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98화 (198/366)
  • 198화

    “왕을 안 죽이고 쿠마리들을 구하는 방법…….”

    호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그 말만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비스에겐 방법을 찾아오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럴싸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잠깐, 그럼 10년 전에 비스는 쿠마리 시스템을 어떻게 없앤 거지?’

    -끼익.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인벤토리에서 비스와 관련된 자료를 꺼냈다. 침대 위에 자료들을 넓게 펼쳐 눈으로 슥 훑자 가장 위쪽에 있던 문서에서 ‘쿠마리 제도 폐지’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개의 신문 기사가 스크랩된 문서였다. 비행기에서 대충 보고 넘긴 것이었는지 처음 보는 정보들도 있었다.

    [살아 있는 신 쿠마리, 역사의 뒤안길로]

    현지 시각 오후 3시. 네팔의 디피카 총리가 쿠마리 시스템 전면 폐지를 발표했다. 수년 동안 이어진 왕실과 정부 간의 문화적 갈등이 극적으로 타결된 것.

    쿠마리는 7세 이하의 여아 중 한 명을 선발해, 탈레주·두르가 신의 현신으로 삼아 숭배하는 네팔의 오랜 문화다.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쳐 쿠마리로 선정된 아이는 엄격한 통제하에 생활하기 때문에, 아동 학대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수잔 라나 현 네팔 국왕은 ‘이 세상이 변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의 뜻 역시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신의 뜻을 따른다.’며 쿠마리 폐지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쿠마리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왕실이 정부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 평가하며, 전직 쿠마리에 대한 지원 역시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었다.

    한편 일부 보수 인사들은 SNS를 통해 왕실의 발언에 문제를 제기했다.

    비스가 말한 대로 왕실은 이 나라의 종교 그 자체를 대변하는 듯했다. 쿠마리의 폐지를 지지한다는 의견을 낼 때도 ‘신의 뜻을 따른다’라는 표현을 썼으니 말이다.

    시선을 내리자 노블레스 길드원이 적어 놓은 듯한 가벼운 코멘트가 쓰여 있었다.

    [선 왕인 리수아 라나가 극단적인 종교 정치 지지자. 남편에게 왕위를 넘기고 난 후엔 왕궁 안에서만 지내는 듯]

    [수잔 라나, 3일 전 인터뷰에서는 쿠마리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말함 →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

    [줏대 없는 걸로 한동안 커뮤니티 내에서 조롱의 대상이 됨]

    문장 옆에는 왕의 인터뷰 사진으로 만든 조롱 섞인 이미지가 붙어 있었다.

    “후우…….”

    왕실이 쿠마리 시스템을 폐지한 이유는 더더욱 미궁 속으로 빠졌다. 비스가 그들의 목에 칼이라도 들이밀지 않은 이상 이렇게 갑작스럽게 쿠마리 시스템을 무너트릴 집단은 아닌 것 같은데.

    -우우웅.

    그때 개인 핸드폰이 울렸다. 인벤토리를 향해 손을 뻗어 핸드폰을 꺼내자 화면엔 꽤 반가운 이름이 떠 있었다. 허겁지겁 통역기를 귀에 끼운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 레일리.”

    ―어, 생각보다 빨리 받았군.

    의아하다는 듯한 레일리의 얼굴이 화면을 한가득 채웠다.

    ―아직도 네팔에 있나?

    “어떻게 알았어?”

    ―SS급이 난데없이 네팔로 날아가서 게이트 폭발까지 수습했다는데, 대서특필이 안 되게 생겼냐?

    ‘벌써 그렇게 퍼졌구나.’

    앞으로 돌아다닐 땐 사람들의 눈을 더 조심해야겠다. 비스와 함께 다니는 모습이 노출되면 그가 생각한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되고 말 테니까.

    나도 모르게 레일리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겼다. 고개를 들어 다시 레일리와 눈을 맞췄다.

    “아무튼, 갑자기 무슨 일이야?”

    ―내가 쿠마리 녀석한테 꿈을 조종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지.

    “응.”

    ―그것과 관련된 정보를 몇 개 더 찾았다.

    “정말?!”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대답하자 레일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통역기를 귀에서 뺐다, 다시 끼워 넣었다.

