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나와 비스가 벌인 소동은 네팔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텔레비전은 쿠마리 물건 도난 사건과 시험에 참가한 모든 후보가 자진 탈락했다는 이야기로 하루 종일 시끄러웠다. 아침을 먹으러 나왔던 레스토랑에서도 사람들은 그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
[긴급 속보입니다. 도난됐던 선대 박타푸르 쿠마리의 물건들이 해당 물건을 보관하고 있던 건물의 물탱크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분실된 물건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에 경찰은 도난 당시의 건물 CCTV를 확인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제야 발견했군.’
그리고 지금, 토카 지역으로 이동하는 리무진 안 라디오에서도 관련된 내용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살다 보니 참 별일이 다 있네요, 그쵸?”
“아하하, 그러게요.”
“누가 쿠마리 물건을 훔쳐서 숨기지를 않나, 후보들이 갑자기 시험을 포기하질 않나…….”
바트 씨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렸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그 쿠마리 후보들 말입니다.”
“네.”
“왜 시험을 포기한 건지 물어보니까 전부 탈레주 신이 시켜서라고 대답했다고 하더라고요.”
“어머, 그럼 다들 진짜로 신의 목소리를 들은 거예요?”
“네! 거기 있는 14명의 아이가 전부 들었대요. 신기하지 않나요?”
“신기하죠, 그럼. 이런 현장을 현지에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니,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요.”
하미준 헌터가 능청스럽게 대꾸하곤 눈만 굴려 나를 슬쩍 보았다.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웃고 있는 그를 향해 나도 한 번 씩 웃어 보인 후 인벤토리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새로운 메시지 5건]
문자를 켜니 레일리에게 온 문자가 쌓여 있었다. 번역 버튼을 누르자 한국어로 빠르게 바뀌었다.
[지의, 제법이네.]
[(사진)]
[언론이 이번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시민 단체들도 쿠마리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더군. 아, UN도 그렇고.]
[어떤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한테 사기 친 게 꽤 큰 몫을 한 모양이다.]
[쿠마리 시험 재개하려던 다른 지역들도 지금은 눈치 보고 있을 거다.]
‘사기라니…….’
레일리의 단어 선택에 약간 서운했지만, 일단 그가 보낸 사진부터 확인했다. 한국어로 번역된 인터넷 기사 헤드라인이었다.
[“나를 담을 그릇은 필요 없다.”, 탈레주 신의 분노? → 쿠마리 시스템, 다시 막을 내리는가]
[박타푸르 로컬 쿠마리 시험 중단, 왕실 묵묵부답]
[(단독) 박타푸르 쿠마리 시험 참가자 인터뷰, “모두가 탈레주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칼리 덕분에 이번 사건은 종교적인 측면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이 기이한 사건을 두고 일부 종교 단체는 반(反) 종교파들의 속임수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쿠마리가 계속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시스템의 기괴함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도 늘었다.
“전 믿는 종교는 없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진짜로 신이 있나 싶다니까요.”
“그쵸. 어린아이들이 단체로 거짓말을 할 리는 없잖아요.”
“바트 씨,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 좋아하시는구나?”
“네? 아, 들켰네요. 하하하…….”
바트 씨는 머쓱하게 웃으며 하미준 헌터의 말에 대답한 후 핸들을 천천히 꺾었다. 슬슬 토카 지역에 다다랐는지, 허허벌판의 도로 대신 건물과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토카, 가장 먼저 쿠마리 시스템을 부활시켜 실제로 쿠마리까지 뽑은 도시다. 비스의 말에 따르면 토카의 쿠마리, 코피샤 바즈라차르야는 올해 7살로 쟁쟁한 후보들 사이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토카의 이번 쿠마리 시험은 이례적으로 마지막 시험까지 온 후보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그 시험의 난도를 더욱 높였다고 했다.
‘동물들 머리가 있는 방에서 소리를 안 내고 하룻밤을 보내는 거였나?‘
정확히 어떤 시험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이들을 피와 동물의 사체가 있는 방에 가둬 놓고 겁을 준다는 시험이라는 건 대충 알고 있었다.
-끼익.
생각에 잠긴 채로 창밖을 바라보기를 잠시, 어느새 호텔 앞에 도착한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그러자 곧바로 밖에 있던 호텔 직원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에게 눈인사하며 내리자 먼지를 잔뜩 실은 바람 냄새가 코를 찔렀다.
“확실히 박타푸르보다는 황량하군.”
하미준 헌터의 평을 들으며 호텔의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건물이 밀집된 중심가이긴 했지만, 건물 중 절반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 지역은 트래킹하러 자주 오는 곳이에요. 카트만두나 랄릿푸르처럼 도시적인 느낌은 거의 없죠.”
바트 씨도 차에서 내려 우리를 이끌고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호텔 내부 역시 박타푸르에서 지냈던 곳보다는 수수한 느낌이었다.
“쿠마리 사원은 이 근처에 있나요?”
“어디 보자, 저희가 이쯤이니까…….”
바트 씨가 핸드폰에서 지도를 켜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움직이던 그의 손가락이 이내 사원들이 모여 있는 지역을 가리켰다.
“여기 있는 걸로 알아요. 걸어서 20분 정도 되겠군요.”
“그렇군요…….”
