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쾅!!!
“커헉……!”
거대한 낫이 바닥에 꽂히자마자 몸을 쥐어짜던 무형의 힘이 사라졌다. 중심을 잃은 탓에 몸이 뒤로 넘어갔고, 곧바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쯧, 자기가 말해 놓고 자기가 당하다니.”
“비스……!”
비스가 나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그는 칼리를 빙의시킨 상태인지 그의 등 뒤로 검푸른 팔이 둥둥 떠 있었고, 바닥에 박아 넣은 대낫을 네 개의 팔로 꺼내 들었다.
-후두둑.
그러자 방금 전까지 내 목을 베려 했던 석상의 잔해가 바닥을 굴렀다.
“네 바보 같은 실수만 아니었어도 내가 직접 나설 일은 아니었는데.”
“고마워. 덕분에 살았, 윽…….”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야 목에서 강한 쓰라림이 느껴졌다. 손으로 아까 찔렸던 곳을 매만지자 검붉은 피가 끈적하게 묻어 나왔다.
그래도 비스 덕분에 이 정도 상처로 끝난 것이다. 칼날이 조금만 더 깊게 파고들었으면 스틱스 강을 쓰기도 전에 목숨이 날아갔을 것이다.
“신지의 헌터, 괜찮아?!”
“네, 괜찮아요. 이 정도는 금방 나을 거예요.”
하미준 헌터가 내 목을 한 번 살핀 후 곧바로 비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커다래졌다. 비스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대놓고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홱 돌렸다.
“모습을 드러내 줬네, 칼리의 창.”
“…….”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일 줄 알았다면 더 빨리 찾아다닐 걸 그랬…….”
-후웅.
하미준 헌터의 느끼한 멘트에 비스가 그를 향해 낫을 휘둘렀다. 하미준 헌터는 양손을 든 채로 뒤로 한발 물러나며 능글거리는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어머, 말 알아듣네?”
“성가신 녀석을 동료로 두고 있구나.”
“실력은 좋으니까 봐줘.”
비스를 겨우 달래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터는 동안, 공격을 피해 물러나 있던 하미준 헌터가 내 옆으로 느릿하게 다가왔다.
“그나저나 던전 초입의 일반 몬스터에게도 정신계 스킬이 있을 정도면, S급 중에서도 꽤 상급에 속하겠군.”
“그러게요. 중간 보스나 최종 보스 몬스터 상대할 때는 더 긴장해야겠어요.”
석상의 잔해를 밟으며 중얼거리는 하미준 헌터의 말에 대답한 후, 게이트 위에 덧대어 놓은 쉴드를 살폈다. 금이 조금 간 것을 제외하고는 멀쩡했다.
-끼리릭, 끼리릭.
이번엔 왼쪽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줄이 둘둘 감긴 도끼들이 줄지어 다가오고 있었다.
[S급 몬스터 ‘지혜의 도끼’]
[대지 속성]
- 내려찍기
- 베기
- 포박
- 자가 복제
[*최대 4개까지 자신의 모습을 복제할 수 있다*]
특별히 위협적인 스킬은 없지만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유형의 몬스터였다. 감았던 오른쪽 눈을 다시 뜬 후, 하미준 헌터와 비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포박이랑 복제 스킬이 있어요. 최대 4개까지 자신의 모습을 복제할 수 있다고 해요.”
“딱 봐도 열 마리는 되어 보이는데, 전부 자가 복제해 버리면 볼만 하겠네.”
하미준 헌터가 비꼬듯이 말하며 자신의 은도끼를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빙의 상태를 유지 중인 비스는 여러 개의 손으로 대낫을 쥔 채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도끼를 바라보기만 했다.
던전 밖 시간은 지금쯤 네다섯 시간 정도 흘렀을 것이다. 슬슬 최민 헌터 일행이 도착할 시간이 됐으니, 이번 공격만 버티면 최민 헌터와 함께 바로 사원 안으로 들어가 던전을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자의 무기 창고.’
-철컥.
바주카 형태의 자아를 꺼내 도끼들을 향해 겨누었다.
