면 운명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필 ‘바즈라차르야’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 로열 쿠마리가 되었고, 각성자가 된 것도 모자라 가족에게까지 버림받은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흔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콜록.”
일단 먼지가 가득한 집을 나왔다. 저런 집에서 자느니 싸구려 여관이 훨씬 나을 것이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은신 스킬을 썼고, 그대로 더르바르 광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광장은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지만 관광객들은 그것이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열심히 사진을 찍기 바빴다.
-털썩.
빈 벤치에 앉아 반쯤 부서진 쿠마리 사원을 바라보았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저곳은 내가 머물던 곳이었다. 생활은 불편했지만 적어도 배를 곯거나 매일 밤 벌레와 엄마의 기침 소리에 잠을 설칠 일은 없었던, 기묘한 감옥이었지.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원흉이 뭐지?’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궁금해졌다.
몬스터가 내게 달려왔을 때 그 가짜 신을 내 몸에 덧씌우지 않았더라면, 난 그 자리에서 안락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애초에 쿠마리가 됐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아픈 엄마가 문제일 리는 없는데.
내 질문에 명확한 대답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지 않았다.
“리수아가 자기 남편한테 왕위를 넘긴다지?”
“갑작스럽네.”
“로열 쿠마리가 실종된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다. 워낙 쿠마리를 존경하던 사람이었잖아.”
“딱하기도 하지.”
기념품 가게 앞에서 담배를 피던 녀석들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녀석들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리수아가… 나를 존경해?’
내가 마지막으로 본 리수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몬스터를 잡고 왕실 녀석들의 목숨을 구했을 때, 녀석이 나를 보던 바로 그 모습.
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벌레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던 그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나는 그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한 행동일 뿐인데.
“하하…….”
날 이 꼴로 만든 원인을 이제야 알았다.
‘쿠마리 자체가 문제였어.’
내게 쿠마리라는 선택지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혜로운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쿠마리, 그것도 로열 쿠마리로서의 삶이 순탄치 않을 것이란 걸 모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수잔이 잘할까? 확실히 리수아보다는 카리스마가 없어 보이는데.”
“왕실이 정치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근데 리수아가 좀 딱하긴 하네. 쿠마리가 사라진 바람에 왕위에서도 내려오고.”
나를 이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시킨 리수아 라나는 사람들로부터 동정을 얻고 있었다. 정작 내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후웅.
벤치에서 일어나 가짜 칼리를 내 몸에 덧씌운 후 곧바로 날아올랐다. 어둠이 내려앉은 수도의 북쪽, 그곳엔 내 인생을 무너트린 왕실의 거처가 웅장하게 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저게 그 건물인가…….’
쿠마리 사원이 복구될 때까지 임시 사원을 궁 안에 만들 거라고 하더니, 정말로 그렇게 했나 보다. 정원 한 편에 붉은색 목조 건물이 있었다.
광장에 있던 쿠마리 사원과 꽤 비슷한 외양의 건물이었고, 아직 안에는 아무도 없는지 어두컴컴했다.
“그러고 보니 쿠마리 시험이 다음 주에 종료된다고 했지.”
“벌써 뽑는 것이냐?”
“당연하지. 그 리수아가 쿠마리가 사라지는 꼴을 볼 것 같아?”
아마 리수아가 살아 있는 한, 라나 가문이 살아 있는 한 이 끔찍한 역사는 되풀이될 것이다.
“비스여, 무슨 생각 중이지?”
칼리가 물었다.
“다음 쿠마리가 나타나는 순간, 라나 왕가를 몰살시킬 생각.”
“아서라. 그들을 죽인다면 네 기분은 좋아질지 몰라도 결국 공허해질 것이다.”
“살육을 즐기는 너한테 들을 만한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아하하! 언제는 내게 가짜 신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진짜인 걸 인정하는 것이냐?”
가짜 칼리의 말에 심사가 묘하게 뒤틀렸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공허해져도 상관없다. 지금 내게 복수심 말고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 * *
“새로운 쿠마리다!”
“와아!”
“나도, 나도 볼래!”
사람은 새로운 쿠마리의 탄생을 환영했다. 녀석의 이름은 ‘디브나 바즈라차르야’.
