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97화 (197/366)
  • 197화

    ―끼익.

    비스가 방에서 나와 나를 데려간 곳은 그가 묵고 있던 여관의 옥상이었다. 그곳에선 따뜻한 공기가 피부에 닿는 걸 느껴졌다. 그의 뒤를 따라가자 건물들 사이로 더르바르 광장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광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배낭을 멘 관광객들이 광장의 건물 사진을 찍는데 열중하는 동안,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가판대를 가게 밖으로 꺼내며 그런 관광객들의 주의를 끌었다.

    “저쪽 건너편, 붉은 건물 보이나?”

    “으음… 아, 위에 조각 같은 거 세 개 붙은 건물?”

    “그래.”

    비스가 가리킨 곳엔 붉은 벽돌로 된 건물이 있었다. 다른 건물들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외관에 한눈에 보아도 보통 건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게 카트만두의 쿠마리 사원이다. 로열 쿠마리가 사는 사원이지.”

    “지금은 빈 사원인 거지?”

    “맞아. 로열 쿠마리는 아직 없으니까.”

    ―드르륵.

    난간을 짚은 비스의 손이 주먹을 쥐자 벽돌이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여기도 조만간 부활할 거야. 왕궁 근처의 환전소에서 소문이 돌았다더군.”

    “환전소?”

    “왕궁에서 일하는 놈들이 거기서 달러를 많이 바꾸거든. 그래서 왕실과 관련된 모든 소문의 근원지는 그쪽 환전소지. 정확도도 꽤 높다.”

    비스는 아랫입술을 꾹 문 채 쿠마리 사원을 노려보았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들어 보고.”

    “피의 인드라 자트라 사건 이후에 왜 숨어 지낸 거야?”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착잡]

    여전히 마음이 혼란스러운 건지 비스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스르륵.

    그러자 칼리가 허공에 나타나 비스의 등을 토닥거렸다.

    “이 녀석을 네 계획에 포함시키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대범해져야지, 비스.”

    “…들어가세요.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시면 어쩌시려고.”

    “하하하!”

    칼리는 제 소환자를 향해 호탕하게 웃곤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비스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다 이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는 순간 죽여 버리겠다.”

    “걱정 마. 그럴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비스가 다시 쿠마리 사원 쪽을 바라보았다.

    “피의 인드라 자트라라니, 너무 고상한 이름이야.”

    그가 그때를 떠올리듯 눈을 감았다.

    “지옥, 그건 지옥 그 자체였다.”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사상 최악의 게이트 폭발 참사. 그 현장의 한가운데 있던 그였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 S급 게이트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게이트였다. 그래서 모두가 그것이 폭발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지.”

    비스의 눈꺼풀이 반쯤 열리자 붉은색의 눈동자가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도 평소와 다름없이 축제에 참가했다. 그때가 아마 나의 열세 번째 인드라 자트라였을 것이다.”

    “그렇게나 많이 참가했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 미소가 자신을 향해 짓는 조소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피가 나면 은퇴해야 하는 쿠마리가 18살까지 활동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나?”

    “…….”

    “그때까지 초경도 안 했다는 뜻이다. 즉,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는 것이지.”

    살아 있는 신으로서의 생활이 쿠마리들에게 남긴 것이 무엇일까. 눈앞의 비스를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그때도 똑같았다. 가마에 탄 채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큰 소리가 났어.”

    비스가 손을 뻗어 더르바르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허허벌판을 가리켰다. 포클레인이나 지게차 같은 공사 차량 주위로 산처럼 쌓인 건물 잔해와 흙더미가 보였다.

    “저기서 게이트가 폭발했고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지. 시내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고 사람들은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넌 어디로 대피했어?”

    “왕궁 안. 그때 처음으로 자동차라는 걸 타봤다.”

    다시 비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관리국 체제가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이라서 대응도 늦었다. UN이 전 세계의 헌터들에게 지원 요청을 보낸다는 소식만 귀에 들어왔을 뿐이지.”

    ―쿵.

    비스가 주먹으로 난간을 내리쳤다. 위로 치켜뜬 붉은 눈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죽어 나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하아…….”

    “그런 와중에 보스 몬스터 하나가 기어코 시내로 나와 왕궁을 향해 달려왔다.”

    이번엔 손가락으로 폐허에서 한참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그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잔뜩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역사가 느껴지는 왕궁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이 운명을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우습게도 각성을 하더군.”

    “…소환계 스킬이야?”

    “맞다. 살아 있는 신이 각성을 한 것도 모자라 칼리 신을 소환하는 스킬을 얻다니, 아주 재밌는 상황이었어.”

    비스는 ‘재밌는’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것이 반어법이라는 걸 강조하듯.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칼리 님이 나타나 보스 몬스터를 제압했다. 한 번에 쓰러트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시간은 번 셈이었지.”

    “…….”

    “그때 그 몬스터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칼리 님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라서 이젠 정말 끝나는구나 싶었지만.”

    ―치지직.

    그때 비스의 몸 주위로 검은 스파크가 튀었다. 그러더니 그의 등 뒤로 수십 개의 팔이 솟아나 칼리와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칼리를 볼 때 느꼈던 기묘한 위압감이 비스에게서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칼리 님을 내 몸에 빙의시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지.”

