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90화 (190/366)

190화

【신자(神者)】

―거 연락 한번 하기 엄청 어렵군.

집에 가자마자 전화를 걸었는데도 레일리는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도 일이 좀 있었거든.”

―어, 지의 자매님이에요? 오랜만이에요~

―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지?

―오우, 길드장님… 뭔가를 잊으신 것 같은데 여기 제 베란다랍니다?

―네가 오늘 안 들어온다길래 잠깐 빌린 것뿐이야. 왜 갑자기 돌아와서는…….

라파엘라와 레일리의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나는 외투를 벗어 옷장 안에 걸어 두었다.

‘차도윤 헌터는 괜찮으려나.’

탄환으로 억지로 정신을 붙잡아 두긴 했지만, 김강희가 또다시 흔들어 놓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일단은 계속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너 세빈이 기억하지?”

―세빈? 네 음침한 친구 말하는 건가?

“음침하다니.”

다행히 세빈이에 대한 기억은 완전히 정상화된 듯하다. 침묵이 잠시 이어지다 이내 레일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네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건 대충 모아 봤다.

우웅.

[(사진) ― 레일리]

통화 화면을 줄인 후 레일리가 보낸 사진부터 확인했다.

“여권이네?”

―할 말이 그것뿐이냐?

레일리의 핀잔을 들어가며 여권 사본을 한참 들여다보니 여권 주인은 전부 ‘비스’라는 여자들이었다. 얼핏 봐도 상당한 양이라 한 명씩 자세하게 살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네팔, 인도 국적의 비스들은 죄다 찾아본 것 같군.

“와… 어떻게 구했어?”

―왜 불법적인 경로로 구했을까 봐?

“그러지 않고서야 불가능하지 않아?”

―맞아. 그래서 불법적인 경로로 구했다.

레일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부탁한 거라 뭐라 하지도 못하겠네.’

잔소리를 일단 접어 두고 입을 다물자 레일리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너, 쿠마리가 뭔지 아나?

“대충 들어 본 것 같아. 그… 어린 애들 신으로 만드는 거 아니야?”

―정말 대충 들어 본 수준이군.

레일리가 혀를 차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바즈라 데비 신, 또는 두르가 신의 살아 있는 화신으로 숭배되는 어린 여자애들이다. 아주 까다로운 심사 과정을 거쳐 선발되지.

“근데 그거 이제 사라지지 않았어?”

―맞아. 10년 전쯤에 정부에서 쿠마리 제도를 전면 금지시켰다.

한창 뉴스에서 떠들던 것이 생각나 이야기를 꺼내자 레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최근엔 다시 부활시키려 하는 것 같더군.

“이제 와서 갑자기 부활시킨다고?”

―그래. 정부가 바뀐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레일리는 손가락을 튕기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비스의 이명이 ‘쿠마리’라고 하니 그가 진짜로 쿠마리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더군.

“그렇겠네.”

―쿠마리의 조건 중 하나는 아이의 성이 ‘샤캬’나 ‘바즈라차르야’여야 한다. 그래서 그런 성을 가진 녀석들을 다시 추리면.

우웅.

[(사진) ― 레일리]

―뭐, 이 정도.

레일리가 다시 보낸 사진을 확인해 보니 20장 가량으로 추려졌다.

―놀랍게도 사진에서 윗줄이 전부 쿠마리 출신이더군.

“절반이나?”

―그래. 지역 쿠마리까지 다 합쳤을 때의 얘기지만 말이야.

사진을 확대해 쿠마리 출신의 사람들을 먼저 살펴보았다. 연령대와 생김새가 천차만별인데다가 낯이 익은 얼굴도 없었다.

‘적어도 하미준 헌터 나이 정도는 됐던 것 같은데.’

비스는 좀처럼 자신을 노출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시간선에서 그를 만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보니 사진을 보고서도 단번에 그를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저기 중앙에 있는 비스 바즈라차르야는 다르지.

머리가 지끈거릴 때쯤, 레일리가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말에 사진의 정중앙으로 시선을 옮기니 마른 체격에 나른한 인상을 가진 여자의 사진이 있었다.

레일리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쟤만 유일하게 로열 쿠마리였어.]

“로열 쿠마리?”

―그래. 지역 쿠마리가 아니라 왕실 사원에 소속된 쿠마리란 소리지.

“아, 왕이 있구나.”

―중간에 잠깐 사라지긴 했지만 50년 전쯤 다시 부활했다. 뭐, 종교적인 것만 신경 쓰고 정치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더군.

나는 다시 그 쿠마리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과 나이 말고는 여권으로 알 수 있는 정보가 얼마 없었다.

“이 사람 관련으로 다른 정보는 없어? 뭐, 뉴스에 나온 거라든가.”

―쿠마리로 선정됐을 때를 제외하곤 알려진 정보가 없어. 제 발로 걷지도 못하게 하니까 공식 행사를 제외하곤 얼굴을 비칠 일이 거의 없지.

“하아… 뭔 인형도 아니고.”

레일리도 한숨을 길게 쉬며 소파 등받이에 등을 완전히 기대었다.

―아무튼 비스에 대한 정보는 이 정도야. 뭐, 생각나는 게 있나?

달그락.

그는 탁자 위에 있던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비스랑 만난 적은 끽해야 서너 번 정도라서 아직은 잘 모르겠어. 눈에 띄는 특징도 없었고 말이야.”

―흥, 아쉽게 됐군.

