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선량한 이교도>
‘칼리까지 나올 줄이야.’
그를 다른 차원의 존재처럼 느껴지게 하는 수십 개의 머리는 일제히 비스를 향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제법 다정해 보였다.
-사아아.
칼리가 다시 모습을 감추자 우리들의 손 위에 얹혔던 검푸른 손이 사라졌다. 고개를 올려 비스를 바라보니 그는 머쓱한 듯 시선을 피한 채 아랫입술만 잘근거리고 있었다.
“나도 정신이 나갔지. 만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은 녀석이랑 손을 잡다니.”
“열심히 할…게?”
“하.”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해서 대충 생각나는 대로 뱉었더니 비스가 헛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그러더니 천장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른들이 만들어 낸 어린 신이라고 했지.”
“…….”
“틀린 말은 아니다. 그들의 욕심으로 만들어진 미성숙한 신이니 말이다.”
쿠마리로 살았던 그때를 떠올리기라도 한 건지 내게 잡힌 손이 약하게 떨렸다. 그의 손을 더욱 꽉 잡자 떨림이 조금씩 멎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더니 고개를 내려 나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너, 후회 안 할 자신 있나?”
“후회?”
-스윽.
비스가 손을 빼더니 검지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쿠마리 시스템이 사라진다고 해서 네게 이득이 될 건 하나도 없다.”
“…….”
“널 죽이려 했던 자와 같은 편에 선 것도 모자라, 그의 목표를 함께 이루어 주겠다니, 웬만한 자선 사업가도 이렇게는 못 한다.”
-툭.
손가락 끝이 내 쇄골 옆을 살짝 눌렀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거나, 네게 불리한 상황이 되면 분명히 후회할 거라고.”
“하하…….”
“웃나?”
비스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에게 있어 나는, 창조자의 힘을 빼앗은 SS급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테니까.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비스.”
“왜 그러지?”
“난 이미 너무 많은 후회를 하면서 살아 온 사람이야.”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를 향해 말을 덧붙였다.
“웬만한 일로는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네 목표를 이룰 생각만 해.”
[발언 결과 : 혼란]
그가 고개를 홱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내가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걸 알고 배신감 느끼면 어떡하지.’
마음 한구석에는 작은 걱정이 있긴 했지만 일단 지금은 넘기기로 했다. 최대한 빠르게 모든 쿠마리들을 해방시키고, 비스에게 심어 둔 마음의 씨앗을 개화시키는 것이 우선이니까.
“쿠마리 후보들과 이미 쿠마리가 된 아이들을 전부 그 자리에서 도망치게 만든다고 했지.”
“응. 구체적인 방법은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 해.”
“…최근에 쿠마리 시스템을 완전히 부활시켜 새로운 쿠마리를 뽑은 곳은 토카 지역이다.”
비스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말을 이었다.
“박타푸르 쪽은 선발 시험을 준비 중이고, 나머지 지역은 아마 로열 쿠마리 선발 시험 공고가 뜰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다.”
“그럼 토카랑 박타푸르를 먼저 해결하고 나서 다시 여기로 돌아와야겠네.”
“그래. 순서는 박타푸르, 그다음이 토카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부활한 쿠마리의 수를 늘리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거든.”
“그렇구나.”
“이미 뽑힌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박타푸르에서 열릴 시험을 무산시키는 게 먼저다.”
‘박타푸르랑 토카를 방문할 핑계가 필요한데…….’
어쨌든 지금은 라울 국장의 손님으로 왔기 때문에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라울 국장의 비서가 매일 같이 호텔에 와서 나와 하미준 헌터에게 온갖 과일과 디저트를 챙겨 주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라울 국장의 눈을 피해 그쪽 지역으로 이동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아.”
“왜 그러지?”
꽤 합리적인 핑계가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쳤다.
“난 관광 목적으로 박타푸르랑 토카 쪽으로 이동할게. 너도 그 시기에 맞춰서 거기로 와.”
“관광이라고? 관리국 놈들과 함께 올 셈인가?”
“응. 일단은 그게 의심을 덜 받을 것 같아서.”
난생처음 오는 나라를, 그것도 수도가 아닌 지역을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이 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차라리 대놓고 함께 이동하는 편이 의심도 안 받고 더 안전하겠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비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쿠마리에 관심이 많은 것처럼 연기할게. 그러면 박타푸르랑 토카를 가고 싶다는 이야기도 쉽게 꺼낼 수 있을 테니까.”
“쿠마리 시험이 예정된 도시와 이미 쿠마리가 있는 도시…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겠군.”
비스는 내 말에 설득됐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야기하면 내일이나 모레 중으로 이동할 것 같은데, 너도 그때 이동할 수 있겠어?”
“가능하다. 은신계 스킬을 쓰고 대충 그쪽 지역으로 가는 화물차에 타면 되니까.”
“…진짜로 가능한 거 맞아?”
“몇 번 해 봤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라.”
그의 신경질적인 대답과 함께 이동 수단에 대한 이야기는 금방 끝이 났다.
‘이제 박타푸르에서 어떻게 시험을 망치느냐인데…….’
비스는 손가락으로 침대 시트를 두드리며 한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쿠마리 시험이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게이트가 터지기를 기대할 수도 없고, 만약 진짜로 터진다고 한들 그게 주민들에게 도움이 될 건 단 하나도 없다.
