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망할, 제일 중요한 걸 까먹었잖아!’
김강희의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내가 회귀자라고 밝히는 것에만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이 사실이 누구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는지 말하는 것을 잊었다.
녀석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신지의 헌터, 안색이 좋지 않군. 전투가 격렬했나?”
“그…런 편이었죠.”
아무렇지 않게 대꾸해야 하는데, 얼굴 근육이 말을 듣질 않았다. 어색하게 뱉은 대답에 김강희가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짓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여기서 나의 회귀나 세빈이가 몬스터가 됐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꼬인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금 있었던 일들을 전부 말하지 말라는 신호를 줘야 하는데, 김강희가 앞에 있는 탓에 그것도 쉽지 않았다.
“고생했네. 어떤 던전이었…….”
그때 김강희가 말을 뚝 멈췄다. 갑작스러운 정적에 시선을 옮겨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향한 곳은 내 옆에 서 있던 세빈이였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세빈이를 가만히 응시했고, 이따금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뭐지?’
김강희의 시선을 받는 세빈이의 얼굴 역시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검은 눈동자는 빛 하나 없이 건조한 흑색을 띠고 있었고, 입으로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냥 평범한 S급 던전이었습니다. 몬스터도 쉽게 해결했고요.”
“…그랬나?”
“네.”
“다행이네. 그래, 아주 다행이야…….”
세빈이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목소리로 거짓을 뱉었다. 그 말에 내 뒤쪽에 서 있던 차도윤 헌터가 숨을 훅 들이켰다. 고개를 살짝 틀어 차도윤 헌터와 눈을 마주쳤다.
‘일단 가만히.’
입 모양으로 그에게 신호를 주자 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건지, 원.’
세빈이를 대하는 김강희의 태도가 명백하게 이상했다. 그는 여전히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세빈이를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고, 세빈이도 묘하게 날이 선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김강희의 기억에서도 세빈이가 사라졌다 다시 돌아왔다면 그는 던전 밖에 있던 헌터들처럼 행동해야 한다. 헌터 ‘강세빈’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 김강희는 그들과 달랐다. 세빈이를 보는 그의 눈은 당혹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말을 한참 고르느라 입술이 분주했다.
쿠구궁.
우리와 김강희 사이에 기묘한 정적이 돌 때쯤 세빈이가 있던 게이트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먼지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이트에 김강희의 시선이 그것으로 옮겨 갔다.
“일반 던전으로 남지도 않고 바로 사라지는 형태라. 누가 설명 좀 해 주겠…….”
“회장님, 자세한 사항은 내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때 최민 헌터가 입을 열었다. 그도 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는지 일단 세빈이와 김강희를 떨어트려 놓을 셈인가 보다. 그가 눈동자를 굴려 나를 슬쩍 보자, 나도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얹었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한진우 헌터 덕분에 웬만한 치료는 끝났지만, 아직 몸에 쌓인 피로도가 안 풀렸거든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김강희’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분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세빈이와 김강희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지의야, 할 말 있는데 일단 우리 집으로 같이 갈까? 차는 내가 불러 놓을게.”
“…그래.”
세빈이가 김강희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후 그를 그대로 지나쳐 먼저 자리를 떴다.
바스락.
‘응?’
세빈이가 김강희를 완전히 지나쳤을 때 갑자기 뒤를 돌아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러곤 검지손가락을 자신의 입 앞으로 가져왔다.
쿵.
그 모습에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수준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명백한 충돌.’
내가 알고 있는 세빈이는 갈등이 있었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다. 지금처럼 모두에게 보여 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 저도 먼저 가 보겠습니다! 스킬을 너무 많이 써서 컨디션이 좀…….”
그 모습을 본 한진우 헌터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 도망치듯 떠난 터라 김강희가 뭐라 말을 덧붙일 새도 없었다.
툭.
이번엔 하미준 헌터가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강세빈 헌터한테 듣고, 나중에 전달해 줘.”