“아, 그럼 짐만 맡기고 잠깐 구경하고 오실래요? 지금 시간이면 쿠마리를 볼 수도 있거든요.”
눈을 크게 뜬 채로 바트 씨를 보자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다시 호텔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피곤하시지만 않으면 바로 가시죠!”
* * *
-드르륵, 드르륵.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라 걸을 때마다 거친 소리와 함께 먼지가 흩날렸다. 그래도 이 근처가 토카 지역의 관광지여서 그런지 여행객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이쪽입니다!”
바트 씨가 현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붉은색의 건물 앞에 서서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하미준 헌터와 그의 앞으로 갔다.
“운이 좋았네요. 마침 쿠마리가 나오는 시간이라고 하더라고요.”
“오, 고마워요. 덕분에 귀한 경험하고 가네.”
“자,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그와 함께 건물 벽을 따라 이동하자 어떤 사원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일제히 사원의 벽에 있는 작은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서 쿠마리를 볼 수 있는 건가요?”
“네. 저 창문으로 얼굴을 살짝 비칠 거예요.”
바트 씨가 가리키는 대로 창문을 정면으로 보고 섰다.
-끼익.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4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다.
“이곳에 있는 모든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쿠마리를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촬영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만약 이를 어길 시 관련 법으로 엄하게 처벌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절대로 쿠마리의 사진을 찍지 마십시오.”
“이야, 단호하구만.”
하미준 헌터가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리는 동안 여자는 다시 창문 뒤로 사라졌다.
“오……!”
“와!”
그리고 곧바로 그의 팔에 안긴 어린 신, 쿠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렇게 어린 애가…….’
아이는 이마까지 쭉 뻗은 붉은 눈화장을 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몸과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금색 장신구를 한가득 걸친 상태였다. 쿠마리의 등장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눈을 빛냈다. 그중 몇몇은 기도를 외는 건지 쉴 새 없이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툭.
“아, 죄송합니…….”
앞에서 보려니 고개가 아파 뒤로 한 걸음 물러났을 때 내 뒤에 있던 누군가와 부딪혔다. 곧바로 뒤를 돌아 사과를 하려는 그 순간.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비스!’
하마터면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낼 뻔했지만 겨우 입을 다물어 참았다. 그는 검지손가락을 제 입술 앞에 가져다 댄 후 앞을 보라는 듯 쿠마리 쪽을 가리켰다. 나는 다시 태연하게 앞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가 하는 말, 그냥 듣기만 해.”
비스는 내 등 뒤에 딱 붙어 선 채로 이야기했다. 뜨거운 숨이 목에 닿는 바람에 더운 날씨인데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름, 코피샤 바즈라차르야. 나이는 일곱 살에 부모는 이 근처에서 여관을 운영하고 있더군.”
“…….”
“그래서 그 여관을 조금 조사해 봤다.”
-바스락.
내 옆구리로 사진을 든 손이 불쑥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었지만 다행히 아무도 보지 못한 듯했다. 그가 건네준 사진을 확인하니, 활짝 웃고 있는 코피샤의 얼굴이 있었다.
“집은 화목했던 것 같다. 유복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끼니를 굶을 만큼 가난하진 않았지.”
나는 고개를 들어 쿠마리가 된 코피샤를 바라보았다. 사진 속에 있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쿠마리인 코피샤는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 후였다.
“집에서도 딱히 쿠마리가 될 것을 강요한 건 아닌 듯하다. 그저 저 아이 개인의 문제일 가능성이 있어.”
‘개인적인 이유라…….’
비스에게 다시 사진을 건넨 후 코피샤를 바라보았다. 코피샤는 자신을 보러 온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눈에 담고 있었다.
“하하하하!!”
그때 쿠마리가 어떤 아이를 보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한 부부가 탄식하며 아이를 끌어안곤 그대로 어딘가로 달려갔다.
“왜 저러는 거야?”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비스를 향해 조용히 속삭이자 그가 대답했다.
“쿠마리가 크게 웃거나 울면 심각한 질병이 있을 거라는 뜻이다. 일종의 예언 같은 것이지.”
“…….”
“뭐, 솔직히 말하면 감과 눈치로 알아채는 것이다. 절박한 녀석들이 오기 마련이니 병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비스의 말을 들으며 나는 조심스럽게 오른쪽 눈을 감아 보았다.
-치지직.
[각성자 코피샤 바즈라차르야]
[대지 속성]
[고유 스킬 C등급]
[C급 치유계 스킬 ‘시탈라의 피’ : 눈을 마주친 상대의 병을 알 수 있다. 시전자의 피를 먹은 자는 병이 일부 치유되며, 외상 부위에 떨어트리면 상처가 치료된다.]
[귀속 무기 없음]
[업 해당 사항 없음]
[사명 해당 사항 없음]
[*구원 해당 사항 없음*]
“…어?”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감았다 뜬 후 구원자의 눈동자로 코피샤를 다시 바라보았다.
‘C급 치유계 각성자잖아!’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구원자의 눈동자는 너무나도 확실하게 코피샤가 각성자라는 걸 보여 주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 비스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것을 알아챈 그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 밤 8시, 호텔 앞.”
“알겠다.”
-사아아.
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서 한 발 두 발 멀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모습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