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01화 (201/366)
  • 201화

    “언제쯤 돌아올 것 같아?”

    “6시가 시험 시작이니까 늦어도 10시 이전에는 상황이 종료될 것 같아요.”

    하미준 헌터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내게 물었다.

    -달그락.

    그가 미니바에 있던 작은 위스키 병을 열어 컵에 따랐다. 그동안 나는 창밖으로 더르바르 광장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12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기 때문에 가게들은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관광객은 물론 주민들도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 사도도 대단하네. 하루 만에 모든 계획을 다 세우고 말이야.”

    위스키를 가져온 하미준 헌터가 창가에 살짝 걸터앉아 나를 따라 밖을 흘긋 보았다.

    “후우…….”

    “왜 그러세요?”

    “아니, 그냥.”

    하미준 헌터가 갑자기 한숨을 쉬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동안 이런 일들을 신지의 헌터 혼자서 했을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영 편치 않아서 말이야.”

    “제 편으로 만드는 과정이 힘들어서 그랬지, 아예 혼자는 아니었어요.”

    “그래? 뭐, 지금이라도 신지의 헌터가 나한테 말해 줘서 다행이야.”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02:48]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마 지금쯤 비스는 쿠마리의 물건이 있는 빌딩 안으로 잠입해 물건을 챙기고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달려가 일이 잘 풀리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를 믿고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뿐이다.

    ‘무사히 잘 끝나기를.’

    * * *

    -바스락.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카디건을 걸치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동이 트기 전이라 밖은 여전히 어두웠고, 도로엔 짐을 잔뜩 실은 오토바이만 드문드문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어제 비스가 알려준 대로 더르바르 광장을 가로질러 낮은 지붕의 건물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두 번째 시험까지 온 후보들이 전보다 많은 느낌이네요.”

    건물과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골목 쪽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혹시라도 들킬까 싶어 옆에 있던 커다란 박스 뒤에 몸을 숨긴 후, 골목 안쪽으로 고개만 살짝 내밀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여자 두 명이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집에서 작정하고 내보낸 애들도 보이던데요.”

    “아, 에티샤 샤캬요?”

    “네, 그 애. 아주 총명해요. 집에서 따로 학습을 시킨 것 같더라고요.”

    “그 아이가 지금처럼만 잘해 주면 박타푸르의 쿠마리는 그 아이가 되겠군요.”

    그중 한 사람이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끄곤 말을 덧붙였다.

    “안타깝네요. 더 좋은 인재로 클 수도 있는데 이런 데서 꼭두각시 신 역할이나 하게 되고.”

    “제 말이요. 은퇴 후에 연금이 나온다고 해도 그걸로 평생 먹고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쿠마리였던 자와 함께 지내면 부정 탄다는 미신 때문에 자식을 버리는 부모도 많잖아요.”

    -쿵.

    ‘자식을 버린다고?’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많은 쿠마리들이 희생되었다는 비스의 외침이 다시금 머릿속에 울리는 듯했다.

    -삐비빅.

    방금 담배를 끈 사람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는 화면을 몇 번 두드리더니 금방 귀 옆으로 가져왔다.

    “네, 후보들은 이미 10분 전에 전부 대기 시켜놨어요. …뭐, 뭐라고요?!”

    그가 눈을 크게 뜨며 소리를 빽 질렀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게 전부 사라질 수가 있어요?! 시험은 어떻게 해요 그럼?”

    “네? 무슨 일이에요?”

    “헙.”

    반가운 소식에 나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켰다. 다행히 그들은 통화에 열중하느라 내 목소리를 듣진 못했다.

    “하, 일단 끊어요! 젠장할…….”

    “왜 그래요? 무슨 일 생겼어요?”

    “선대 쿠마리 물건이 전부 사라졌대요. 보석 하나 남기지 않고 전부요!”

    “네?!"

    ‘성공했구나!’

