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경보가 울리긴 했지만 현장에 도착한 건 나와 비스뿐이었다. 비스는 게이트 앞에 도착하자마자 빙의 상태를 풀고는 칼리를 따로 소환했다. 칼리는 비스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로 중얼거렸다.
“쳇,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새 게이트가 열렸군.”
“S급이야.”
“뭐?”
내 말에 칼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구원자의 눈동자로 다시 게이트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S급 게이트고, 보스 몬스터는 가네샤.”
“너… 아까부터 어떻게 그런 걸 아는 거지?”
비스가 미간을 구긴 채로 물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 상황에서 회귀에 대한 말을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이야기할게.”
“…….”
“엇, 저기 게이트다!”
“누가 벌써 와 있는데?”
사람들이 서서히 도착해 게이트를 보며 말을 얹기 시작했다.
“쳇.”
비스는 혀를 차며 모습를 숨겼고 동시에 칼리는 창이 되어 내 옆을 둥둥 떠다녔다.
-펄럭.
나도 락슈미의 숄을 인벤토리에 넣은 후 아이테르의 로브로 빠르게 갈아입었다.
게이트는 아직 열리기 전, 하지만 길어 봤자 5분이다. 5분 후면 저 게이트는 클리어가 될 때까지 절대 닫히지 않는다.
“칼리의 창이다!”
“그럼 해결된 것 아니야?”
“아, 그럼 됐네.”
점점 몰려드는 인파 속에서 비스를 향한 막연한 기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만큼 이 게이트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몬스터의 정체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겠지만, 둘이서 S급 게이트를 처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실례합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미준 헌터!”
“후, 새벽부터 이게 웬 날벼락이야.”
사람들을 헤치고 하미준 헌터가 내 옆에 섰다. 그는 셔츠 소매를 걷으며 공중에 떠 있는 칼리의 창을 슬쩍 보곤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게 그거야?”
“네. 그리고 저희가 하는 말 알아들으니까 조심하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인 후 곧바로 허리를 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라울 국장. 소식 들었지? 근데 무슨 등급인지 파악은 했어? 여기 센서는 등급도 말해 주지를 않네.”
라울 국장과 통화를 하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었다. 이 게이트가 S급이라는 걸 들은 모양이다.
그가 통화를 하는 동안 나는 게이트와 몰려든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바트 씨가 열심히 정돈을 시키긴 했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칼리의 창을 핸드폰으로 찍거나 게이트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오케이, 알았어. 회장님께는 내가 말해 놓을게.”
하미준 헌터가 전화를 끊고는 인벤토리 안으로 핸드폰을 집어던지듯 넣었다.
“네팔 던전 관리국이 대한민국 헌터 협회에 공식 협조 요청을 보낼 거야. 공문은 나중에 보내기로 하고 일단은 전화로 처리…….”
그는 잠깐 말을 뚝 멈추곤 나를 정면으로 내려다보았다.
“이건 회장님한테 말해도 되는 거지?”
“괜찮아요. 의심은 좀 받겠지만 저희는 일단 라울 국장 만나러 온 거니까요.”
“너무 많이 알고 있으면 이게 문제라니까. 매사에 너무 조심스러워져.”
하미준 헌터가 어깨를 으쓱거린 후 곧바로 김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후웅.
이번엔 창으로 변한 칼리가 내 옆으로 조용히 날아왔다.
“혼자서 S급 던전을 돌아본 적이 있느냐?”
“없어.”
“흠. 보스 몬스터가 ‘가네샤’ 녀석이라는 걸 들으니 아무래도 까다로운 던전인 것 같은데 말이지.”
“어, 뭔지 알아?”
“몬스터로서의 ‘가네샤’는 모르는데, 그냥 가네샤는 알고 있다.”
무슨 소린지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칼리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가네샤도 나와 같은 신이다. 인간들은 그 녀석이 행운과 학문적 성취를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에 그 녀석의 동상 같은 걸 집에 둔다고 하더군.”
“행운이랑 학문적 성취?”
“과연 몬스터가 된 녀석이 그걸 어떻게 발휘할지 기대되네.”
크로노스 때처럼 물리적인 단순 전투라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 순간, 난도는 걷잡을 수 없이 상승한다.
‘긴장을 놓치면 안 돼.’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자아를 손에 쥐었다.
-끼기기긱.
내 준비가 끝났다는 걸 알았다는 듯, 게이트가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협조 요청 내용은 전달했어. 이 던전은 나, 신지의 헌터, 그리고 최민 헌터가 공략할 거야.”
“최민 헌터요?”
“응. 지금 바로 파견 가능한 S급이 최민 헌터 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아, 그리고 던전 밖 대기조로는 민지호 헌터와 이상욱 헌터가 지원해 준대.”
하미준 헌터는 느릿하게 열리는 게이트를 보며 손목을 풀었다.
“지금 바로 출발해도 이런저런 절차 거치면 아마 여기 시간으로 오전 11시에나 도착할 거야.”
“그전까지 던전 초입에서 몬스터가 나가지 않게 처리하면 되겠네요.”
“그렇지. 그리고…….”
하미준 헌터가 칼리의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은 검푸른 스파크를 위협적으로 뿜어대고 있었다.
“칼리의 창이라고 했지? 일단 잘 부탁해.”
“…….”
“아, 말을 못 알아들으려나?”
하미준 헌터는 뻔히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말했다.
-쿵.
게이트가 완전히 열림으로써 잠깐의 어색한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뒤를 흘긋 바라보니 사람들이 어느 정도 대피한 건지 아까보다는 그 수가 많이 줄었다.
“녹두야.”
-키이잉.
녹두가 빠르게 모습을 드러내며 내 옆에 당당히 섰다. 대피하던 사람들의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녹두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게이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얼른 들어가죠.”
