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88화 (188/366)

188화

【수적천석】

세상이 세빈이의 존재를 완전히 복구한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동시에 그에 대한 모든 것이 뇌에 스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괜찮나?!’

그제야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생각나 급하게 몸을 돌려 녹두가 있던 곳으로 달렸다. 녹두의 배리어는 내가 안에 있어야만 치료 효과가 발동되기 때문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만 받았을 뿐 부상은 그대로일 것이다.

“다들 괜찮…….”

“신지의 헌터!”

그때 뜻밖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불투명한 배리어를 앞에 두고 선 채 천천히 숨을 고르자 그 안에 있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한진우 헌터……?”

기절해 있던 한진우 헌터가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무사하셨군요!”

“갑자기 사라져서 어디 갔나 했네….”

차도윤 헌터와 하미준 헌터도 조금 긁힌 상처를 제외하고는 멀쩡해 보였다.

“신지의 헌터, 괜찮습니까?”

제일 크게 부상을 입었던 최민 헌터 역시 나를 보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켜 배리어의 벽면으로 다가왔다.

키이잉.

녹두가 배리어를 해제하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내 쪽으로 달려왔다.

‘언니이…….’

녹두는 연이은 전투와 스킬을 사용한 탓에 상당히 지쳤는지 어리광을 부리며 내 손에 머리를 비벼왔다.

“고마워, 녹두야. 수고 많았어.”

부드러운 털을 양손으로 쓰다듬어 주자 녀석이 조금 슬퍼 보이는 얼굴로 나를 빤히 보았다.

‘우리… 아까까지 세빈이 언니랑 싸우고 있던 거지?’

녹두의 기억도 원래대로 돌아왔나 보다. 녀석은 나와 내 뒤쪽에 있을 세빈이를 흘긋 바라보았다. 잔뜩 풀이 죽어 귀를 축 내리고 있었다.

녹두뿐만이 아니라 지금 이 공간 안에 있는 모두가 방금 벌어진 일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서로가 무사한 걸 보고 안심하긴 했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기억에서 세빈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타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눈치였다.

“죄송합니다.”

그때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세빈이가 허리를 숙였다. 그의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세빈이에게 꽂혔다. 무거운 침묵이 한참 이어질 때쯤 하미준 헌터가 세빈이의 어깨를 툭 쳤다.

“지금은 사과보다 설명이 필요할 때야.”

“…….”

“그리고 강세빈 헌터만 사과할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미준 헌터의 말에 세빈이가 다시 허리를 폈다.

‘어색하네.’

당시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방금 전까지 서로를 향해 무기를 들이밀었던 터라 분위기가 영 불편해졌다.

“하미준 헌터랑 카페에서 헤어지고 나서 갑자기 발밑에 게이트가 열렸어요.”

“뭐? 신지의 헌터랑 비슷한 상황이잖아?”

아니다. 내가 던전에 빠진 건 창조자의 실수 때문이었지만,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빠지는 건 처음 벌어진 일이다. 눈을 크게 뜬 채로 세빈이를 바라보았다. 세빈이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덧붙였다.

“맹독으로 가득 찬 던전이라서 ‘무아’를 쓸 수밖에 없었어요. 시전 시간이 길어져서 제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거고요.”

“…그 부작용이 진짜로 실현 가능한 걸 줄이야.”

“그, 그런 부작용이 있었어요?”

잔뜩 당황한 한진우 헌터를 향해 세빈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빈이의 무아가 은신계 스킬 중 단연 최상급 스킬인 만큼 부작용도 상상 이상이었다. 세빈이의 존재가 사라진 몇 번의 시간선에서도 그 스킬이 원인일 것이라는 추측은 했지만, 한편으로는 의심하기도 했다. 개인의 스킬 하나가 모든 사람의 기억을 조작할 정도의 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힘드니까.

세빈이가 그 이후로 이야기한 것은 아까 내게 말한 것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몬스터의 형태로 세상에 남겨진 그를 다시 인간으로 돌리기 위한 힘이 내게 있기 때문에, 세빈이는 내가 자신을 떠올릴 수 있도록 노력했다.

‘과정이 험난해서 그렇지 어쨌든 성공은 했네.’

“강세빈 헌터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상한 점이 있는데.”

세빈이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차도윤 헌터가 입을 열었다.

“그 힘이 어떻게 신지의 헌터에게 있는 거죠? 저희가 모르는 스킬이라도 있는 건가요?”

