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92화 (192/366)
  • 192화

    하미준 헌터의 말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는 내 얼굴을 보며 즐거운 듯 키득거리다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물을 다시 마셨다.

    ‘진짜 월척이다……!’

    하미준 헌터가 고유 스킬 때문에 국내외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네팔의 던전 관리국장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을 거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무기 만들어 줄 때까지만 해도 그냥 S급 헌터였는데, 취임 소식 듣고 정말 깜짝 놀랐지 뭐야.”

    “요즘도 연락하고 지내세요?”

    “어디 보자…….”

    하미준 헌터는 물컵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다시 살폈다.

    “취임 소식 듣고 내가 축하 문자 보내 준 게 마지막이네.”

    “그럼 1년 전이 마지막인 거네요?”

    “그런 셈이지.”

    1년이라. 연락을 하고 지냈다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사이라고 부르기도 미묘한 기간이다. 친한 친구 사이나 주기적으로 교류가 있던 것이 아니라서, 하미준 헌터가 다시 연락을 한다고 해서 관리국장이 호전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지는 않았다.

    “조슈아 군 만나러 갔을 때처럼 무기 수리해 준다고 하면 기꺼이 맞이해 주지 않을까?”

    “그땐 거의 일방적으로 쳐들어온 거 아니에요?”

    “뭐, 막무가내이긴 했지. 아무튼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훨씬 정중하고 정식적인 절차라고.”

    하미준 헌터가 무언가를 떠올리듯 손가락 끝으로 소파 팔걸이를 두드렸다.

    “안 되면 다른 핑계로 연결해 줄게. 뭐, SS급과의 만남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고마워요, 하미준 헌터.”

    “별말씀을. 세상을 구하신다는데 저도 숟가락 좀 얹어 봐야죠.”

    그의 존댓말이 어색해 잇새로 웃음이 샜다. 내 웃음에 그도 나를 따라 웃었다.

    ‘이렇게 서로 웃고 떠들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었는데 말이야.’

    98번째 회귀에서 나를 향해 도끼를 든 하미준 헌터와 눈앞의 하미준 헌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제 그에게서 서늘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자~ 그럼 바로 연락을 좀 해 볼까?”

    타다닥.

    하미준 헌터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핸드폰 화면을 두드렸다. 그동안 나와 최민 헌터는 소파에 기댄 채로 멍하니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바라보았다.

    “저는 좋은 동료였습니까?”

    “네?”

    그때 난데없이 최민 헌터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 여전히 샹들리에를 바라보고 있는 날렵한 옆얼굴이 있었다.

    “신지의 헌터가 겪어 온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최민 헌터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당신에게 폐를 끼치진 않았는지, 발목을 잡진 않았는지… 그리고 믿음직한 동료였는지 알고 싶습니다.”

    조율자로부터 벗어나서 웃는 것도 자연스러워지고 스스로를 갉아 먹는 것도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 같았다.

    텁.

    최민 헌터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려놓자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좋은 동료였어요.”

    “…….”

    “동료이기 이전에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요.”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커다래진 눈을 향해 한마디를 더 얹었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이전에 있던 모든 시간선을 포함해서.”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 입술을 뻐끔거리다 이내 꾹 다물곤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발언 결과 : 감동]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기운 좀 차렸으려나.’

    짝.

    그때 하미준 헌터가 손뼉을 쳤다.

    “분위기 좋은데?”

    “여, 연락은 해 봤습니까?”

    최민 헌터가 손을 훅 빼며 하미준 헌터를 향해 말을 뱉었다. 하미준 헌터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우리에게 핸드폰 화면을 들어 보여 주었다.

    영어로 돼 있어 내용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번갈아 뜬 말풍선을 보고 라울 국장과 연락이 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흔쾌하게 답장이 왔어. 역시 성격 좋은 양반이야.”

    “뭐라고 얘기했어요?”

    “으음, 일단 간단하게 안부부터 물어봤지. 요즘 게이트 폭발이 잦아서 매일 야근이라고 하네.”

    하미준 헌터는 핸드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내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무기 수리 얘기를 꺼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답장이 왔어. 지난 S급 게이트 수습할 때 흠집이 너무 많이 생겼다며 한 번 봐주면 고맙겠다고 하고 말이야.”

