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93화 (193/366)
  • 193화

    일주일 후.

    [도착까지 남은 시간 : 02:52]

    세 시간 정도만 더 있으면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고개를 들어 칸막이 너머로 하미준 헌터 쪽을 바라보자 그는 여전히 안대를 쓴 채로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탁.

    나는 좌석 옆에 있던 스위치를 눌러 램프부터 켰다. 인벤토리 속에 넣어 둔 서류 뭉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종이들이 서로 부딪쳐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칼럼]

    ― 로컬 쿠마리 다시 부활, 쿠마리 제도의 명과 암]

    [세계는 지금]

    ― 로열 쿠마리로 비스 바즈라차르야 선발, 7세 아이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네팔 박다푸르에서 D급 게이트 폭발, 이번에도 ‘칼리의 창’이 살렸다

    ―네팔, OECD 국가 중 국가 소속 헌터 수입 최하위권 기록

    내가 따로 조사한 자료와 레일리가 보내 준 자료를 합친 것들이었다. 이렇게 모아 보니 양이 꽤 되었다.

    ‘일단 네팔 던전 관리 상태부터 한번 볼까.’

    아자디바르 남매에게 얼핏 들은 바에 의하면 인도와 네팔 쪽은 던전 관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각성 신고제이기 때문에 각성 사실을 숨긴 채 민간인처럼 사는 사람도 있었다.

    사락.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며 네팔의 국가 소속 상위 헌터들의 프로필을 살폈다. S급은 관리국장인 라울을 포함하여 3명, A급은 12명뿐이었다. 던전을 주기적으로 공략할 헌터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게이트 오픈보다 게이트 폭발이 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건… SNS 게시글인가?’

    레일리가 보내 준 자료 뒤쪽에 누군가의 SNS 게시글 캡처본이 있었다. 옆에는 한국어 번역까지 친절하게 붙어 있어 쉽게 눈에 들어왔다.

    └치킨라이스 : 와 피의 인드라 자트라 사건이 벌써 20년 전임? 시간 진짜 빠르네… 하필 쿠마리 행차 중에 S급 게이트 폭발해서 사람들 대피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치킨라이스 : ??? 찾아보니까 게이트 닫히자마자 쿠마리 은퇴했네?

    └리베라 : 대피하다가 상처 났겠지, X신아. 아무리 가마에 태워서 X나 뛴다고 한들 몬스터 속도를 어떻게 막겠냐?

    └치킨라이스 :초면인데 말 심하게 하네 친구야. 근데 뉴스에선 쿠마리 다쳤다는 말 없음.

    └리베라 : 나중에 발견된 거 아님? 피가 안 나는 게 더 이상할 듯.

    └치킨라이스 : 그 후에 쿠마리 실종됐는데도 왕실은 걍 무시했잖아. 왕실이 죽였다는 음모론이 사실인가?!!?! ‘피의 인드라 자트라 사건?’

    팔랑.

    마지막 장으로 넘기자 해당 사건에 대한 요약본이 있었다.

    [피의 인드라 자트라 사건]

    네팔의 축제 ‘인드라 자트라’ 기간 중 카트만두 S급 게이트가 폭발하는 바람에 10,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게이트 참사. (사망자 4,658명)

    전 세계적으로 사상 최악의 게이트 참사로 기록.

    왕은 사죄의 뜻으로 스스로를 폐위시킴. 아들의 후계자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남편을 왕위에 올림.

    당시 로열 쿠마리였던 ‘비스 바즈라차르야’는 왕궁 안으로 대피함. 게이트 소멸 발표 다음 날 돌연 은퇴.

    이에 대해 왕실은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았음. 그 후 ‘비스 바즈라차르야’는 행방불명 상태.

    게이트 폭발 사고 직후 은퇴하고, 그대로 실종된 로열 쿠마리.

    ‘아무리 봐도 수상하네.’

    은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면 왕실도 굳이 이 은퇴에 대해 함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오해만 더 키울 테니까.

