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로비로 나오자 등산객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시간을 보니 한창 체크인할 시간이었다.
락슈미의 숄을 단단히 입은 후 정신없는 로비를 지나 호텔 밖으로 발을 옮겼다. 8시인데도 벌써 어둠이 내려앉아 완전히 한밤중 같았다.
‘그나저나 어디에 있으려나.’
호텔 건너편의 상점가 쪽으로 슬쩍 몸을 돌렸다.
“야.”
“깜짝이야……!”
호텔을 완전히 빠져나와 상점가 쪽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비스가 문 닫은 슈퍼마켓 앞 계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웬일로 망토 모자를 벗은 채 얼굴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고 있어도 돼? 누가 보면 어쩌려고.”
“여긴 수도만큼 CCTV가 많지 않아.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거의 없고.”
비스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왜 그렇게 급하게 만나자고 한 것이냐.”
“여기 쿠마리 이름이 코피샤 바즈라차르야 맞지?”
“맞다.
주위를 슬쩍 살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애, 각성자야.”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놀라움]
비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확실한 정보인가? 그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건 나중에 알려 줄게. 아무튼 C급 치유계 스킬을 가진 각성자였어.”
“치유계라…….”
치유계 각성자는 모든 국가에서 가장 원하는 계열의 각성자다. D급 이하의 하급 치유계 헌터가 C급 공격계 헌터 만큼의 돈을 받는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지만, 다들 그것을 용인할 정도로 치유계 헌터는 어디에서나 환영받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지금 사원 안에 갇혀 신으로 숭배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낮에 봤던 예언도 그 애의 스킬일 가능성이 커.”
“병에 걸린 사람을 구별하는 능력이라도 있다는 소리인가?”
“대충 비슷해.”
“호오.”
비스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진짜로 치유계 각성자라면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군.”
“뭔데?”
“그 녀석의 오빠가 몇 년째 심한 폐렴을 앓고 있거든.”
C급 치유계 스킬을 가졌는데 병을 앓고 있는 가족이 있다… 아무래도 각성한 건 쿠마리가 된 이후인 것 같다. 그 전에 각성했다면 가족부터 치료했을 테니까.
“뭐, 오히려 잘 됐다. 그러면 더 구슬리기 쉬울 테니까.”
“이번엔 또 어떤 작전이야?”
“박타푸르에서 했던 일과 비슷하게 가려고. 이번엔 칼리 님 대신 내가 탈레주 신의 흉내를 내겠지만.”
“잠입 위치는 파악했어?”
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네 형제가 위독하니 그의 옆을 지키라고 말하려 했는데, 방향을 바꿔야겠군.”
“직접 치료하라고 말할 셈이야?”
“그렇지.”
“쉽게 말을 들어줄지가 미지수네.”
“각성 사실을 이야기하면 내가 진짜로 신인 줄 알 거다. 선택은 결국 그 애의 몫이지.”
-바스락.
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망토 모자를 다시 썼다.
“잠깐 이쪽으로.”
-파지직.
비스는 자신의 몸에 칼리를 빙의시켰는지 그의 몸 주위로 검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그는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나도 그를 따라 허공을 디뎠다.
그는 쿠마리 사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 네가 할 역할이 많지 않다. 내가 그 꼬맹이와 이야기하는 동안 저 건물 안에 있는 녀석들의 동태를 살피면 된다.”
“알겠어. 저기에 사람 얼마나 있어?”
“많지 않다. 쿠마리의 이동과 생활을 도와주는 녀석이 두 명, 그리고 건물 경비가 둘이다.”
“건물은 꽤 큰데 사람은 얼마 없구나.”
“꼬맹이의 방으로 들어가려면 입구로 정직하게 들어가거나, 아니면 저 창문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비스는 아까 코피샤가 얼굴을 비쳤던 창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저 창문으로 들어가 꼬맹이를 만나겠다. 아까 보니 잠금장치가 따로 없더군.”
“알겠어. 몇 시에 할 거야?”
“…이건 빠르게 가지.”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등 뒤에 붙은 수십 개의 팔 때문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오늘 새벽 3시, 이곳에서 만난다.”
“갑작스럽네.”
“쿠마리들은 꽤 이른 시간부터 하루를 시작하기 때문에 새벽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사사삭.
비스가 다시 쿠마리 사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바람이 불어 나뭇잎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망토 모자가 벗겨져 사원을 바라보는 비스의 눈을 볼 수 있었다.
박타푸르에서 쿠마리 후보들을 바라보는 눈빛과 지금의 눈빛이 겹쳐 보였다. 그는 지금의 쿠마리들에게 어떤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저 아이가 영리한 판단을 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군.”
미지근한 저녁 공기를 타고 비스의 중얼거림이 내 귀에 꽂혔다.
* * *
-터벅.
비스와 헤어지고 나서 잠깐 눈이라도 붙일까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는지 결국 뜬 눈으로 약속 시간을 맞이했다.
프런트에만 불이 켜진 어두운 로비를 지나 호텔 밖으로 나올 때까지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아까보다 훨씬 적막해진 바깥 풍경을 보며 비스와 만났던 슈퍼마켓 앞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슈퍼마켓 주위를 살피자 안쪽 골목에서 그의 이름이 떴다.