이젠 내 쪽으로 시선이 꽂혔다.

“그건…….”

긴장감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내 말이 가져올 결과가 두려워서일까.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겨내야 해.’

그들이 진실을 알고 떠난다 하더라도, 그걸 감내하는 건 오로지 나의 몫이다.

까득.

치아끼리 부딪혀 소리가 났다. 난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사람들과 시선을 한 번씩 맞췄다.

“제가 회귀자라서 그래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당혹]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크게 동요했다. 내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걸 몰랐던 한진우 헌터와 차도윤 헌터는 물론, 무슨 말을 해도 믿을 것 같던 최민 헌터와 하미준 헌터까지. 모두 두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게 말이 돼요?”

차도윤 헌터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약간 날이 선 듯한 그의 목소리에 오히려 자신이 더 놀랐는지 어깨를 흠칫 떨며 말을 덧붙였다.

“그,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그렇죠.”

태연하게 대답하자 차도윤 헌터의 미간이 더욱 깊어졌다.

“차도윤 헌터, 제가 그때 왜 테이블 위에 있던 유자차를 마시려고 했을까요?”

“유자…? 아, 잠깐.”

‘기억났나 보네.’

그는 사색이 된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나와 자신의 모친 사이에 있던 일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도윤 헌터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온몸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이번엔 약병을 보고 알았지만 지난번엔 뉴스로 알았거든요.”

“지난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차도윤 헌터가 더 잘 알 것이다. 자신을 낳은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이 한 번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미준 헌터와 최민 헌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도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신지의 헌터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믿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엄청난 소리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네.”

하미준 헌터가 중얼거렸다.

“레일리랑 조슈아와 동료가 된 것도 다 제가 의도한 거예요.”

“하지만 노블레스 쪽에서 납치한 것까지 의도할 순 없을 텐데?”

하미준 헌터는 제법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날카로운 그 눈과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맞아요. 그건 레일리의 돌발 행동이었죠.”

“…….”

“하지만 조슈아와 있던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계획한 일이에요. 거기엔 이의 없죠?”

“그래.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말의 씨앗이 개화한 상태라 쉽게 넘어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설득시키는 게 쉽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걸 보는 것 같단 말이야.”

그때 하미준 헌터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

나는 조용히 오른쪽 눈을 감은 채 그의 상태창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무기 비문 : 네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들.]

그리고 오직 그와 나만이 볼 수 있는 문장을 눈에 담았다.

“네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들.”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하미준’이 동요한다.]

“그걸 어떻게…….”

[발언 결과 : 당혹]

하미준 헌터는 누가 보아도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하미준 헌터가 전에 말했잖아요. 제가 다른 사람들은 못 보는 걸 보는 것 같다고.”

“…….”

“왜 볼 수 있겠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살았으니까 그렇죠.”

얼어붙은 분위기를 무마해 보려 애써 웃었지만 하미준 헌터의 표정은 오히려 심각해졌다.

“한진우 헌터.”

“네, 네?!”

“혹시 미래 씨랑 같이 다니는 아자디바르 남매, 기억하세요?”

한진우 헌터가 몸을 파드득 떨며 대답하다 내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당연하죠! 신지의 헌터가 데려온 사람들이잖아요…….”

“그 친구들은 지난 시간선에도 그 연구를 성공시킨 천재들이에요.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전부.”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걸 몰랐다면, 제가 무슨 배짱으로 걔들을 미래 씨에게 데려갔겠어요.”

한진우 헌터가 입을 꾹 다물었다. 고작 19살의 쌍둥이 남매를 학계 거물에게 데려간 내 행동을 다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사람은…….’

“최민 헌터, 감천 B급 던전에서 제가 죽는 꿈을 꾸신다고 했었죠.”

내 말을 들은 최민 헌터의 눈썹이 움찔거리는 동시에 옆에 있던 세빈이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 이외에 그런 현상을 겪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감천 B급 던전에서 추락으로 한 번, 경포대 게이트 폭발 때는 히든 몬스터 공격으로 한 번, 그리고…….”

“그만.”

최민 헌터의 눈앞에서 죽었던 모습을 읊자 그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를 저지했다. 질끈 감은 눈을 보는 것이 안쓰러워 일단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요. 상처 주려고 말한 건 아니었어요.”

“압니다.”

최민 헌터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 회귀를 증명할 방법이 이렇게 잔인한 수단밖에 없다니.’