    ―아이 씨, 고막 터지는 줄 알았네.

    “아, 미안.”

    ―하아… 큼. 쿠마리 정보를 찾아 주고 있는 우리 길드원이 예전에 왕실에서 일하던 녀석의 영상 채널을 발견했거든.

    -우웅.

    레일리가 내게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클릭하자 ‘Chantin the chef’라는 채널로 바로 연결되었다. 프로필엔 요리사 옷을 입은 중년 여자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요리 채널인가?’

    영상의 썸네일은 이국적인 음식들로 가득했다.

    ―채널 주인은 20년 동안 왕실에서 주방장을 맡았던 녀석이다.

    “아, 그래서 썸네일이 전부 이렇구나.”

    ―레시피를 주로 올리고 있긴 한데, 몇 달 전에 올린 영상에서 꽤 흥미로운 정보가 나왔더군.

    레일리가 말을 마치자마자 음식 썸네일 중 한가운데 여러 개의 팔이 달린 여자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 속 여자는 인자하게 웃고 있었지만, 손에는 온갖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칼리와 꽤 닮았네.’

    ―일단 시간 없으니까 영상은 네가 알아서 찾아서 봐라.

    “알았어. 알아낸 정보부터 얘기해 줘.”

    레일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을 가다듬었다.

    ―칼리의 창이 나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쿠마리 시스템이 폐지된 건 알고 있지?

    “응. 네가 정리해 준 거 다 읽었어.”

    ―잘했다. 너도 봤다시피 많은 사람들이 왕실의 결정을 두고 굉장히 의아해했지. 조롱도 많이 하고.

    레일리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곤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이 주방장 녀석은 왕실의 그 결정이 그들이 꾼 악몽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더군.

    “…악몽이라고?”

    ―그래.

    악몽, 그것은 비스가 창조자로부터 받은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된 요소였다. 입을 다문 채로 레일리의 다음 말을 기다리자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주방장의 말에 따르면 쿠마리 폐지 발표 한 달 전쯤부터 수잔 왕이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만성 피로에 시달렸다고 한다. 숙면에 도움이 되는 식단으로 음식을 준비하고 영양제를 구비해도 소용이 없었고.

    “흐음…….”

    ―재밌는 건 선왕이자 그의 부인인 리수아,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아비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실 사람들이 전부 똑같은 증상을 겪은 거야?”

    레일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꽤 신빙성이 있는 게, 이 시기에 찍힌 로열 패밀리들의 사진을 보면 하나같이 얼굴이 개판이야. 눈을 보면 생선 눈깔이 따로 없다.

    레일리는 괴었던 턱을 뗀 후 안대를 고쳐 쓰며 말을 이었다.

    ―주방장도 이 가족들이 걱정되다 보니 몇 번은 직접 음식을 가져다줬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그 이야기를 들은 거지.

    “어떤 이야기?”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맹수처럼 빛났다.

    ―이들이 전부 똑같은 꿈을 꿨다는 이야기를.

    “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감탄사가 샜다. 가족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똑같은 꿈을 꾸는 것.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틀림없이 비스가 개입했을 것이다.

    아무런 말 없이 레일리를 빤히 바라보자 내 표정에 담긴 뜻을 알아챈 듯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래, 아마 쿠마리 녀석의 능력이겠지.

    “왕실은 종교를 엄청나게 믿고 숭배하는 집단이라고 했어. 만약 그 꿈에 신이라도 등장해 뭔가 말이라도 했으면 정말로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나는 다시 침대 위에 있던 자료를 집어 아까 봤던 구절을 다시 읽었다.

    ―수잔 라나 현 네팔 국왕은 ‘이 세상이 변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의 뜻 역시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신의 뜻을 따른다.’며 쿠마리 폐지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비스가 어떤 식으로 쿠마리 시스템을 없앴는지 알 것 같네.’

    머릿속으로 생각을 한번 정리한 후 레일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비스는 자기가 직접 쿠마리 시스템을 없앴어.”

    ―벌써 그런 이야기까지 나눴나? 대단하군.