-콰과과광!!
포구에서 빠져나온 굵직한 소리 포탄이 도끼들의 행렬을 헤집어 놓자, 곧바로 나무뿌리가 공중으로 날아가는 도끼들을 휘감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서걱!
뒤이어 비스가 가볍게 날아가 나무뿌리에 엉킨 도끼부터 공격했다. 대낫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도끼를 둘둘 감은 밧줄이 찢겨 나갔고, 동시에 도끼날과 손잡이가 분리되었다.
‘엄청난 파괴력이야.’
신분을 숨기느라 WHDB에 각성 정보를 등록할 수 없어서 그렇지, 만약 등록이 된다면 DF 랭킹 5위 안에는 어렵지 않게 들었을 것이다.
“큿!”
그때 두 동강 난 도끼 하나가 네 개로 갈라져 일제히 비스를 향해 날아갔다.
-탕!
확성기로 바꾼 자아의 방아쇠를 당기자 새하얀 탄환이 정확히 도끼를 맞혔다. 뒤로 밀린 도끼가 다른 도끼들까지 한꺼번에 친 덕분에, 그것들은 궤도를 바꿔 엉뚱한 곳으로 튕겨 나왔다.
“아우우-!”
-콰과광!!
공중에 있던 녹두가 하울링으로 도끼를 부순 후 지면을 향해 급강하했다.
-까드득.
그러곤 다른 도끼들에 달린 밧줄을 한 번에 입에 물어 공중으로 다시 날아올랐다. 녹두에게 잡힌 도끼 다섯 개가 힘없이 공중으로 달려 올라갔다.
“잘했어! 좀만 버텨 녹두야!”
‘알겠어!’
-쾅!
박격포를 바닥에 꽂아 넣고 녹두가 움직일 경로에 포구를 겨누었다. 녹두가 포구를 지나 줄에 연결된 도끼들이 둥그런 포구의 바로 위에 다다른 순간.
-퍼버버벙!!
미사일처럼 날아간 소리 포탄이 그것들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철그럭철그럭.
복제할 틈도 없이 산산조각 난 도끼들이 바닥 위로 비처럼 쏟아졌다. 잔해들이 제법 위협적이라서 쉴드로 머리를 가린 채로 그 영역에서 벗어났다.
“녹두야 안 다쳤지?”
‘응! 멀쩡해!’
녹두의 우렁찬 대답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혹시라도 다쳤으면 어쩌나 했는데, 녹두는 너무나도 완벽히 제 몫을 해내고 있었다. 녀석은 의기양양한 태도로 하울링을 뽑아내며 다른 도끼들을 공격했다.
“허.”
그때 누군가의 헛웃음이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비스의 어깨 위에 있던 칼리가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스킬이군.”
“너도 파괴력 엄청나던데?”
-파바밧.
서로 덕담을 주고받기도 잠시, 남은 도끼의 밧줄이 뱀처럼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낮말을 듣는 새로 허공을 디뎌 그것을 피하며 자아를 다시 쥐었다.
하미준 헌터가 도끼를 던져 밧줄을 땅에 고정시킨 후, 바닥을 위를 향해 걷어차 나무뿌리들을 끄집어냈다.
-콰드득.
굵은 뿌리가 도끼들을 휘감는 동안 하미준 헌터는 그것들과 빠르게 거리를 좁혀 땅에 꽂힌 자신의 도끼를 다시 뽑아냈다.
“흡!”
-쩌엉!!
온 힘을 다해 뿌리를 내려치자, 뿌리와 함께 지혜의 도끼가 반 토막이 났다.
-쿠구궁.
마무리하러 온 칼리가 검은 연기를 남기며 하미준 헌터 바로 옆에 섰다. 이내 자신의 손들에 들린 온갖 무기들로 도끼들을 마구 내리치기 시작했다.
‘살벌하구만.’
파괴의 신답게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도끼 떼의 한가운데 서서 그 날붙이들을 전부 반 토막 냈다.
-타닥.
“어이쿠.”