그는 곧장 허리를 편 후 김강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뭐, 급할 거 없잖아요? 나중에 전체 회의나 한번 잡죠. 제가 근사한 일식집을 알거든요.”
“…자네 말이 맞네. 이번 현상은 연구팀한테 맡기고 우리는 나중에 이야기하는 걸로 하지.”
김강희가 미소 짓자 하미준 헌터도 생글생글 웃곤 자리를 떴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최민 헌터도 작은 목소리로 내게 이야기한 후 자신의 리무진 쪽으로 발을 옮겼다.
‘남은 건 나랑 차도윤 헌터 뿐이군.’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흘긋 보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세빈이의 경고, 김강희를 앞에 둔 주변 사람들의 태도, 그리고 그가 김강희에게 갖고 있는 일방적인 충성심. 그 모든 것들이 한군데에 섞여 차도윤 헌터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는 듯했다.
‘계속 김강희한테 휘둘리게 둘 순 없지.’
“아, 차도윤 헌터.”
내 말에 그가 순간 움찔거리자 나는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덧붙였다.
“세빈이랑 무슨 말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죠.”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차도윤’이 동요한다.]
차도윤 헌터와 김강희를 단둘이 두지 않으려 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분명 김강희는 달콤한 말로 속여 차도윤 헌터에게 그 안에서 있던 일들을 이야기하게 만들 테니까.
차도윤 헌터는 내 말의 의도를 눈치챈 듯했지만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런 선수를 쳤군. 나도 차도윤 헌터한테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었는데 말이야.”
“네? 아, 그…….”
김강희도 쉽게 넘어가진 않았다. 차도윤 헌터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잠시 대답을 미루다 결심한 듯 김강희를 바라보았다.
[발언 결과 : 불안]
“강세빈 헌터와 먼저 이야기하고 나서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차도윤 헌터의 대답이 거절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말을 한 차도윤 헌터조차 매우 불안해 보였지만, 일단 지금 당장 단둘이 있을 위험은 피한 덕분에 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래?”
“어, 얼마 안 걸릴 거예요!”
“아하하, 그렇게 급하게 대답할 것 없네.”
김강희가 눈을 반으로 접으며 웃다 이내 부릅떴다. 푸른 눈동자가 모든 것을 얼려 버릴 것처럼 차가워져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올라왔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경험이겠지.’
미래를 볼 수 있는 스킬과 함께 모두의 신임과 존경을 받으며, 세상을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던 그에게 있어 지금 이 상황은 아주 모욕적일 것이다. 세빈이를 향해 먼저 달려가는 차도윤 헌터를 따라가며 곁눈으로 김강희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에 말 못 할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 * *
끼익.
“한동안 못 들어왔더니 집이 너무 싸늘하네.”
“…너 여기 혼자 사는 거 맞아?”
“응? 당연하지.”
리무진에서 내려 대문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2층짜리 단독 주택인 줄 알았는데, 들어와 보니 궁궐이 따로 없었다.
‘이번에도 이 집 안에 벙커가 있는 건가.’
98번째의 세빈이 했던 말이 문득 생각이 나, 나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삑.
내 주의를 환기시키듯 세빈이가 리모컨을 누르자 어두웠던 실내에 순식간에 불이 켜져 거실 내부가 훤히 보였다. 커다란 창이 나 있는 넓은 거실엔 깔끔하게 정돈된 소파와 낮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대충 편하신 곳에 앉으세요. 길게 얘기할 건 아니니까.”
세빈이가 내 옆의 차도윤 헌터를 보며 말했다. 당연하게도, 그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끼익.
나와 차도윤 헌터가 소파에 앉을 동안 세빈이는 창가에 기대었다. 밖이 어두운 탓에 유리창에 그의 뒷모습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회장님과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차도윤 헌터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세빈이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기억을 되살리는 듯한 행동을 했다.
