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00화 (200/366)

200화

“바트 님이 맡기고 간 물건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프론트 직원이 내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종이 상자를 내밀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것을 받아 든 후, 로비 구석 소파에 앉아 상자를 열었다.

-사락.

상자에 든 검은색 카디건 위로 컴퓨터로 출력한 것 같은 한국어 메모가 있었다.

[A급 방어구 ‘락슈미의 숄’입니다.]

[착용하시면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게 됩니다.]

[그럼 편안한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바트]

‘진짜로 챙겨줬네.’

갑작스러운 부탁이라서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트 씨는 반나절 만에 은신 기능이 붙은 아이템을 빌려주었다. 아무리 빌려주는 거라고 해도 그렇지 A급 아이템을 냉큼 가져다줄 줄이야.

아이템 정보를 보기 위해 카디건 위로 손을 얹자 눈앞에 상태창이 자연스럽게 떴다.

[아이템 획득]

[락슈미의 숄 / 방어구 / A급]

[기간제 귀속 상태]

[착용자는 높은 수준의 은신 상태를 유지한다. 단, 모습을 완전히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길드전에 참여했을 때, 노블레스 길드원이 내게 걸었던 은신계 스킬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지 않는 기능이 붙은 모양이다. 카디건을 꺼내서 입자 차가운 기운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빈 상자를 인벤토리에 넣어둔 후 시간을 확인했다.

[8:56]

비스와 만나기로 한 시간은 9시. 내 눈에 띄지는 않지만 비스는 호텔 앞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끼익.

번화가 중심에 위치한 호텔이라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람들의 말소리와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광장 쪽으로 걸어 나올 때까지 수많은 직원들을 마주쳤지만, 나를 본체만체하는 것을 보니 아이템의 은신 기능은 잘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호텔 정문 앞에 서서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비스 바즈라차르야]

얼마 지나지 않아 더르바르 광장 앞 환전소 앞에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탁.

인파를 헤치고 환전소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누군가 내 손목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용케도 찾아냈군.”

평소와 다름없이 붉은 망토를 뒤집어쓴 비스였다. 하루하고 반나절 만에 본 그는 왠지 모르게 어딘가 지쳐 보였다. 그는 탁한 붉은색 눈으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진짜로 아이템을 받아 냈네.”

“응. A급으로 빌려주셨어.”

“관리국 놈들, 네게 잘 보이려고 발악을 하는군.”

그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젓곤 이내 나를 끌고 환전소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미로 같은 골목 사이사이를 한참 헤집고 들어가니, 어떤 건물의 옥상과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전부 올라갈 때까지 말 한마디 없던 그는 옥상에 도착하자마자 내 손목을 놓았다. 나는 옥상 한가운데에 선 채 비스의 뒷모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네 계획 좀 얘기해 줘. 뭘 확인하고 싶어서 일찍 온 건지도 궁금하고.”

“일단 저걸 좀 봐라.”

비스가 옥상 난간을 한 손으로 받친 채 다른 한 손으로는 광장 쪽을 가리켰다. 그의 옆으로 다가가 밑을 내려다보니 멋스럽게 낡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내일 아침 6시, 낮은 지붕의 저 건물에서 쿠마리 선발을 위한 두 번째 시험이 열린다.”

“어떤 시험이야?”

“선대 쿠마리의 물건을 고르는 시험이다.”

“…운이 엄청나게 따라 줘야겠네.”

“운보다는 쿠마리 후보들의 대범함을 보는 것이다.”

내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도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맞췄다.

“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자만이 선대의 물건을 고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사실 문제를 내는 녀석들도 정확히 어떤 것이 정답인지 모를 때도 있어.”

“그렇구나. 그럼 네 계획은 뭐야?”

비스가 눈을 감은 채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눈을 뜸과 동시에 말을 뱉었다.

“선대의 물건을 훔쳐서 시험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훔친다고? 위치는 파악했어?”

“그것 때문에 일찍 온 거다. 이미 물건 위치와 도주 경로까지 확보해 두었다.”

‘철저하네.’

나보다 하루 정도 빨리 온 것일 뿐인데, 비스는 계획은 물론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까지 미리 해 두었다. 왕을 죽여서 모든 걸 해결하려 했던 사람치고는 굉장히 평화적인 방법이었다.

“참고로 우리가 있는 이 건물이 물건이 있는 곳이다.”

“뭐, 뭐?!”

나도 모르게 발밑을 확인하고 실내와 이어지는 문을 흘긋 보았다. 문 너머는 조용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비스는 평온한 얼굴로 내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난 다시 난간 쪽으로 몸을 쭉 빼서 이곳에서부터 시험장의 거리를 눈대중으로 계산했다. 긴 횡단보도 3개 정도의 거리다. 이 건물 안에서 물건을 확실하게 빼돌리지 않으면 시험장까지 금세 운반되겠지.

“물건 양은 어느 정도야? 인벤토리에 들어가?”

“금속류 20개 내외. 무게는 약 7kg 정도인데 인벤토리에 들어가지 않는 일반 물품이다.”

“몰래 들고나오기 영 힘든 물건이네.”

“부정할 수 없군.”

