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녹두야!”
“아우우―!”
―키이잉.
건물 밖으로 나와 녀석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녹두가 연두빛 궤적을 남기며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로는 대피 행렬로 막힐 테니 공중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시내에 게이트 폭발했대! 거기까지 데려다줘!”
‘알겠어!’
녹두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내게 등을 내어주었다. 커다란 등에 올라타 목을 끌어안자마자 녹두가 몸을 일으켰고, 순식간에 시야가 높아졌다. 덕분에 차에 몸을 싣던 하미준 헌터와 라울 국장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현장 공무원에게는 미리 말해 두었습니다! 바로 진입해서 경계를 맡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어요!”
라울 국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녹두의 가슴께를 가볍게 두드렸다.
―후웅.
녹두는 허공을 높이 뛰어오르더니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게이트가 터진 곳을 찾았다.
‘저쪽이다!’
이내 광장처럼 보이는 넓은 공간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하고 그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치다 못해 때리는 수준이라 정신이 살짝 혼미했다.
“꺄아악!”
“질서를 지켜 주세요!”
“이곳은 위험합니다! 빠르게 이곳에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수라장이 된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제복을 입은 공무원들과 경찰들이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동안, 헌터들이 무기를 들고 게이트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허겁지겁 도망가고 있었지만, 주말의 대낮이다 보니 아직도 광장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쾅!
“우와악!”
“쳇……!”
계속해서 늘어난 몬스터의 수를 이기지 못하고 게이트가 결국 몬스터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온 커다란 코끼리 두 마리가 코로 불을 뿜어대며 광장의 공기를 뜨겁게 만들었다.
―철컥, 탕!
광장에 있던 헌터들의 무기가 코끼리들을 향하기도 전에, 나의 탄환이 녀석들의 몸을 먼저 관통했다. 작은 탄환 하나에 집채만 한 코끼리들이 힘없이 바닥 위로 엎어지다 이내 완전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C급이라서 다행이네.’
―탁.
녹두가 게이트 바로 앞에 착지하자 현장을 정리하던 공무원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국장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지금 공략팀 들어갔나요?”
“네. 내부 쪽으로 깊게 들어갔고, A급 헌터 한 명만 경계에서 대기 중입니다!”
빠져나오는 몬스터만 내부에서 잘 정리되면 민간인 피해는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상황을 알려 준 공무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후, 그대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휘이잉.
던전 내부는 사원 같은 공간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붉은 길을 따라 정교한 석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 오셨군요!”
그때 김민숙 헌터의 나이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벽에 기대어 있다 몸을 일으켜 내게 다가왔다.
―타닥.
녹두의 등에서 내려 소환을 해제한 후 그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자 상처투성이의 손이 내 손을 단단히 잡았다.
“네팔 던전 관리국 소속, 기네쉬예요.”
“대한민국 헌터 협회 신지의입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두꺼운 굳은살에서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요즘 들어 게이트가 더 난리네요. 체감상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터지는 것 같아요.”
기네쉬 헌터는 손을 놓자마자 피곤하다는 듯 한숨 섞인 말을 뱉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면 정말로 자주 터지는 편이네요.”
“네. 터지는 만큼 또 던전이 계속 생겨나서 도저히 쉴 틈이 없어요.”
그 말이 사실인 듯 그의 두 눈 밑엔 짙은 다크서클이 자리하고 있었다.
―쿠구구궁.
대화를 나누기도 잠시, 곧바로 던전 내부가 크게 진동했다. 기네쉬 헌터는 커다란 망치를 양손에 쥔 채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몬스터를 대비했다. 나도 자아를 고쳐 쥐며 오랜만에 마주하게 될 경계 몬스터를 기다렸다.
[왜곡, 무질서, 혼돈의 공간]
[경계에 입장하셨습니다.]
입장을 알리는 문장이 뜨는 동안 사원의 벽은 위쪽으로 끝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두두두둑.
그러더니 벽에서 큐브들이 불규칙적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큐브 위에는 팔뚝만 한 석상들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저것들이 곧 우리를 공격할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이번엔 좀 든든하네요. 평소 같았으면 저랑 B급 헌터 둘이서 담당하거나, 혼자 상대 하다가 내부 쪽 헌터들한테 지원 요청했을걸요.”
“경계를 혼자서 담당하신다고요?”
“네. 이쪽에선 자주 있는 일이에요~”
기네쉬 헌터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헌터도 부족한데 던전까지 계속해서 터지는 상황이니, 기존 헌터들도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다. 각성 사실을 숨긴 채 해외로 나가 타국 길드에 들어간다는 말도 직접 현장을 보니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치직.
떠 있던 상태창이 사라지고 새로운 상태창이 나타났다.
[감지된 생명체의 수 : 3명]
“…3명?”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샜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누군가 들어왔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지금 이곳엔 나와 기네쉬 헌터 둘 뿐이었다.
‘잠깐, 설마……!’
본능적으로 어떤 예감이 전신을 훑었다. 이곳에 흘러 들어온 정체불명의 주인공을 알 것 같은 예감이.
―파지직.
스파크가 튀는 소리와 함께 내 예상과 눈앞의 사실이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졌다.
검푸른 스파크에 둘러싸인 채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거대한 창, 바로 ‘칼리의 창’이었다.
“세상에…….”
기네쉬 헌터는 잠시 멍하니 창을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세차게 젓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좋은 구경 하시겠네요.”
[개체 수 : 100마리]
[개체 종 : 분열 괴수]
[개체 등급 : C급]
[개체 특징 : 공격받으면 세 마리로 분열한다.]