칼리의 공격에 휘말릴 뻔한 하미준 헌터가 뒤로 도약해 내 옆에 착지했다.
“와, 저건 또 뭐야?”
“말조심해라. 칼리 님이다.”
“아하하, 혹시 그쪽이 소환한 거야? 신을 소환하다니, 대단한데?”
하미준 헌터의 태도에 비스가 그를 한 번 쏘아보곤 다시 칼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한 2마리 정도 남았나.’
복제되는 것까지 생각하면 8마리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끝이 보이는 듯했다.
-끼리릭.
칼리가 도끼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 틈을 타 자아를 다시 박격포 형태로 바꾸었다. 칼리의 움직임에 따라 포구의 위치를 천천히 조절하며, 공격을 퍼부을 타이밍만을 기다렸다.
-쾅!
칼리의 낫이 도끼들을 한 번에 낚아채 바닥으로 꽂은 순간.
-콰과과광!!
박격포를 통해 나온 소리 포탄이 도끼들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근처에 있던 칼리가 몸을 움찔 떨며 나를 돌아보더니 이내 비스 옆으로 빠르게 날아왔다.
“공격 한번 대범하군.”
“내가 아군으로 인식한 상대에겐 안 통하니까 걱정 마.”
칼리에게 대답하는 동안, 지혜의 도끼는 스스로를 복제하기 위해 바닥 위를 파르르 떨며 기어 다녔지만 역부족이었다.
-파스슥,
결국 도끼는 완전히 가루가 되어 모래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후우.”
“피곤한 상대였네.”
하미준 헌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으로는 주위를 살폈다.
우리의 오른편에서 왔던 ‘지혜의 파편’과 왼편에서 온 ‘지혜의 도끼’, 보스 몬스터인 ‘가네샤’가 행운과 지혜를 상징하는 신이라고 했으니 다음에 나타날 몬스터는 행운과 관련된 녀석이 나올 수도 있겠어.
일단 입구 쪽에서 소환될만한 녀석들은 전부 다 소환된 모양이었다. 입구 주위가 완전히 조용해지자 비스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가 인벤토리에서 물을 꺼내 들이키는 동안, 나는 어느새 내 옆으로 돌아온 녹두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이제 정말로 최민 헌터 일행이 올 때까지 기다리…….’
-홰애액.
멀리서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순간적으로 귀에 꽂혔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기분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엇, 잠깐……!”
콰그작!
사원 안에서 날아온 도끼가 게이트 입구를 막아 두었던 나의 쉴드 정중앙에 박혔다.
-쩌저적.
쉴드에 간 금이 점점 영역을 넓히더니 이내 완전히 깨져 던전 밖으로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밖에 관리국 녀석들이 있을 거다! 지금 저게 나가면 위험해!”
-쨍그랑!
비스가 큰 소리를 내며 칼리를 게이트 쪽으로 보냈지만, 곧바로 쉴드가 깨진 바람에 도끼는 기어코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
“다들 조심하세요!!!”
소리를 지르며 자아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그 순간.
-퍼버벙!!
시뻘건 불의 벽이 도끼를 가로막았다.
-끼기기긱.
도끼는 일렁거리는 불꽃을 파고들지 못하고 벽에 박힌 채로 웅웅거릴 뿐이었다.
‘저 불은……!’
-콱.
불의 벽에서 긴 손이 나오더니 이내 도끼를 움켜쥐었다.
-퍼버벙!
손안에서 새파란 폭발을 일으키자 도끼가 활활 타 곧 재가 되었다.
“저, 저게 대체…….”
비스는 말까지 더듬었다. 입술을 달싹이는 걸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머릿속으로 정리가 되지 않은 듯했다.
던전 안에 있는 모두가 그 손을 보며 잠시 넋이 나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의 벽이 사라지고, 손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당황했던 하미준 헌터의 표정이 이내 여유를 찾았다.
“하하, 드디어 왔군.”
짧게 친 붉은 머리카락과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 그 안에 박힌 검붉은 눈동자.
“다들 괜찮으십니까?”
그토록 기다리던 최민 헌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