비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물건이 있는 곳은 이 건물의 옥상과 연결되어 있다. 도주엔 문제없어.”

“알겠어. 그럼 물건 처리는?”

“땅에 묻든 강에 버리든 알아서 한다.”

난간에서 한발 물러나자 비스가 말을 덧붙였다.

“성공만 한다면 시험은 확실하게 중단되겠네.”

“그렇지.”

“그럼 난 뭘 하면 돼?”

비스가 손가락으로 시험장을 가리켰다.

“시험을 기다리는 후보들을 시험장 밖으로 내쫓아라. 겁을 주든 건물을 살짝 무너트리든 뭐든.”

“…진심이야?”

“진심이다. 후보를 관리하는 녀석들은 물건 찾느라 정신없을 테니 쉽게 할 수 있겠지.”

쿠마리 후보들은 대부분 10세 미만의 아이들, 시험장 안에 있는 물건을 몇 개 부수거나 주변을 소란스럽게 만들면 겁을 먹고 나오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완전히 이 시험이 사라질까?’

비스의 계획대로 진행하면 일단 눈앞의 시험은 망칠 수 있다. 하지만 쿠마리의 물건은 충분히 다른 지역 쿠마리의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시험에 사용되는 물건은 선대 물건의 일부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우리가 토카 지역에서 쿠마리를 구하던 중에 시험이 부활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지금 계획은 뭔가 부족해.”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약한 불쾌]

비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치 더 말해 보라는 듯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방법으로는 시험을 일시적으로 멈추는 것밖에 안 돼. 사람들이 쿠마리 자체에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연출이 필요해.”

“하, 아주 그냥 연극을 만드는구나.”

“연극……?”

그의 말에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혹시 칼리의 소환 범위가 어떻게 돼?”

“범위?”

비스가 미간을 구긴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범위 같은 건 없다. 칼리 님은 소환되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시니까.”

“그렇게 말하니 꼭 내가 사춘기 어린아이라도 된 것 같군.”

갑자기 나타난 칼리의 모습에 비스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제 머리 위의 칼리를 쏘아보았다. 그러곤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그래, 지금 이렇게 말이야.”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것이냐, 빛의 아이야.”

칼리가 내게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시험장에 모인 애들은 신이 되기 위해 모인 거잖아.”

“그렇지.”

“그러면 단순히 겁을 줘서 내쫓을 게 아니라 신의 목소리를 빌려서 스스로 쿠마리가 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게 더 낫지 않겠어?”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깨달음]

비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칼리도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내가 할 말을 기다렸다.

“시험장 안의 관리인들이 전부 나가면 칼리 네가 후보들한테 이야기해 줘. 더 이상 쿠마리는 필요 없으니 이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하라고.”

“하하하! 나보고 탈레주의 연기를 하라는 거냐?”

“응.”

“…뻔뻔하게 말을 잘하는 편이구나.”

칼리가 얼굴을 굳히며 나를 응시했다. 일제히 나를 향한 수십 개의 눈동자를 피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눈에 힘을 주고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나와 그 사이의 기묘한 기류가 오가는 듯했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 칼리 님.”

“오호라.”

비스가 칼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칼리는 아까보다 한껏 누그러진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내가 왜 탈레주의 연기를 해야 하는지 말해 보아라, 비스.”

“10년 전, 제가 쿠마리를 없애기 위해 왕실 사람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꿈을 조종한 일을 말하는 건가?’

비스와 칼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비스는 차분한 반면, 칼리는 눈을 살짝 크게 뜬 채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들은 신에 반응합니다. 그러면 저희도 신을 활용하는 수밖에요.”

“아하하, 지금 신 앞에서 신을 활용한다고 하는 것이냐?”

“칼리 님.”

비스가 칼리의 손을 잡아 그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성스러운 의식처럼 보이는 그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칼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텁.

칼리는 그의 등 뒤에 달린 또 다른 손으로 비스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이내 손가락 끝으로 제 소환자의 이마를 가볍게 짚었다.

“…내가 어떻게 널 거절할 수 있겠느냐.”

“감사합니다.”

“대신 너도 시험장 주위로 빠르게 복귀하거라. 거리가 멀어지면 내 힘도 약해지니 말이다.”

죽음과 파괴의 신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부드럽고 자애로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두 사람의 유대 관계를 보니 왠지 모를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럼 다시 계획을 정리하지.”

비스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첫 번째, 내가 이곳에 잠입해 물건을 빼돌린다.”

“응.”

“두 번째, 네가 칼리 님과 함께 시험장에 들어가고 내부 상황을 살핀다.”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 칼리 님께서 쿠마리 후보들에게 이 땅에 쿠마리는 필요 없다고 이야기한다.”

“알겠다.”

“알겠어.”

칼리와 동시에 대답하자 비스는 비장한 얼굴을 한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한숨을 쉬며 얼굴을 구겼다.

“하… 내가 미친 게 틀림없지.”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소리를 하냐…….”

여전히 자신이 나와 손을 잡은 게 믿기지 않는 듯 비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비스는 일단 차치하자. 내일 새벽, 우리가 완수해야 하는 작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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