-바스락.
그는 은신 상태를 유지한 채로 내 앞으로 걸어왔다. 형체는 흐릿했지만, 그가 은신 스킬을 썼다는 걸 알아서인지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보일 듯 말 듯 했다.
“그럼 바로 이동하지.”
-후웅.
비스가 칼리를 자신에게 빙의시킨 후 공중으로 가볍게 날아올랐다. 그 투명한 인영을 따라 한참 달리자 쿠마리 사원과 빠르게 가까워졌다.
비스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사원의 지붕 위로 착지했다. 다행히 평평한 부분이 넓어 비스와 내가 충분히 서 있을 수 있었다.
‘일단 밖에 있는 경비원은 두 명이네.’
고개를 아래쪽으로 슬쩍 빼자, 비스가 말한 대로 제복을 입고 있는 남녀가 사원의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저 녀석들이 눈치챈 것 같으면 적당히 시선을 끌어라.”
“알겠어. 너도 잘해.”
비스는 쿠마리의 창문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내려가더니 창문을 손으로 슬쩍 밀곤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나는 경비원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들의 얼굴은 따분함으로 가득했고, 주위를 둘러보려는 의지도 없어 보였다.
‘비스가 잘 하고 있을지 궁금한데.’
경비원들이 하품을 할 때 쯤 나는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려 창문 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숨까지 참은 채로 소리에 집중하자 대화 소리가 작게나마 들리기 시작했다.
“진짜 탈레주 신이신가요?”
“의심하고 있는 것이냐?”
“모습을 드러내신 적은 처음이라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앳된 목소리와 평소 목소리보다 훨씬 낮은 비스의 음성이 번갈아 들렸다.
“이제 이 땅에 내 분신은 필요 없다. 그러니 너도 이제 이 자리에서 내려오거라.”
“그럴 수 없습니다.”
“신인 내가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는데도 이를 거스르는 것이냐?”
비스의 말에 꽤 오랫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무거운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야 비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집에 있는 네 아픈 형제 때문에 그러느냐?”
“어, 어떻게 그걸…….”
감정 없던 아이의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녀석이 걱정된다면 지금 바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저희 오빠를 만나셨나요? 많이 아픈가요?”
“사경을 헤매더구나.”
“허억……!”
‘가차 없네…….’
비스의 거짓말에 코피샤가 크게 동요했다. 저 말이 거짓말이라서 다행이긴 하지만, 아이가 충격을 받은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의 분신이 될 것이 아니라 네 능력으로 가족을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제가 무슨 능력이…….”
“나한테까지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코피샤가 또다시 입을 다물었는지 건물 안이 조용해졌고 비스는 한숨을 쉬며 말을 덧붙였다.
“네게 사람을 치유할 능력이 있는데 왜 쿠마리가 된 것이냐.”
“…제가 이렇게 된 건 쿠마리가 된 이후입니다.”
아이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스킬이라는 건 더러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러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요. 제가 스킬을 갖고 있다는 걸 알면 전 여기서 나와야 해요.”
코피샤는 울음을 삼키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뱉었다.
“그럼 가족들도 절, 버리겠죠… 쿠마리였던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정기가 빠져나간다고 하니까요.”
“…너희 가족은 그런 미신을 믿을만한 사람들이냐?”
“그건…….”
아이의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비스는 한숨을 쉬곤 혀를 찼다.
“넌 영리한 아이다. 가족을 사랑하고, 책임감도 있지.”
“탈레주 님…….”
“그렇기 때문에 너는 더더욱 나의 분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스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로 이야기하는 듯 음절 하나하나가 뚝뚝 끊어지는 것처럼 들렸다.
“너와 네 가족을 보호할 수 있는 건 결국 네가 가진 힘이니 말이다.”
왠지 모르게 그 말이, 코피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네가 현명한 판단을 내렸으면 좋겠구나.”
“탈레주 님…….”
-콰아앙!!
그때였다. 코피샤가 비스를 부르자 마자 갑자기 건물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로 강한 진동이 땅을 울렸다.
‘뭐지?!’
단번에 몸을 일으켜 사원 입구부터 확인했다. 때아닌 굉음에 사원을 지키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사방을 살피자 상점가 쪽에서 무언가 검은 물체가 꾸물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헉……!
상점가의 정중앙,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나와 비스가 이야기를 나누던 곳에 갑자기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쿵.
균열은 점점 몸집을 불려 나가기 시작하더니 돌로 된 거대한 문을 뱉고는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설마……!’
오른쪽 눈을 감고 그것을 바라보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S급 게이트]
[보스 몬스터 : 가네샤]
“이런 망할……!”
S급 게이트 오픈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에에엥!!
센서가 제대로 작동했는지 커다란 사이렌이 도시 전체를 울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창문 밖으로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칫!”
비스가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며 단숨에 상점가 앞으로 날아갔다.
“탈레주 님?!”
코피샤가 창문을 향해 소리쳤지만 비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균열을 향했다. 나는 그런 아이를 흘긋 본 후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