    비스가 선대 쿠마리의 물건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범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으니 도주까지 완벽하게 해냈나 보다. 이제 남은 건 나와 칼리가 시험장 안에 들어가서 후보들에게 경고하는 것뿐이다.

    “이 멍청한 놈들 어떻게 그걸 잃어버릴 수가 있어?”

    “이, 일단 저희도 찾아보죠! 시험 시작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요!”

    그들이 골목 반대편으로 뛰어가는 틈을 타 나는 시험장 입구로 달려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로 된 넓은 홀 안에 아이들 열댓 명 정도가 줄 맞춰 서 있었다. 그들은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그저 멀뚱멀뚱 앞만 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후웅.

    일단 낮말을 듣는 새로 허공을 디뎌 2층 난간을 넘었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앞쪽으로 걸어가자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언제 시작할까?”

    “배고파…….”

    “졸려.”

    전부 지유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이른 시간이라 선 채로 꾸벅꾸벅 졸거나, 옆에 있는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신이라는 역할을 주기엔, 다들 너무 어리고 평범한 존재들이었다.

    -사아아.

    그때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타고 올라왔다. 몸을 뒤로 홱 돌리자 수십 개의 얼굴과 팔이 보였다.

    “칼리……!”

    “잘 들어왔구나.”

    칼리를 향해 속삭이자 그도 목소리를 죽인 채로 내게 말을 걸었다. 비스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인지 칼리는 평소보다 희미한 상태였다.

    “비스는 잘 도망쳤어?”

    “그래. 중간에 한 번 들키긴 했지만 기절시켜서 해결했다.”

    칼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한 후, 1층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호오, 후보들이 생각보다 꽤 많구나.”

    “아까 시험 관리자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똑같이 얘기하더라. 집에서 교육받고 온 애들도 있다고 하고.”

    “그런 애들은 매번 나온다. 주로 종교가 생활의 일부분인 보수파 집안에서 자주 나오지.”

    “…혹시 비스도 은퇴 후에 가족들에게 버려졌어?”

    칼리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갔다. 입가엔 미소가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평온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무표정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쿠마리였던 사람과 함께 지내면 부정 탄다는 미신이 있다는 걸 들어서.”

    “하하, 지독한 미신이지.”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후보들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건 비스에게 직접 물어봐라. 그 녀석이 이야기해 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

    “…….”

    “그럼 더 늦어지기 전에 연극을 시작해 볼까.”

    칼리는 그렇게 말하곤 모습을 감췄다. 그가 서 있던 곳은 오직 검은 연기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연기는 건물 천장 쪽으로 날아가는가 싶더니 이내 사방으로 흩어져 완전히 사라졌다.

    “나의 분신으로서 살아갈 어린 신자들이여!”

    그리고, 크다 못해 웅장하기까지 한 칼리의 목소리가 시험장 내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뭐야?”

    “어?”

    “지금 누가 소리 질렀어?”

    아이들은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당연히 그들의 눈에 칼리가 보일 리 없었다.

    “나는 탈레주. 너희 같은 아이들을 그릇으로 삼아 왔던 신이다.”

    “타, 탈레주 신?”

    “으아앙!”

    가장 어려 보이는 아이는 겁을 먹었는지 바로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나로서 존재하겠다. 더 이상 이 땅에 나를 담을 그릇은 필요 없다.”

    “네?”

    “어?”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소리가 들리는 천장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그러면 저희는 뭘 하면 돼요?”

    정중앙에 있던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잠깐의 침묵 후 칼리가 다시 목소리를 냈다.

    “인간으로 살아라.”

    “…….”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으로서 평생을 살아라. 평생 외롭게 살고 싶지 않다면 당장 이곳에서 떠나라.”

    시험장은 순식간에 적막으로 빠져들었다. 칼리가 한 말을 이해하기 위해 한참을 생각하는 듯했다.

    “그것이 내가 너희들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터벅.

    칼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 아이가 시험장의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냐! 어디 가?”

    “집에 갈래.”