    “오…….”

    “일단 자세한 스케줄은 라울이 퇴근한 후에 다시 연락 주겠다고 했어.”

    탁.

    그가 인벤토리 안에 핸드폰을 넣었다.

    “그럼 그전에 저랑 하미준 헌터랑 먼저 일정을 잡아야겠네요.”

    “그렇지.”

    하미준 헌터는 아직 회복 중이니까 바로 출발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내가 미리 가서 상황을 살피고 나중에 그가 합류하여 라울 국장을 만나러 가는 방향으로 가야겠지.

    다른 사람들은 계속 국내에 있을 예정이니, 무슨 일이 생겨도 그들이 충분히 해결해 줄 수 있다.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네팔로 이동하는 게…….

    툭.

    그때 커다란 손이 내 등을 두드렸다. 생각에 잠겨 있는 터라 나도 모르게 몸을 파드득 떨었다. 곧바로 팔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하미준 헌터가 안쓰러운 듯이 웃고 있었다.

    “신지의 헌터, 마음이 급한 건 알겠지만 그래도 쉴 땐 쉬어야 해.”

    “그건 그렇죠…….”

    “저도 동의합니다. 진짜로 필요한 순간에 제힘을 못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럼 분명 신지의 헌터에게도 위험한 일이 벌어지겠죠.”

    최민 헌터도 하미준 헌터의 말을 거들었다. 충고하는 그의 얼굴이 꽤 단호했다.

    ‘나도 동의. 너 레일리랑 헤어지고 나서부터 하루도 안 쉬었잖아.’

    가만히 있던 자아까지 말을 덧붙였다. 머릿속을 징징 울리는 녀석의 목소리와 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 때문에 결국 고집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알겠어요… 하미준 헌터 몸 다 나으면 그때 출발하는 걸로 할게요.”

    “좋은 생각이야! 그 전에 갑자기 몸 근질근질하다고 파견 가면 안 된다?”

    “알겠어요.”

    하미준 헌터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이렇게까지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무리하는 건, 그들을 무시하는 거나 마찬가지겠지.

    삐빅.

    벽에 걸려 있던 전자시계가 4시를 알렸다. 하미준 헌터는 그것을 슬쩍 보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녁 먹기는 좀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식사하고 갈래?”

    “아, 그래도 되나요?”

    “안 될 이유가 있어?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하지.”

    하미준 헌터의 부드러운 음성에 쉴 새 없이 굴리던 머릿속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잠깐 숨 정도는 돌릴까.’

    그를 향해 양 엄지를 치켜들자 하미준 헌터가 낮게 웃었다. 간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오후였다.

    * * *

    ―네팔,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은 늘 그렇듯 사람들로 북적였다. 관광객들이 비싼 입장료에 혀를 내두르는 동안 붉은 망토를 뒤집어쓴 여자가 유유히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여자의 눈도 망토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그의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긋 쳐다보았지만, 전통 의복을 입은 사람들에 묻혀 금방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박타푸르도 다시 쿠마리 제도를 부활시킨다는데?”

    “와우, 토카 쪽에서 로컬 쿠마리 뽑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작하네.”

    “난 그거 별로야. 아동 학대잖아.”

    “신기해서 좋던데.”

    노점에서 파는 라씨를 먹던 학생들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떠들고 있었다. 붉은 망토의 여자는 그들을 스치다 걸음을 멈추었고, 주위에 있던 전봇대에 몸을 기댄 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야, 근데 쿠마리 하다가 갑자기 각성하면 어떻게 될까?”

    “오히려 인생 역전일 듯. 헌터들 돈 잘 번다며. 얼마 되지도 않는 연금 받는 것보다 훨씬 낫지.”

    까득.

    붉은 망토의 여자가 이를 갈았다. 그는 다시 광장을 지나쳐 시내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정돈되지 않은 번화가를 지나는 동안 수많은 소문들이 그의 귀에 꽂혔다. 소문의 주제는 대부분 쿠마리의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 제 역할을 다한 쿠마리들이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그들의 이야깃거리에 끼지도 못했다.

    “흐윽, 끅, 흐읍……!”