“정신이 없어서 잠깐 잊고 있었는데, 회장님 얼굴을 보자마자 갑자기 생각이 나더라고요.”
세빈이의 시선이 차도윤 헌터 쪽으로 도로록 옮겨갔다.
“제가 던전에 떨어졌을 때 그 앞에 회장님이 있었다는 걸요.”
“뭐라고?!”
“뭐라고요?”
나와 차도윤 헌터가 동시에 소리쳤다.
‘김강희……!’
그가 지옥도가 열리기 전에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제거하려고 했던 건 이번이 처음이다. 헌터들끼리의 결속을 강조하던 그가 먼저 헌터를 공격하다니,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 속을 뒤집어 놓는 건 성공했다.
“제가 떨어지는 걸 지켜보시기만 하더라고요.”
“…….”
“뭐, 연세도 있으시고 전투계도 아니시니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세빈이가 팔짱을 끼며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하지만 제가 그 안에서 사라질 동안 다른 사람들한테 말 한마디 안 한 건 이상한 일이죠.”
옆에 있던 차도윤 헌터가 숨을 훅 들이켰다. 그는 이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그럴 리가…….”
“차도윤 헌터.”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그가 눈을 크게 뜬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충격 받은 그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는 말을 하게 되어 가슴이 쿡쿡 쑤셨지만 그럼에도 진실을 말해야만 했다.
“세상의 종말을 초래한 건 김강희 회장이 맞아요.”
“…….”
“그리고 그건 지금도 변함없는 사실이고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차도윤’이 동요한다.]
차도윤 헌터가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자신의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발언 결과 : 절망]
굳이 상태창으로 알려 주지 않아도 그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 힘들어 잠깐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그냥 나쁜 인간인 줄 알았더니 종말의 원흉이기까지 하네.”
세빈이가 짧게 말을 덧붙였다.
“근데 그걸 알면서 왜 살려 두고 있는 거야?”
“그 인간이 갖고 있는 파급력이 워낙 커서 그렇지. 지금 당장 협회장 공백을 어떻게 채우려고.”
세빈이는 납득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시선을 옮겨 차도윤 헌터를 바라보았다. 산산조각이 난 정신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는 듯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상태창을 켜서 갖고 있는 탄환들을 살폈다.
[사출 가능 탄환]
<수용> 표적이 수용하게 만든다.
[귀속 무기 ‘자아’를 통해 사출하지 않으면 효과가 반감됩니다. 그래도 사출하시겠습니까?]
마음속으로 조용히 수긍하자 차도윤 헌터의 어깨 옆에 새하얀 표식이 생겼다.
“지금 당장 믿으라고 강요하진 않을게요.”
“…….”
“하지만 언젠가 실감하는 날이 올 거예요.”
텁.
차도윤 헌터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흘긋 바라보았다.
“차도윤 헌터가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하러 오는 사람은 김강희 회장이 아니고, 그쪽 옆의 동료라는 걸요.”
[수용의 탄환 사출]
[표적 : 각성자 ‘차도윤’]
새하얀 탄환이 그의 몸에 흡수되었다. 눈물로 잔뜩 충혈된 눈동자에 약간의 생기가 돌았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펴 소파 등받이에 기대곤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신지의 헌터의 정체도 일단 비밀로 해야 하는 거죠?”
“네. 무조건 비밀로 해 주세요.”
차도윤 헌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숨을 쉬어 호흡을 골랐다.
‘다른 헌터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알려 주면 되겠지.’
가장 혼란스러워할 차도윤 헌터를 탄환까지 써 가며 간신히 이해시켰다. 완전히 받아들이진 못한 것 같지만 그를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우웅.
“음?”
그때 인벤토리에 넣어 둔 개인 핸드폰이 울렸다. 그것을 꺼내 알림창을 확인하자 뜻밖의 인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칼리의 창 관련으로 할 얘기가 있다 ― 레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