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무슨 일 있으면 점이라도 하나 보내
―하미준 헌터]
‘걱정도 많아.’
호텔로 돌아와 비스와 있던 일을 이야기 했을 때, 하미준 헌터는 심각한 얼굴이 돼서는 자신도 따라가면 안 되겠냐며 온갖 걱정을 쏟아냈다. 그런 그를 겨우 떨어트려 놓고 왔더니 아니나 다를까 저런 문자가 와 있었다.
[(엄지 이모티콘)]
이모티콘으로 답장한 후, 핸드폰을 다시 인벤토리 안에 넣었다. 등교하는 학생들과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헤치며 더르바르 광장 입구에 들어서자 제복을 입은 직원이 나를 가로막았다.
“외국인은 천 루피입니다.”
안내소 직원에게 지폐 한 장을 건넨 후 광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전의 더르바르 광장은 장사 준비를 하는 사람들로 분주해 보였다. 나는 점퍼 형태로 바꾼 아이테르의 로브 모자를 눌러쓰고, 근처 벤치에 앉아 주위를 살폈다.
어제 게이트 폭발을 수습한 일로 라울 국장과 던전 관리국 사람들의 귀에 ‘칼리의 창’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그들은 창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나와 기네쉬 헌터의 말에 아쉬움을 내비쳤지만, 고마움을 표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7:56]
‘슬슬 이동해 볼까.’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후,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비스가 말한 곳은 ‘의상실과 환전소 사이의 골목’. 간판들이 내가 전혀 읽을 수 없는 글자로 가득해서 가게 안을 대충 보지 않으면 어떤 가게인지 알 수 없었다.
―끼긱.
광장 안쪽으로 한참 걸어 들어가자 마네킹을 들고나오는 남자가 보였다. 전통 의상처럼 보이는 옷들을 마네킹에 입히는 그를 본 후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exchange]
유리 벽에 붙어 있는 영어와 온갖 화폐 기호. 누가 봐도 환전소였다.
주위를 살피며 두 가게 사이의 골목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 여기저기 널린 쓰레기 때문에 악취가 코를 찔렀다. 소매로 입과 코를 가린 채 골목을 따라 쭉 들어왔다.
‘왠지 낯설지 않아…….’
안으로 발을 들일수록 어두컴컴한 이 풍경이 눈에 익었다. 분명 이렇게 생긴 골목을 들어와서 뭔가 했던 것 같은데…….
[INN]
“…아, 젠장.”
가장 안쪽에 있던 건물의 불 꺼진 간판을 보자마자 이 기시감의 원인을 알아차렸다.
이곳은 내가 98번째의 회귀에서 비스를 죽인 장소였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그의 뒤통수를 향해 자아를 쐈고, 그는 그대로 즉사했었다. 그가 어떤 인간인지 대충 살핀 후에 재빠르게 자리를 떴었지.
―끼이익.
과거를 떠올리는 것도 잠시, 곧바로 건물의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붉은 망토를 뒤집어쓴 비스가 나타났다.
“진짜로 왔군. 너도 제정신은 아니구나.”
“네가 궁금하면 오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왔지.”
“일단 따라와.”
비스는 순순히 나를 건물 안으로 들였다.
―쿵.
로비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다. 카운터 너머에 있는 노인은 나와 비스를 흘긋 보곤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비스는 바로 옆에 있던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갔다.
“여기에서 사는 거야?”
“잠시 지내는 것뿐이다.”
유랑 생활을 하는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2층 복도의 가장 안쪽 방 앞에 선 비스는 품에서 열쇠를 꺼내 문고리에 끼웠다.
―철컥.
열쇠를 뽑아 문을 열곤 먼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참 재미있구나.”
그와 동시에 머리 위쪽으로 칼리가 나타났다. 여러 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자 털이 쭈뼛 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공중에서 한 바퀴 돈 후 침대에 걸터앉은 비스의 옆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네가 죽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나?”
“당연히 해 봤지.”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즈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의문]
내 대답이 그의 예상 밖이었는지, 비스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네가 왜 정체를 숨기고 사람들을 도와주는 건지 알고 싶었으니까.”
“…….”
“그리고 왜 나를 공격한 건지도 알고 싶고.”
“쯧.”
비스가 혀를 차며 짜증 난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분위기만 봐선 일단 나를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네.’
죽일 목적이었으면 방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칼리가 바로 기습 공격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즉, 대화와 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아까보다 긴장을 푼 채로 비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너도 날 죽일 생각이 없잖아. 그치?”
“…부정할 수 없군.”
비스의 대답을 듣고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나를 죽이고 힘을 되찾겠다는 목표를 포기한 것이다.
‘그럼 창조자한테 받은 능력 없이 살겠다는 건데…….’
―짝.
그의 변화에 의문이 들 때쯤 비스가 박수를 쳐 주의를 끌었다.
“너, 내가 왜 궁금한지 설명해 봐.”
비스의 붉은 눈동자가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빛났다. 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머릿속으로 레일리가 정리해 줬던 자료를 떠올렸다.
“20년 전 피의 인드라 자트라 사건이 터지고, 네가 돌연 쿠마리를 은퇴했지. 그 이후로 실종됐고.”