    그때 골목길 안쪽에서 어린 여자아이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붉은 망토의 여자는 몸을 돌려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겨우 집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작은 건물 앞에서 아이가 유리 조각을 든 채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유리 조각을 든 손이 반대쪽 손 주위를 배회하다 멀리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걸로 뭘 하려고?”

    “히익……!”

    탱그랑!

    아이가 유리 조각을 떨어트렸다. 여자가 아이에게 성큼 다가가 허리를 숙이더니 유리 조각을 주워들었다.

    “죽으려 했어?”

    “…그냥 상처만 내려고 한 거예요.”

    “왜?”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바즈라차르야, 샤캬. 둘 중에 어떤 것이 네 성이지?”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뻔하군.’

    여자가 다시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제 눈앞의 이 아이는 부모의 강요에 못 이겨 쿠마리 시험에 나가게 된 처지일 것이다. 그게 싫은 아이는 제 몸에 상처를 내 아예 신체검사가 포함된 첫 번째 시험에서 떨어질 생각을 한 것이고.

    여자는 유리 조각을 뒤로 던진 후 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긴 카트만두야. 다른 지역이면 모를까 이곳에선 쿠마리를 뽑지 않아.”

    “뽑는댔어요.”

    “누가 그러지?”

    “왕궁 주변 환전소 아줌마가요.”

    여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거기서 나오는 정보는 꽤 정확한 것인데.’

    수도의 쿠마리는 즉 로열 쿠마리를 의미한다. 로열 쿠마리가 부활하면 다른 로컬 쿠마리들도 함께 부활할 명목이 생긴다.

    바스락.

    여자는 망토 안쪽에 손을 집어넣더니 천 루피짜리 지폐 한 다발을 꺼내 아이에게 내밀었다. 아이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지더니, 누가 볼세라 그것을 한 번에 낚아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네 부모한테 3천 루피 정도를 줘. 멍청한 관광객들 길 안내해 주고 팁으로 받았다고 하고. 그럼 한동안 너한테 쿠마리 얘기는 꺼내지도 않을 거다.”

    “아줌마 부자예요?”

    “그리고 남은 돈으론 서점에서 책을 사. 공부가 싫다면 기술을 배워도 좋다. 뭐가 됐든 네가 먹고 살길을 찾아.”

    여자는 말을 쏘아붙인 후 그대로 몸을 돌려 골목 밖으로 발을 옮겼다.

    “고, 고마워요! 신의 축복이 가득하길!”

    아이의 감사 인사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고 여자는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타닥.

    여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왕궁의 옥상이었다.

    사아아악.

    동시에 여자의 주위로 검푸른 피부와 여러 개의 팔을 가진 여자가 나타났다. 그는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채로 붉은 망토를 입은 여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왜 나타나신 거죠.”

    “신의 축복이 가득하길 바란다는데, 그냥 넘어갈 수가 있어야지.”

    “하아…….”

    여자가 길게 한숨을 쉰 후 옥상 난간에 기대어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에 현 국왕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또다시 저 녀석의 꿈을 조종해 볼 셈이냐?”

    “…….”

    “안 된다는 건 확인하지 않았느냐.”

    “시도해 볼 순 있잖아요.”

    “신의 말을 듣지 않는 로열 쿠마리는 너밖에 없을 거야, 비스.”

    “전(前) 로열 쿠마리.”

    “그래, 알았다. 녀석 고집하곤.”

    파지직.

    비스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자 검은 스파크와 함께 길쭉한 형체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곧 현악기 ‘비나’의 모습이 되어 비스의 양손에 들렸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검은 물결이 되어 국왕을 향해 뻗어갔다. 국왕을 감싼 검은 물결은 다시 비스에게로 돌아와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해※당 개■체가 볼 꿈을 창★하시겠?????]

    펑!

    “큿!”

    하지만 얼마 못 가 문장이 터져나갔다. 비스가 뒤로 물러나며 한쪽 무릎을 꿇자 비나도 다시 그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포기하는 게 어떻겠느냐.”

    “못 해요. 아니, 안 할 거예요. 제가 살아 있는 한 더 이상의 쿠마리는 없습니다.”

    ‘역시 그 SS급을 죽이고 힘을 되찾아야 해.’

    후두둑.

    비스가 깨문 아랫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피가 그의 무릎까지 흘러내렸다. 그런 제 신도의 모습을 죽음과 파괴의 신은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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