    하지만 왕실은 입을 다물었고, 해당 사건이 있던 때로부터 2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음모론의 중심에 서 있었다.

    툭.

    자료를 다시 인벤토리에 넣은 후 테이블을 접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가장 유력한 사도 후보라는 점이었다.

    그가 창조자에게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아는 건 고사하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위이잉

    의자 등받이를 완전히 뒤로 눕혀 그대로 누워 버렸다. 푸른빛이 은은하게 흐르는 천장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온몸이 나른해졌다.

    ‘눈이라도 좀 붙이자.’

    길게 잠들진 못하겠지만 일단 눈을 천천히 감았다.

    * * *

    “하미준 헌터!”

    “이야~ 라울 국장! 얼마 만이야, 이게?”

    프라이빗 게이트로 빠져나오자 하미준 헌터의 메신저 화면에서 봤던 남자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라울 국장은 하미준 헌터 옆에 서도 전혀 작아 보이지 않는 체격의 소유자로, 딱 봐도 근접 전투에 특화된 방어계 헌터로 보였다.

    “자, 그리고 이쪽은… 굳이 설명 안 해도 알지?”

    “아하하! 알다마다.”

    하미준 헌터의 능청스러운 말에 라울 국장이 소리 내어 웃은 후 내게 손을 내밀었다.

    “라울 아디카리입니다! 네팔의 던전 관리국장을 맡고 있죠.”

    “대한민국 헌터 협회 소속 신지의입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저도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띤 채 그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우리 신지의 헌터가 네팔 쪽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서 말이야. 꼭 와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모셔 왔지.”

    “오오! 정말이십니까?”

    “네. 최근에 다큐멘터리를 몇 개 봤는데, 엄청 인상적이었거든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라울 아디카리’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감동]

    내 말에 라울 국장이 눈을 더 크게 떴다.

    “제 입으로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꽤 매력적인 나라입니다.”

    “관광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네요.”

    “식사 후에 저희 쪽에서 가이드를 붙여드리죠! 계시는 동안 편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울은 호탕하면서도 신뢰감을 주는 어투로 말을 마무리하곤 우리를 공항 밖으로 안내했다.

    * * *

    공항에서 관리국 본부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도로 위를 누비는 수많은 오토바이 행렬과 길거리에 턱 하니 놓여 있는 게이트들을 보며 몇 번 경악하고 나니 관리국 건물 앞에 다다랐다.

    “자, 여기가 저희 네팔 던전 관리국 본부입니다!”

    차에서 내려 고개를 들자 주위 건물보다는 상대적으로 꽤 높은 고층 건물이 있었다. 라울 국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오니 깔끔한 현대식 건물 내부가 펼쳐졌고, 주변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가장 안쪽 홀로 발을 들였다.

    “어머, 뭘 이런 걸 다 준비했어?”

    “우리 하미준 헌터가 온다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혹시 무기 반쯤 부서진 거 아니지?”

    “아하하! 농담도 참. 얼른 앉기나 하셔.”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사람들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대화를 배경 음악 삼아 중앙에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았다. 테이블 위는 온갖 요리들로 가득 차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헌터들끼리 모인 터라 대화 주제는 대부분 던전과 몬스터, 그리고 헌터들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도 상황이 좋지는 않구나.’

    아까 비행기에서 봤던 내용들이 라울 국장의 입을 통해 나왔다. 국가 소속 헌터의 처우가 그렇게 좋지 않다 보니 각성 사실을 숨기는 사람들이 많았고, 있다고 해도 해외 길드로 유출되기 일쑤였다.

    “S급은커녕 A급 헌터도 찾기 힘든 상황이니까요.”

    라울 국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달그락

    나는 나이프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후 국장을 향해 천천히 입을 뗐다.

    “이럴 때 ‘칼리의 창’ 같은 헌터가 나와 주면 참 좋을 텐데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라울 아디카리’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강한 긍정]

    라울의 격한 반응에 내 옆에 앉아 있던 하미준 헌터가 작게 웃었다.