“…….”
“그로부터 약 10년 후쯤 칼리의 창이 나타났어.”
숨을 한 번 고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로열 쿠마리는 물론 로컬 쿠마리도 사라졌더라고.”
“호오.”
“10년 주기로 기묘한 일들이 자꾸 일어나는데, 그게 모두 비스, 너랑 관련이 있을 것 같았거든.”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그래서 네가 왜 그런 행동을 한 건지 알고 싶었어.”
[발언 결과 : 흥미]
중간에 감탄사를 뱉은 칼리를 옆에 두고, 비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말에 흥미를 가지긴 했지만 얼굴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듯했다.
“관리국 머저리들이 떠드는 것보다 훨씬 낫구나. 아주 재미있는 접근이야, 안 그래?”
“재미있다기보단 우습네요.”
―끼익.
비스가 양손으로 등 뒤를 짚으며 상체를 살짝 뒤로 뺐다. 고개까지 옆으로 돌리곤 따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단순히 내가 실종된 쿠마리라는 이유만으로 그 이후에 나타난 모든 사건들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게 얼마나 우스운지 모르겠군.”
“네가 칼리의 창인 건 맞으니까 결과적으로 반은 맞춘 셈이지.”
비스의 시선이 날카롭게 꽂혔다. 무거운 정적이 좁은 방 안을 가득 메운 그 순간.
“아하하하!”
곧바로 칼리가 정적을 깼다.
“비스 이후로 이렇게 재미있는 인간은 또 처음이네.”
―스으윽.
칼리가 귀신처럼 내 앞에 나타나 내 몸 이곳저곳을 살피며 저 혼자 키득거렸다.
“쿠마리 시스템을 없앤 것도 우리 비스라고 생각해?”
“그건…….”
칼리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느낌상 연관이 있을 것 같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었다. 한참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어.”
“어리석은 녀석.”
“하지만 정말로 네가 없앤 거라면,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벽에 닿아 있던 비스의 시선이 내 쪽으로 돌아왔다.
‘진짜로 얘가 한 건가?’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비스는 동요하고 있었다. 마치 그 말을 듣고 싶어 한 것처럼.
그렇다면 이 부분을 더욱 파고드는 수밖에 없다.
“외지인인 내가 얘기하는 것도 좀 웃기긴 한데, 조금 이상한 문화 같거든. 사실상 아동 학대랑 다를 바가 없어서.”
―까득.
비스의 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내 귀까지 들렸다.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 있는 칼리의 얼굴과 비스를 번갈아 보았다.
“넌 신분을 숨긴 후에도 민간인을 구해 주는 사람인데, 그런 아이들까지 구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발언 결과 : 혼란]
―쿵.
비스가 발로 바닥을 내리치자 방 전체가 크게 울렸다.
“별 이상한 게 튀어나와선…….”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지금이 기회야.’
크게 동요하는 지금, 그에게 말의 씨앗을 심을 수 있는 최고의 타이밍이다.
―터벅.
비스에게 한 발짝 다가가자 그가 고개를 홱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모든 사람들이 네게 구해 줘서 고맙다고 할 거야.”
―치지직.
[연계 패시브 스킬 발동]
[‘말이 씨가 된다’]
[‘언젠가 모든 사람들이 네게 구해 줘서 고맙다고 할 거야’의 씨앗을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에게 심겠습니까?]
내가 바란 대로 내 말이 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나는 상태창을 향해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네.’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에게 ‘언젠가 모든 사람들이 네게 구해 줘서 고맙다고 할 거야’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눈앞에 떴던 문장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크게 뜬 눈이 나를 멍하니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다시 떨구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꼬일 대로 다 꼬였어.”
“너와 잘 맞을 것 같은 녀석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손으로 제 이마를 짚은 비스의 등 위로 칼리가 올라탔다. 그는 재밌다는 듯 실실 웃으며 나와 비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묻는 말에 대답해 줬으니 네게도 우리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겠다.”
“칼리 님!”
비스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자 칼리는 다시 둥실 떠올라 이번엔 침대 헤드에 걸터앉았다.
“지금까지 네 노고를 인정해 주는 녀석은 단 한 놈도 없지 않았느냐. 이 정도는 충분히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쳇……!”
모자 밑으로 보이는 붉은 눈이 나를 한참 노려보았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나한테 궁금한 거 있어?”
‘창조자한테 무슨 소원 빌었냐고 묻고 싶네…….’
본심을 꾹 누른 후 의심을 덜 받을 수 있는 질문으로 돌려서 물었다.
“쿠마리 체제를 없애려고 한 거랑 어제 나를 죽이려고 한 것, 혹시 관련 있어?”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당혹]
그리고 그 질문은 정확히 먹혔다. 비스의 지금 반응으로 그의 소원이 쿠마리의 소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욱 확실해졌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리더니 결국 포기한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구나. 그래, 맞다.”
―사락.
그는 망토 모자를 뒤로 젖히곤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래로 떨어지는 눈매 탓에 나른해 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를 응시하는 그 붉은 눈동자만큼은 타오르는 것처럼 강렬했다. 이제야 진짜 비스와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널 내 계획에 포함시키는 수밖에 없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