“그래도 고마워. 덕분에 후보를 많이 줄일 수 있게 됐잖아.”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기쁨]

베란다 밖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내 쪽으로 홱 돌아왔다. 갑자기 화면 너머의 레일리의 황금색 눈과 시선이 마주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래, 고마워해라. 내가 아니면 이런 정보를 가져다줄 인간도 없잖아.

“맞아.”

거만한 대답이지만 그가 느낀 감정은 순수했다. 얘도 퍽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아, 혹시 칼리의 창도 알아봤어?”

―대충 어떤 건지 파악한 정도?

“간단하게 얘기해 줘.”

―하, 이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을 비서로 부리는 녀석은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다.

탁.

퉁명스럽게 대답한 레일리가 커피잔을 내려놓은 후 인벤토리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칼리의 창, 게이트 오픈이나 폭발처럼 민간인 지역에서 피해가 발생할 때마다 갑자기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무기. 공식 명칭은 아니지만 현지인과 언론에선 위와 같이 부르고 있다… 라고 하는군.]

“최근에 나타난 적도 있어?”

―제일 최근은… 오, 일주일 전이군.

“진짜?!”

―이쪽 지역은 하도 관리가 안 되니까 말이야. 링크 보냈으니까 확인해.

레일리에게서 온 링크를 클릭하자 영어로 된 기사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곧바로 번역 버튼을 누르자 알파벳이 하나둘씩 한글로 바뀌었다.

[속보]

―칼리의 창, 룸비니 지역 C급 게이트 폭발 사고를 수습하다

[네팔 룸비니 지역에서 현지 시간 새벽 4시에 C급 게이트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마야대비 사원 근처에 위치한 해당 게이트는 일반 몬스터 ‘수도승’, 보스 몬스터 ‘대불상’이 서식 중이며 폭발 당시 일반 몬스터가 빠져나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던전 관리국이 상황 파악 후 곧바로 소속 헌터들을 파견하였으나 유출된 몬스터는 ‘칼리의 창’으로 해치워진 상태였다. 소환된 ‘칼리의 창’은 헌터들이 도착한 직후 사라졌다.]

[현재 룸비니 C급 게이트는 소멸한 상태이다. 관리 당국은 ‘칼리의 창’에게 거액의 보상을 약속하며 국가 소속 헌터직을 제안하고 있다.]

위험한 순간일 때마다 나타나서 상황을 순식간에 해결하는 헌터라. 국가 입장에서는 꽤 탐나는 인재이긴 할 것이다.

―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지 모르겠군. 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인가?

“책임이 없는 것 치고는 꽤 정의로운 편 아니야? 최근까지도 계속 활동하고 있는 걸 보면 엄청 나쁜 사람일 것 같진 않은데.”

―글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녀석이라서 말…….

그때 레일리가 말을 뚝 멈췄다. 영상 통화 화면을 다시 크게 키우고 그를 바라보자 그는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떠올리려 애쓰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창조자 놈이 네 얘기를 하러 모든 사도들을 소환시킨 적이 있었다.

“그때 비스도 있었어?”

―어. 그리고 네 존재 때문에 우리 모두의 힘에 이상이 생긴 이야기를 했지.

레일리가 천천히 눈을 뜨곤 나를 바라보았다.

―’쿠마리’… 그러니까 비스는 사람들의 꿈을 조종할 수 없다고 했다.

“…꿈?”

도대체 창조자에게 어떤 소원을 빌었길래 그런 힘을 얻은 거지? 그리고 그 힘을 받음으로써 비스가 짊어지게 된 업의 내용도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이것까지 함께 알아보면 좋을 것 같군.

“가능하겠어?”

―우리 길드원 중에 네팔에서 공부를 오래 한 녀석이 있다. 그 녀석에게 온갖 사이트를 다 털어 사소한 것까지 전부 보고하라고 했으니 비슷한 내용이 하나쯤은 있겠지.

레일리가 어느 틈에 가져왔는지 모를 쿠키를 뜯어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었다.

‘이만하면 꽤 양질의 정보가 모인 것 같네.’

아직 알아볼 건 산더미지만 레일리가 아니었으면 이 정도도 모으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거만하기까지 한 동료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허, 웃냐?

“재밌어서. 몇 달 전만 해도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가문의 영광으로 알도록.

고개를 끄덕여 주니 레일리도 만족했다는 듯 이를 보이며 웃었다.

―생각보다 통화가 길어졌군. 조만간 또 연락하지.

“알겠어. 몸조심해.”

―너나 신경 써라.

또롱.

발랄한 효과음과 함께 레일리와의 통화가 끝났다.

“으으윽…….”

뻐근한 몸을 쭉 뻗어 스트레칭을 하자 온몸의 관절이 울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사도는 둘. 예상되는 지옥도의 등장 시점은 내년 겨울.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상황이 달라진 만큼 창조자 쪽에서도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른다.

‘김강희가 세빈이를 사전에 제거하려 한 것처럼.’

지금까지 보아 온 김강희는 세상이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멀리서 지켜보며 즐기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세상을 무너트리려 안달난 것처럼.

이건 기회다. 조바심이 난 김강희가 악수를 둘 기회. 그 기회를 파고들어 그의 계획을 완전히 무너트리고 이번에야말로 세상을 구해 낼 것이다.

타닥.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업무용 핸드폰을 꺼내 곧바로 헌터넷을 켰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해외 헌터들의 상황을 잘 알고 있고, 소문과 정보에 빠삭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계획을 알아도 되는 사람.

‘그럼 역시 이 사람밖에 없겠지.’

나는 화면을 두드려 그 인물에게 문자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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