    “그가 창조자에게 받은 능력으로 왕가 사람들의 꿈에 신을 등장시켜 쿠마리와 관련된 말을 하도록 했을 거야. 그들이 독실한 신자인데다가 모두가 같은 꿈을 꿨으니, 정말로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왕실이 쿠마리 폐지를 결정했다, 라… 흥미로운 접근이네.

    레일리가 씩 웃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박수를 쳤다. 그렇다면 비스가 창조자에게 왕실을 붕괴시켜 달라거나 그들을 죽여 달라는 소원 대신 꿈을 조종하는 힘을 요구한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비스도 왕실 사람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야.’

    지금의 그는 왕을 죽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망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스가 원하는 것은 쿠마리 시스템의 붕괴이지 왕의 죽음이 아닐 테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만약 악습을 끊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뭔 소리냐.

    “아, 빨리.”

    대답을 재촉하자 레일리의 얼굴이 심드렁하게 구겨졌다.

    ―그 인간을 죽이면 100%로 악습이 사라지는 건가?

    “높은 확률로 그렇게 보고 있어.”

    ―그럼 난 안 죽인다.

    “왜?”

    그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곤 다시 입을 열었다.

    ―악습으로 고통받는 녀석들을 구하면 100%의 확률로 악습이 사라지는데, 뭐 하러 사람을 죽이지?

    “…아!”

    ―그것 너도 비슷한 생각 아닌가?

    레일리의 대답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다는 내 막연한 바람이 정제된 방법으로 바뀌어 사고 회로에 녹아들었다.

    -달그락.

    “고마워 레일리! 덕분에 좀 방법이 나온 것 같아!”

    ―어, 어? 어어, 그래……?

    “일단 지금 급하게 가 봐야 해서 나중에 다시 걸게. 고마워!”

    ―그, 그래. 잘 가라.

    -뚝.

    당황한 레일리의 얼굴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핸드폰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고 카드키를 챙겨 호텔 방을 빠져나왔다. 약속했던 12시간이 지나기 전이지만 여유를 부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비스를 만나 아무도 죽지 않을 수 있는 계획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 * *

    “…생각보다 일찍 왔군.”

    비스가 묵고 있는 여관에 들어가 무작정 그의 방문을 두드렸더니, 기다리고 있던 건 잔뜩 구겨진 그의 얼굴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방 안쪽으로 턱짓하고는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생각해 봤나? 수잔을 죽이지 않고 쿠마리들을 자유롭게 할 계획을?”

    “응.”

    “말해 봐라.”

    비스는 팔짱을 끼며 조금은 거만한 태도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대답했다.

    “네가 말한 그대로야. 수잔을 죽이기 전에 쿠마리들을 자유롭게 하면 돼.”

    “…말장난하나?”

    “장난 아니야.”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의문]

    비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쿠마리 시험이 진행되는 지역이 있다면 그 시험을 망치고, 이미 뽑힌 지역이라면 쿠마리 스스로가 인간이 되도록 설득하자.”

    “무슨 소리를…….”

    “왕을 죽인다고 해서 쿠마리 시스템이 100% 사라질 거라는 보장은 없어.”

    비스가 숨을 훅 들이키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하지만 쿠마리들을 먼저 자유롭게 한다면, 100%의 확률로 쿠마리 시스템은 사라져.”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조금 더 몰아붙여야겠다..’

    커다래진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너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잖아.”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그야 처음으로 쿠마리 시스템을 없앴을 때 왕실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으니까.”

    [발언 결과 : 깨달음]

    비스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본인도 자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바스락.

    그를 향해 손을 뻗자 아이테르의 로브끼리 맞닿는 소리가 났다. 내 손과 나를 번갈아 보며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말을 뱉었다.

    “비스, 쿠마리를 무너트리자.”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어른들이 만들어 낸 어린 신이 다시 나타나지 못하게, 완전히 무너트려 버리자.”

    [발언 결과 : 신뢰]

    -텁.

    신 그 자체로 존재했던 비스의 손이 내 손을 맞잡았다.

    -사아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푸른 손도 우리의 손 위에 얹혔다.

    “칼리 님?”

    “근사한 계획이니 나도 감히 손을 얹어 보마.”

    칼리가 비스를 향해 씩 웃어 보이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뤄 주지 못한 이 녀석의 염원을 너라도 들어줬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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