“아, 그렇게 하면 되려나.”
“뭐 좀 좋은 생각 났어?”
비스의 손가락이 드디어 멈췄다. 내가 묻자 그는 허공에 두었던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적당한 소란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알려 줘.”
“아직은 안돼.”
-바스락.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 망토 모자를 다시 뒤집어썼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난 먼저 박타푸르로 이동하겠다. 이 계획이 실행하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것들이 좀 있어서.”
“알겠어. 나도 내일이나 모레 중으로 출발할게. 아, 만날 장소랑 시간을 정해야겠네.”
“장소는 네가 묵는 호텔 앞. 시간은 네가 도착한 다음 날 오전 9시 정도가 좋겠군.”
비스의 말을 듣자마자 인벤토리에서 핸드폰을 꺼내 메모로 빠르게 적은 후 다시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연락할 방법이 필요한데.’
그의 방을 슬쩍 눈으로 훑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핸드폰 충전기는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핸드폰 없지? 무슨 일 생겼을 때 연락할 방법이 없는 게 문제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칼리 님이 그 장소에 대신 갈 거다. 그리고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차피 내 귀에 다 들어오게 돼 있어.”
“어? 무슨 수로?”
비스는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어 섰다.
“네가 그 지역에 나타나면 온갖 녀석들이 네 얘기만 하고 네 주위로 모여들 텐데, 내가 너를 찾는 건 일도 아니지.”
“하아, 눈에 띄지 않게 더 조심해야겠네.”
“관리국 놈들한테 하급 은신 방어구라도 하나 달라고 해라. 아마 네 부탁이면 좋다고 줄 거다.”
-철컥.
비스가 방 문고리를 돌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럼 그때 다시 만나지.”
* * *
[머리 잘 썼네.]
박타푸르로 가는 차 안. 하미준 헌터가 내 팔을 쿡 찌르더니 핸드폰으로 메모장을 켜서 보여 주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그는 선글라스를 코끝에 걸친 채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디 불편한 부분은 없으신가요?”
“전혀요. 덕분에 편하게 가고 있습니다~”
“하하하…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하미준 헌터가 말꼬리를 늘리며 대답한 후, 핸드폰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어제 비스와 헤어지고 호텔 방으로 돌아와 하미준 헌터에게 그와 있던 일을 설명했다. 쿠마리를 해방시키 한다는 계획을 들은 그는 우리의 의도대로 흘러간 상황에 놀라워하면서도, 비스가 갑자기 돌변할 것을 경계했다.
‘그럴 가능성은 아마 낮겠지.’
아직 개화 전이긴 하지만 말의 씨앗도 심은 상태고, 비스도 자기 얘기를 나한테 제법 털어놓았으니 갑자기 내게서 등을 돌리진 않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만.
그 후 바울 국장에게 박타푸르와 코카 지역을 여행하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그는 기쁜 마음으로 차량과 숙소를 제공해 주었다.
이곳에서 내가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이틀. 이틀 안에 박타푸르에서 벌어질 쿠마리 시험을 무너트리고, 다시는 쿠마리가 생기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나저나 신지의 헌터께서 쿠마리에 관심이 있는지 몰랐네요.”
“다큐멘터리를 몇 개 봤거든요. 엄청 흥미롭더라고요.”
“아하하, 이 나라에 온 사람이라면 다들 그런 이야기를 하죠.”
관리국 직원인 바트 씨가 부드럽게 핸들을 꺾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근데 신지의 헌터처럼 그곳에서 이틀이나 보내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마침 쿠마리 시험이 진행 중인 도시라고 하니 천천히 둘러보고 싶어졌어요.”
“아~ 맞아, 그랬었지. 거의 10년간 폐지되었다가 다시 부활한 시험이니 도전하는 아이들이 꽤 많을 거예요.”
평온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모르게 입이 썼다. 악의 없는 저 말을 비스가 듣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끼익.
카트만두에 있던 호텔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새것처럼 보이는 건물 앞에 차가 멈췄다.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와, 저 언니 키 진짜 크다.”
“차에 붙어 있는 거 던전 관리국 마크지? 왜 온 거야?”
“뉴스 보니까 한국에서 웬 헌터들이 왔다는데 저 사람들인가 보네.”
술렁거리는 주민들의 반응을 보니 비스가 했던 말이 조금 실감이 났다.
“네가 그 지역에 나타나면 온갖 녀석들이 네 얘기만 하고 네 주위로 모여들 텐데, 내가 너를 찾는 건 일도 아니지.”
그의 말을 속으로 생각하며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인파들을 슬쩍 훑었다. 아쉽게도 비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 하미준 헌터 룸 키 카드고요, 이건 신지의 헌터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이곳에서 머무를 예정이니, 언제든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만 하세요!”
바트 씨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먼저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 사도는 내일 만난다고 했지?”
“네. 9시에 호텔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비스는 나보다 먼저 이곳에 와서 시험을 망치기 위해 몇 가지를 확인해 본다고 했다. 지금쯤 한창 이 도시를 조사하고 있겠지.
“내가 따로 도와줄 건 없어?”
“네. 아직까지는요. 아, 제가 비스랑 만나는 동안 혹시라도 관리국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말만 잘해 주세요.”
“그건 또 내가 전문이지.”
하미준 헌터는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고,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내일 9시. 본격적인 소동을 위한 첫 번째 단계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