[경계 소멸 조건: 분열 괴수 몰살]
기네쉬 헌터가 말을 마치자마자 경계에 대한 정보가 떴다. 개체 수 자체도 100인데 분열까지 한다니, 사실상 몬스터 300마리와 싸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끼기기긱.
큐브 위에 올려진 석상들이 떨더니 이내 우리 쪽으로 와르르 떨어지기 시작했다.
―콰그작!!!
기네쉬 헌터의 망치가 석상들을 부수자마자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산산조각이 난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동시에 그것들이 다시 몸집을 불려 아까와 똑같은 석상 모양으로 바뀌었다.
―우웅.
자아의 방아쇠를 길게 당겨 소리 파도로 이 공간을 집어삼켰다. 흰 파동에 닿은 석상들은 분열이 채 되기도 전에 모래 알갱이처럼 작게 부서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쾅, 쾅, 쾅.
자아의 방아쇠를 당기는 동안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칼리의 창도 분열하는 석상들을 빠르게 파괴하고 있었다.
‘분명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을 텐데.’
―콰광!
날카로운 칼바람이 석상을 한 번에 두 동강을 내자, 칼리의 창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분열된 석상들을 횡으로 베었다.
“진짜 신기하네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저렇게 싸울 수 있다니…….”
“그렇죠? 처음 만났을 땐 적응도 안 되고 가끔 괘씸하기도 했는데, 이젠 정이 붙어 버렸지 뭐예요.”
―쾅!
기네쉬 헌터가 망치로 석상을 내리찍은 후 말을 덧붙였다.
“숨어 있긴 해도 어쨌거나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으니까요.”
자연스럽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니 그가 하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저였어도 기네쉬 헌터처럼 생각했을 것 같네요.”
“아하하, 대부분의 국가 소속 헌터들이 저랑 똑같은 생각일 거예요.”
고개를 슬쩍 돌려 칼리의 창을 다시 보았다. 그것은 우리의 대화를 의식하는 건지 석상을 부수다 중간중간 움찔하며 우리 쪽으로 살짝 방향을 틀기도 했다.
기네쉬 헌터의 말을 들어보면, 네팔 소속 헌터들 사이에서 칼리의 창의 여론은 꽤 좋은 편이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헌터로 생활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헌터들의 복지가 좋지 않아서 정체를 숨기는 거라곤 볼 수 없겠네.’
―쾅!
“큿……!”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양손에 칼을 든 석상 하나가 내게 달려들었다. 자아를 배트로 바꿔 그것을 쳐올리자, 녀석이 세 개로 쪼개졌다.
―탕!
굵은 탄환을 뽑아 세 마리를 한 번에 해치운 후, 고개를 들어 남은 녀석들을 대충 눈으로 세었다.
‘서른 마리 좀 더 되려나.’
분열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100마리 정도 남은 것이었다. 그래도 짧은 시간에 3분의 1을 해치웠다.
“빠르게 끝내죠!”
기네쉬 헌터의 우렁찬 말과 함께 다시 한번 석상들의 폭포가 밑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빨리 끝내고 칼리의 창부터 찾아야겠어.’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구원자의 무기 창고를 열어 바주카를 꺼냈다.
―콰과과광!!!
조금의 지체도 없이 곧바로 석상들을 향해 발포하자 묵직한 소리 포탄이 그것들을 전부 집어삼켰다. 주위의 공기가 소용돌이치듯 근처에 있던 석상들을 끌어당긴 덕에 포탄에 닿지 않은 녀석들까지 전부 산산조각이 났다.
―콰그작!
이어 차가운 바람과 칼리의 창이 분열한 일부 석상들을 마무리했다. 회색 돌가루만이 처참하게 바닥에 널려 있을 뿐이었다.
[분열 괴수 몰살 완료]
[뒤틀린 존재들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평온해집니다.]
[무너졌던 질서가 올바르게 돌아갑니다.]
[경계가 닫힙니다.]
[감지된 생명체의 수 : 3]
이번 전투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경계의 소멸을 알리듯 위로 쭉 뻗었던 사원의 천장이 다시 원래의 높이로 돌아왔다.
“신지의 헌터 덕분에 엄청 빨리 끝났네요!”
“몬스터의 공격력과 방어력이 높지 않아서 다행이었어요.”
“그러니까요. 아, 너도 수고했어. 나타나 줬으면 밥이라도 샀을 텐데.”
기네쉬 헌터가 칼리의 창을 보며 어깨를 으쓱이자 칼리의 창 주위로 검푸른 스파크가 계속해서 일었다.
“저는 다른 사람들 도와서 내부 몬스터 처리하고 나갈게요. 신지의 헌터는 이 길 쭉 따라서 게이트 통해서 나가시면 돼요!”
“아, 감사합니다!”
“오히려 저희가 더 감사해야죠. 그럼 이만!”
기네쉬 헌터가 망치를 다시 액세서리 형태로 돌려놓으며 먼저 자리를 떴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계속 지켜보다가 이내 점이 되어 사라질 때쯤 고개를 돌려 칼리의 창을 바라보았다.
―파지직.
그것 역시 여전히 공중에 떠 있는 채였다.
'안 따라가나?'
폭발을 수습하려면 기네쉬 헌터를 따라 몬스터를 잡으러 가야 할 텐데, 칼리의 창은 그럴 기미가 전혀 없어 보였다.
―치직.
칼리의 창 주위로 또다시 스파크가 튀었다. 기네쉬 헌터가 있을 때보다 그 빈도가 잦아진 듯한 느낌인…….
―콰과광!
“윽!”
그 순간, 칼리의 창이 내 눈앞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