“그래.”
나와 하미준 헌터가 먼저 던전 안으로 발을 들이자 칼리의 창도 뒤따라 들어왔다. 보이진 않지만 아마 비스도 함께 들어왔겠지.
던전은 사막 한가운데처럼 모래 연기로 자욱했다. 소매로 입과 코를 가린 채 주위를 살피자 정면에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 먼지가 걷히자 그제야 그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사원이군.”
돌로 된 커다란 사원이었다. 외벽에 붙어 있는 정교하게 조각된 동상들과 장식물을 나도 모르게 넋 놓고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직 몬스터는 소환되기 전인가.’
사원 안에 몬스터가 들끓고 있겠지만, 일단 게이트 주위엔 황량한 모래사막뿐이었다. 카트만두에서 처리했던 C급 게이트도 그렇고, 네팔의 던전은 확실히 신과 관련된 곳이 많은 것 같네.
“라울 국장은 게이트 밖에서 대기하고 있나요?”
“응. 혹시라도 몬스터가 빠져나가면 처리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게이트 밖을 슬쩍 보니 다행히 사람들이 모두 대피한 상태였고, 광장 주위로 펜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파지직.
그때 칼리의 창이 반응했다. 불규칙적으로 튀어나오는 검은 스파크가 오른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검은 형체들이 있었다.
‘거미?’
둥그런 형체에 팔처럼 보이는 것들이 네 개씩 붙어 있었다. 그것들은 거미처럼 빠르게 기어 왔다.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고 나서야 생김새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윽…….”
“어머, 징그럽네.”
돌로 된 코끼리 머리에 팔이 달린 몬스터였다. 팔 두 개로는 다리처럼 사용하여 우리를 향해 미친 듯이 기어 오고 있었다. 남은 두 팔에는 날렵한 칼 두 자루가 들려 있었다.
-콰드득!
하미준 헌터가 뽑아 올린 나무뿌리가 녀석들을 휘감는 동시에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옭아매는 힘을 버티지 못한 팔 몇 개가 그대로 으스러져 칼이 바닥 위로 떨어졌다.
-지이익.
하지만 그중 몇 마리는 나무줄기를 찢은 후 나와 하미준 헌터에게 달려들었다.
“흡!”
-콰직,
하미준 헌터가 도끼로 그것들을 찍고는 뒤로 한발 물러났다.
또다시 공격하려는 녀석들을 향해 자아의 방아쇠를 길게 당겼다. 그러자 우리의 바로 앞에 있던 석상과 나무뿌리에 엉켜 있던 석상들이 크게 진동했다.
‘이 틈에 어떤 녀석들인지 확인부터 하자.’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에 힘을 준 채로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녀석들을 훑었다.
[S급 몬스터 ‘지혜의 파편’]
[대지 속성]
- 찌르기
- 베기
- 시작의 소리, ‘옴’(보급형)
[*시작의 소리, ‘옴’(보급형)을 들은 생명체는 전의를 상실한다*]
‘정신계 스킬이 하나 있군.’
-투웅.
쉴드를 커다랗게 뽑아 게이트의 열린 틈부터 막았다.
-콰직!
몸을 뒤흔드는 진동이 사라져 움직임이 자유로워진 석상들이 다시 날뛰었다. 이번엔 칼리의 창이 그들의 몸을 횡으로 베었다. 연이은 공격에 석상이 산산조각이 난 채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몬스터 정신계 스킬을 갖고 있어요. 들으면 전의를 상실하게 되니까 조심하세요.”
“알겠어.”
어딘가에 있을 비스도 들었길 바라며, 또다시 날아오는 ‘지혜의 파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석상이 높이 뛰어올라 탄환을 피하자.
“아우우-!”
-쾅!!!!
위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녹두의 하울링을 맞고 몸체가 세로로 쪼개졌다.
하미준 헌터의 ‘대지의 보은’이 녀석들의 움직임을 일차적으로 막았다. 다음으로 나와 칼리, 그리고 녹두가 공격을 퍼붓는 연속 공격에 몬스터들이 하나씩 나가떨어졌다. 처음 합을 맞추는 건데도 공격 타이밍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전투 초반에 했던 걱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점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콰그작!
“녀석들, 맷집이 좀 단단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걸?”
“그러게 말이에요!”
-탕!
하미준 헌터가 녹두의 공격을 피한 석상 하나를 도끼로 튕겨 내며 말을 걸었다. 나는 튕겨 낸 석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며 대답했고, 그 석상의 몸을 칼리의 창이 두 동강 냈다.
-달그락.
떼를 지어 나타났던 석상들은 돌조각으로만 남아 바닥을 굴러다녔다. 하미준 헌터도 도끼를 다시 피어싱으로 돌려놓으며 ‘지혜의 파편’이 몰려왔던 쪽을 바라보았다.
“일단 1차 소환은 끝난 것 같…….”
-우우우웅.
“윽?!”
“컥……!”
그때였다. 하미준 헌터가 입을 열기 무섭게 기묘한 소리가 온몸을 강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몸에 들어와 말을 하는 것처럼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게 그 정신계 스킬인가……!’
머리론 알고 있지만 몸이 쉽게 따라 주지 않았다. 다리에 자꾸만 힘이 풀리는 탓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겨우 몸을 지탱하며 자아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헉……!”
“신지의 헌터!”
스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직전 석상 잔해에 묻혀 있던 ‘지혜의 파편’ 하나가 내 쪽으로 날아와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슬로우 모션처럼 모든 과정이 느릿하게 재생되는데 좀처럼 피할 수가 없었다.
‘젠장할……!’
목 부근에서 날카로운 고통이 피어오른 동시에.
-쾅!!!
모습을 감추고 있던 붉은 눈의 사도가 석상을 반으로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