    “간지러운 곳을 제대로 긁었네.”

    “그런가 봐요.”

    하미준 헌터가 내 귀에 대고 슬쩍 말을 하더니 금방 라울 국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녀석 누군지 전혀 못 알아낸 거야?”

    “부끄럽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여간 잽싼 게 아니야.”

    “S급으로 보고 있는 거지?”

    “응. 처음엔 B급이나 A급 헌터 정도로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녀석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해 보니 그것보다 훨씬 높을 것 같더라고.”

    라울 국장이 라씨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녀석이 수습한 게이트 폭발만 지금까지 20개는 족히 될 거야.”

    “아무리 S급이어도 혼자서 폭발을 수습하는 건 어려웠을 텐데, 정말로 그를 본 사람이 없나요?”

    “없어요. 상급 은신계 스킬이 있는지 녀석의 창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아쉬운 듯 울상을 지었다.

    ‘그렇다면 같은 공간에 존재하긴 한 건데…….’

    모습을 감춘 채 무기만 들고 싸우거나, 아니면 무기를 조종하는 능력을 가졌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가 상당한 실력자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외국인일 가능성은 없어?”

    “100%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아. 왜냐면 우리나라 말을 알아들었거든.”

    “대화를 했어요?”

    “약간요.”

    라울 국장의 시선이 내 쪽으로 넘어왔다.

    “히말라야 A급 게이트 오픈을 수습했을 때였는데, 그때도 어김없이 칼리의 창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기억을 더듬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보스 몬스터가 데미지를 입을 때마다 한기를 방출하는 타입이라서 한 번에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죠.”

    “그 말을 칼리의 창이 알아들은 거군요.”

    “정확합니다.”

    라울 국장의 눈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진짜로 알아듣는 건가 싶어서 다른 지시도 해 봤는데 녀석은 정확히 제 요청을 수행했습니다.”

    “힌디어랑 네팔어 둘 다 알아들어?”

    “응. 일부러 억양을 이상하게 해 봤는데도 알아들었어.”

    라울 국장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실종된 비스 바즈라차르야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혹시 칼리의 창이 언제부터 발견되기 시작했나요?”

    “한 15년 정도 됐나? 10년은 확실히 넘었죠.”

    나는 머릿속으로 10년이라는 시간을 천천히 곱씹었다.

    피의 인드라 자트라 사건이 20년 전, 로열 쿠마리인 비스 바즈라차르야도 그 직후 은퇴하고 자취를 감췄다. 그럼 칼리의 창이 나타난 것은 그 이후가 될 것이고. 그리고 쿠마리 제도가 전면으로 사라진 것도 10년 전쯤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에에에엥!!

    그때 건물 전체에 사이렌이 울렸다. 고막을 파고드는 굉음에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고 주위를 살피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C급? 야단났군.”

    라울 국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았고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귀한 분들 모셔 놓고 먼저 자리를 뜨게 돼서 미안합니다. 시내 쪽에 C급 게이트 하나가 터졌다고 하는군요.”

    “여기서 얼마나 걸리죠?”

    “차로 20분 정도 걸립니다. 그래도 중급 게이트니까 금방 수습할 수 있을…….”

    그가 말하는 동안 눈동자를 굴려 하미준 헌터를 슬쩍 보았다.

    “기회예요.”

    “기회네.”

    그리고 서로 다른 목소리가 겹쳤다.

    드르륵.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울 국장의 시선이 나를 따라왔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가도 될까요?”

    “시, 신지의 헌터께서요?!”

    라울 국장이 크게 당황하고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술렁거렸다.

    ‘칼리의 창과 만날 수 있는 기회인데, 어떻게든 잡아야지.’

    망설이고 있는 국장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보상을 요구하진 않겠습니다. 제가 막무가내로 요청드리는 거니까요.”

    “나중에 딴소리 안 해, 라울. 걱정하지 마.”

    “그렇다면…….”

    퍼엉!!

    멀리서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인상을 잠시 찌푸렸던 라울 국장이 결심한 듯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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