    “뭐어?”

    자냐라고 불린 아이는 따분하다는 듯 대답하곤 계속해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탈레주 신이 말했잖아. 인간으로 살라고.”

    “그래도 엄마랑 아빠가 혼낼 텐데…….”

    “탈레주 신이 시켰다고 하면 되지 뭐.”

    자냐는 그 자리에 우뚝 서더니 뒤를 돌아 후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탈레주 신이 쿠마리가 되면 평생 외롭게 산다고 하잖아. 나는 그런 거 싫어.”

    -끼익.

    그러고는 가장 먼저 문을 열고 시험장 밖으로 나왔다.

    “나, 나도 갈래!”

    “엄마 보고 싶어…….”

    “같이 가!”

    그게 신호탄이라도 된 듯 아이들이 하나둘씩 시험장을 도망치듯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우르르 이동하는 아이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무렵 뒤쪽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비스!”

    “잘 풀렸군.”

    그는 퀭한 눈으로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건은 처리했어?”

    “그 건물 물탱크에 넣어 두었다. 아까 잠깐 보니 엉뚱한 곳만 뒤지고 있는 것 같더군.”

    비스가 시험 관리인들을 조롱하듯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담은 붉은 눈동자는 이유 모를 고독이 담긴 듯했다. 평생을 외롭게 산 듯한, 그런 고독이.

    “…저건 뭐지.”

    그때 비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난간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차분하게 바라보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저 녀석, 보통 고집이 아니군.”

    비스는 칼리가 보이는 건지 천장을 바라보며 아이를 향해 턱짓을 했다.

    “당장 이곳을 떠나라. 어린 신자여.”

    하지만 칼리의 목소리를 듣고도 아이는 꿈쩍하지 않았다. 아예 눈까지 감은 채로 칼리를 완전히 무시했다.

    -사락.

    그러자 비스가 난간을 뛰어넘어 아이의 바로 앞에 착지했다. 인기척을 느낀 아이가 그제야 눈을 뜨고 비스를 바라보았다.

    “이름.”

    “에티샤 샤캬입니다.”

    “왜 나가지 않지?”

    “이것 또한 시험의 일부이지 않습니까.”

    ‘저 아이가 아까 이야기했던 그 아이구나.’

    에티샤 샤캬, 시험 관리인들이 이야기한 유력한 쿠마리 후보. 총명한 아이라고 칭찬한 것이 거짓은 아닌지 아이는 굉장히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다른 후보들이 전부 나갔으니 두 번째 시험은 저만 통과한 것이지요?”

    비스를 올려다보는 검은 눈동자엔 자신감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눈이 빛날수록 비스의 미간은 깊어져만 갔다.

    “쿠마리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나?”

    “탈레주 신의 그릇이 되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땅을 축복하고 사람들을 지켜 줍니다.”

    정제된 문장이 앳된 목소리를 통해 전해지자 비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에티샤 샤캬로서의 삶이 없어지는 걸 의미한다.”

    “…….”

    “사람을 지켜 주는 건 쿠마리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지식과 기술, 그리고 돈이다.”

    비스는 아이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네 말대로 쿠마리가 이 땅을 축복하고 사람들을 지켜 준다고 치자. 그럼 그런 쿠마리는 누가 보호해 주는 건지 대답할 수 있나?”

    “…….”

    “꽤 똑똑한 것 같으니 내 말을 잘 알아들었을 거라 믿는다.”

    비스는 다시 몸을 일으켜 그대로 제 모습을 숨기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옆으로 나타났다.

    난 아무 말 없이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작은 두 주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흡.”

    무표정이었던 에티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울상이 되어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어쩌면 저 아이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쿠마리로서의 삶이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터벅, 터벅.

    무거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걷던 에티샤가 양손으로 문손잡이를 잡았다. 아이는 조금 망설이더니 곧 힘을 주어 문을 밀었다.

    이로써 박타푸르의 쿠마리 후보들은 전부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떠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