내가 쿠마리가 됐던 나이와 똑같은 7살의 여자아이였다. 큰 눈과 검은 눈동자, 길고 가느다란 목. 녀석은 여느 쿠마리와 다를 것 없는 얼굴을 가졌다.
새로운 로열 쿠마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새 사원의 창문을 통해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저 멍청한 인간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왕궁 밖에서 쿠마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후웅.
인파 속에 섞여 있던 중 나는 은신 스킬을 쓰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것을 눈치챌 리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새로 지은 쿠마리 사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궁 건물 안에서 라나 가문이 걸어 나왔다. 현 왕인 수잔, 선왕이자 그의 부인인 리수아, 그리고 그들의 어린 아들까지.
‘한 번에 죽일 수 있겠군.’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돌아갔다. 새로운 쿠마리의 탄생으로 축제 분위기가 된 탓에 왕궁 내부와 그 주변의 경비도 삼엄하지 않았고, 은신 스킬 덕에 누군가에게 모습을 들킬 일도 없었다.
“라나 왕가가 순식간에 개죽음당하는 걸 여기 있는 모두가 보게 되겠어.”
“후회하지 않겠느냐?”
“안 해. 여기서 저 자식들을 죽이지 않으면 그걸 더 후회할 거다.”
-철컥.
내 등 뒤로 솟아난 팔에서 창을 받아 들었다. 약해빠진 몸뚱이가 들기엔 여전히 무거웠지만, 처음 들었을 때보단 나은 자세가 나왔다.
“라나! 라나!”
“리수아 님! 다시 왕위로 돌아오세요!”
“새로운 왕 수잔!”
사람들은 라나 부부를 향해 소리치며 환호했다. 그들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어도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는 듯했다.
-으드득.
나도 모르게 이에 힘이 들어갔는지 맞물린 잇새로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라나 가(家)는 철창문을 사이에 둔 채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입가에 띄운 사람 좋은 미소가 내 가슴에 대못을 박는 듯했다.
“후우…….”
창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기회는 단 한 번.
리수아의 목을 먼저 벤 후 수잔, 그리고 그의 아들을 죽인다. 모든 건 10초 안에 끝내야 해.
“아이는 뭔 죄지?”
“라나라는 성을 가진 죄.”
“그럼 쿠마리가 되어 좋지 못한 말로를 맞이한 녀석들은 샤캬, 바즈라차르야라는 성을 가진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건가?”
“시끄러워!”
귀를 틀어막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듯한 이 목소리는 외면하려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내 목을 조여 왔다.
-끼긱.
수잔이 몸을 돌려 쿠마리 사원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동안, 나는 자세를 잡고 리수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내 발에 입 맞추며 나의 축복에 눈물을 흘리던 여자는 내가 피를 뒤집어써 가며 모두를 구하자마자 내게서 등을 돌렸다. 결국엔 내 모든 삶을 완전히 파괴했고.
나는 그런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딴 시스템을 계속해서 굴러가게 만드는 왕실에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후우웅.
리수아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창의 무게 때문에 몸이 휘청거렸지만, 양팔에 힘을 주어 버텼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모습이 안 보이리라는 걸 알지만 마음 한 편이 불안해 고개를 살짝 돌린 그 순간.
“…어?”
사원 창문 너머로 디브나 바즈라차르야와 눈이 마주쳤다.
-쿵.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나도 모르게 창을 빠르게 거두었다. 그러곤 리수아와 거리를 벌리며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리수아는 방금 전 제 목 바로 앞에 창이 들이밀어졌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사람들을 향해 웃고 있었다.
‘우연이겠지……?’
하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엔 그 어린 쿠마리는 너무나도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리수아에게 뒀던 시선을 사원 쪽으로 옮겼다. 창문 너머로 왜소한 인영이, 그리고 조용히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듯 응시하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면 안 돼.’
녀석이 입 모양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빠르게 뛰던 심장은 어느새 내 몸 전체를 울리기 시작했다.
액자 같은 창문의 한 가운데 고집스러운 얼굴을 한 여자아이.
그것이 나와 디브나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