어찌 됐든 설득은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불쑥 다가온 진실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무겁게 내려앉는 공기에 목 깊은 곳이 바싹 말랐다.

“저는…….”

그때 최민 헌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바닥에 두었던 시선을 옮겨 그를 바라보았다.

“신지의 헌터가 회귀자든 다른 존재이든 상관없습니다.”

“…….”

“어떤 존재든 끔찍했던 죄의식 속에서 저를 구해준 신지의 헌터임에는 변함이 없으니까요.”

그 말을 하는 최민 헌터의 눈빛이, 미식가의 파편을 해결하고 난 후 나를 만나러 왔던 그 눈빛과 닮아 있었다. 나에 대한 강한 신뢰와 그 신뢰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눈빛.

텁.

이번엔 세빈이가 내 손을 잡았다. 고개를 올리자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미소 짓는 얼굴이 있었다. 말하는 동안 터질 듯이 뛰던 심장이 서서히 제 속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저, 저도요. 아직 그… 살려 준 빚도 못 갚았으니까.”

차도윤 헌터도 허겁지겁 말을 얹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묘하게 붉어진 얼굴에서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툭.

내 앞으로 불쑥 다가온 하미준 헌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솔직히 말하면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

“…….”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

부드러운 미소가 나를 향했다.

“저, 저도 하미준 헌터랑 같은 생각이에요!”

한진우 헌터는 양손을 꽉 말아 쥔 채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신지의 헌터가 회귀자든 뭐든 저희 동료라는 건 변하지 않잖아요!”

“한진우 헌터…….”

“그러니까, 믿을게요!”

한진우 헌터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좋아하는 성격은 변함이 없었다. 그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잇새로 웃음이 샜다.

“그런데 신지의 헌터는 어쩌다 회귀를 하게 된 거야?”

그때 하미준 헌터가 본질을 꿰뚫는 질문을 던졌다. 그를 흘긋 본 후 다시 고개를 돌려 모두를 바라보았다.

“세상이 ‘지옥도’라고 하는 게이트 때문에 망했거든요.”

“지옥도?”

“네. 소멸했거나 이미 존재하는 게이트들을 전부 합친 형태의 게이트예요.”

모두가 몸을 움찔 떨었다.

“지옥도로부터 세상을 구해 보려고 별짓을 다 했어요. 결국 다 실패하고 지금까지 와 버렸지만.”

“…….”

“그래도 이번엔 달라요.”

무거운 분위기를 깨기 위해 조금은 희망적인 말을 던졌다.

“지난 시도들의 오점을 바로잡으면서 그 누구도 희생당하지 않게 했으니까요.”

‘적어도 지금까지는.’

뒷말을 삼켰다. 여전히 내겐 회귀자의 업이 쌓여 있고 그 업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세상은 내게 희생을 강요할 것이다.

그전까지 방법을 찾아야 한다. 98번째의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할 방법을.

쩌적.

그때 던전 전체에 생겼던 금이 점점 더 영역을 넓히며 소멸할 준비를 했다.

“일단 나가자. 종말에 대한 건 나중에 우리 집에서 이야기하자고. 신지의 헌터, 괜찮지?”

“네.”

하미준 헌터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 보이곤 게이트 출구 쪽으로 발을 옮겼다.

‘일단 필요한 말은 다 한 것 같은데 말이지.’

말의 힘에 대한 건 지옥도 얘기할 때 같이 꺼내면 된다. 내가 회귀자라는 사실도, 그리고 회귀하게 된 이유까지 말했으니 기본적인 정보는 다 전달한 건데, 묘하게 가슴 한구석이 찝찝했다.

터벅.

부서지는 던전을 뒤로한 채 모두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헌터들이 밝은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하며 허겁지겁 기력 회복제를 가져다주었다.

“몬스터는 해치우신 건가요?”

“네. 저 게이트는 아마 소멸할 거예요.”

“아, 일반 던전으로 바뀌는 게 아니고요?”

“네.”

헌터에게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대화를 마무리를 했다. 그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나를 지나쳐 갔다.

‘세빈이가 몬스터였다는 사실을 전부 모르고 있군.’

세빈이와 전투를 치렀던 헌터들도 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각성자 ‘강세빈’이라는 개념이 모두의 머릿속에 다시 자리한 것이다.

“다행히…….”

“아, 자네들!”

쿵.

부드러운 음성이 귀에 꽂혔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 불쾌함의 원인을, 그리고 내가 무엇을 빠트렸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회장님!”

바로 김강희의 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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