    ―스스슥.

    하지만 곧 빙의를 풀었다. 위협적으로 뿜어져 나오던 검은 스파크와 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칼리 님을 빙의시킨 내 몸으로 직접 싸웠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발로 제대로 걸어 본 적도 없었는데, 잘만 뛰어다닐 수 있더군.”

    “그럼 왕궁으로 들어왔던 몬스터는 네가 직접 잡았겠네.”

    “그렇다. 위험한 상황은 몇 번 있었지만 어쨌든 녀석을 소멸시켰다.”

    비스는 왕궁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덧붙였다.

    “이 세상의 예언자이니, 신이니 말로만 떠들었지 내가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해준 적이 없었어. 내 힘으로 누군가를 구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지.”

    “그렇구나.”

    “내 덕분에 목숨을 구한 이들이 나에게 고마움을 표하길 기대했다. 그 정도는 충분히 바랄 수 있는 건 줄 알았어.”

    ―후웅.

    제법 강한 바람이 불었다. 틀어 올렸던 비스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그의 얼굴 위로 살짝 쏟아졌다. 그 틈으로 보이는 옆얼굴은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어.”

    “…….”

    “그들은 나를 타락한 존재로 보았다. 죽음과 파괴의 신을 소환하고 야만스럽게 몬스터를 찢어발기는 짐승으로 취급했다.”

    비스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 발에 입 맞추던 왕이란 여자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했지.”

    “…끔찍하네.”

    “나의 각성 사실은 거기 있던 사람들만의 비밀이 됐고, 나는 그대로 은퇴했다. 각성한 사실이 밝혀지면 안 되니 나도 그대로 숨었고 말이야.”

    왕실이 비스의 은퇴에 대해 말 한마디 없던 이유, 그리고 비스가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했던 이유 뒤에 이렇게 비참한 이야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빛없이 탁하게 물들어 있었다.

    “칼리의 창으로 나타난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종의 경고였지. 어린 마음에 저지른 일인데, 여러모로 귀찮게 됐어.”

    “그럼 쿠마리 시스템이 잠깐 사라졌던 건? 그것도 네가 한 게 맞지?”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당혹]

    그는 나를 공격한 이유가 쿠마리의 소멸과 관련이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즉, 그는 쿠마리의 소멸을 조건으로 창조자의 사도가 되었거나 아니면 소멸시킬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빈 것이다.

    “맞아. 그것도 내가 한 것이다. 어떻게 했는지는 묻지 말도록. 어차피 설명해도 모를 테니 말이다.”

    ‘나중에 다 알게 되면 민망해할 수도 있겠네.’

    일단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말을 덧붙였다.

    “SS급, 나는 이 나라에서 쿠마리라는 존재 자체를 없앨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리고 그 계획에 날 포함시키려 하는 거지?”

    “그래.”

    “구체적인 계획은?”

    비스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현 국왕, 수잔 라나를 살해한다.”

    “…뭐?”

    생각지도 못한 방법에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비스는 고집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현재의 왕실은 종교를 대표하는 녀석들이야. 그들만 무너트리면 종교와 관련된 제도를 바꾸기 쉽지. 특히 쿠마리는 예전부터 아동 학대로 비판을 받던 것 중 하나이니 가장 먼저 사라질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없어. 수잔을 죽이고 왕권을 무너트리는 수밖에 없어.”

    비스는 완강했다. 그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차선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선왕이자 현 왕의 부인인 리수아를 죽이고 싶지만, 이미 그 녀석의 상징성은 다 했으니 의미가 없다.”

    “누구를 죽이든 그 사람들이 쿠마리 시스템을 만든 사람들은 아니잖아. 정확한 원인도 아닌 사람들을 죽여 봤자……!”

    “원흉을 찾아서 죽이기엔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버렸어!”

    비스가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이 거지 같은 시스템의 뿌리를 뽑아내려고 하는 동안 수많은 쿠마리가 희생되었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아 보지도 못하고 사라지는 녀석들이 수십, 수백이라고!”

    “…….”

    “뿌리를 뽑아낼 수 없다면 뿌리로부터 자라 나온 가지라도 잘라야지, 안 그래?”

    지금의 나는 비스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쿠마리로서 몸과 정신이 모두 피폐해진 그를 두고, 도덕 문제를 운운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일단 지금은 물러나는 수밖에 없어.’

    “하아…….”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내쉰 후 다시 비스를 바라보았다.

    “지금으로부터 딱 12시간, 나한테 12시간만 줘.”

    “준다면?”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쿠마리를 자유롭게 할 방법을 만들어 올게.”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황당]

    '그래, 황당하겠지.'

    하지만 그의 호감을 얻겠다고 사람을 죽이는 계획에 동참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람을 구하는 삶을 살아온 그에게 살인이라는 업을 씌우고 싶지 않았다.

    ―터벅.

    나는 계단 쪽으로 뒷걸음질하며 비스에게 말했다.

    “네 손에 피 묻힐 일 없게 할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끼익.

    나는 비스를 옥상에 세워 둔 채 그대로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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