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86화 (186/366)

186화

구청장 배 육상 대회의 선발 선수가 공개된 후 육상부 아이들의 모든 대화 주제는 지의와 연희였다.

“왜? 지의가 기록 제일 좋잖아. 훈련도 매번 성실하게 나오고.”

“낸들 아냐. 코치님이 다 뜻이 있겠지.”

“그래도 지의가 더 빠르잖아!”

같은 트랙을 도는 지의에게 그들의 말이 안 들릴 리가 없었다. 지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일정한 속도로 달릴 뿐이었다.

“어제 코치님이 불러서 말한 게 그거야?”

혜연이 조용히 다가가 말을 걸자 지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혜연이 입을 쩍 벌리며 온몸으로 자신의 경악을 표현했다.

“내가 그냥 양보한 거야. 졸업 전에 우승 전적 하나 있는 게 좋으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경기 나가서 이길 사람을 보내야지.”

“난 내년에 나가면 돼. 괜찮아~”

지의가 혜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밝게 웃곤 그대로 속도를 내 가장 빠르게 달려 나갔다.

“연희 네가 스타트가 빠른 편이니까 속도를 유지하는 작전으로 가야 해.”

“네.”

“오늘이랑 내일은 체력 위주로 가자. 그리고…….”

트랙 한쪽에선 코치와 연희가 이야기를 나누며 경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의의 시선이 그들에게 잠시 머물다 이내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누군가에게 양보를 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자신보다 연희가 더 간절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느새 지의의 가슴 한편을 차지했다. 미련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가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릴 뿐이었다.

“지의야!”

“응?”

지의가 트랙 시작점으로 돌아왔을 때, 학교 안에서 갈색 머리칼을 가진 여학생이 뛰어나왔다. 가슴에 달린 명찰엔 ‘강세빈’이라는 이름이 가지런히 수놓아져 있었다.

지의는 그를 보자마자 약간 놀란 얼굴을 하다 이내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입을 벌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너 방과 후 수업 있다고 했지?”

“응. 훈련 언제 끝나?”

“나야 아직 멀었지.”

“같이 가려고 했는데, 아쉽다.”

세빈이 입을 비죽거리자 지의가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의가 다시 손을 내릴 때쯤 세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구청장 배 대회, 안 나가는 걸로 결정된 거야?”

“…어?”

세빈의 입에서 그 주제가 나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건지 지의가 눈을 크게 떴다. 세빈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사실 어제 너랑 코치님 만났을 때 나도 선생님 심부름 때문에 잠깐 남아 있었거든.”

“아, 아~ 그랬구나. 하하하, 아 씨, 좀 쪽팔리네…….”

지의가 괜히 크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하지만 세빈은 그런 지의를 보며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괜찮아! 코치님 말대로 내년엔 나한테 기회가 올 테니까. 그리고 연희 언니도 엄청 잘하는 사람이야! 이번에도 기록이…….”

“지의야.”

텁.

세빈이 지의의 양손을 잡았다. 찬물로 씻은 것 같은 차가운 손이 닿자 지의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지의가 맞잡은 손에서 자신의 소꿉친구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항상 웃는 눈이던 세빈의 눈매가 제법 매서워져 있었다.

“뭐, 뭐야, 갑자기?”

지의가 어색한 미소를 짓자 세빈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너 그 대회 나가고 싶다고 했잖아.”

“…그랬었지.”

“왜 포기한 거야? 코치님한테 다시 생각해 달라고 말이라도 했으면……!”

“부탁하고 그런 거, 내 성격에 어떻게 하겠어.”

툭.

지의가 세빈의 손을 놓으며 자포자기한 듯 중얼거렸다.

“연희 언니가 나보다 대회 성적이 더 간절한 거 뻔히 아는데 욕심부리고 싶지 않아.”

“…….”

“나 이제 다시 훈련 가 봐야겠다. 나중에 톡 할게!”

지의가 세빈의 어깨를 두드린 후 도망치듯 트랙으로 돌아갔다. 세빈은 멀어져 가는 지의를 보며 잔뜩 풀이 죽어 있다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다시 학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 *

“지의야! 신지의!”

“어, 선생님?”

훈련이 끝난 지의를 향해 그의 담임 교사가 급하게 손을 흔들었다. 지의가 짐을 챙기다 말고 그쪽으로 뛰어가자 실험 도구가 한가득 담겨 있는 상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다. 혹시 이것 좀 선생님 자리에 놔줄 수 있을까?”

“아~ 뭐 큰일 난 줄 알았네요. 그냥 두기만 하면 되는 거죠?”

“응. 고맙다, 지의야. 지금 바로 가 봐야 하는 곳이 있어서…….”

지의는 허리를 숙여 상자를 들곤 교사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가 한시름 놓은 듯 밝게 웃으며 지의에게 말을 덧붙였다.

“선생님 자리에 아마 머핀 하나 있을 거야! 그거 가져가서 먹으렴!”

“네! 감사합니다~”

주차장 쪽으로 급히 뛰어가는 교사를 뒤로한 채 지의는 학교 건물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행히 상자가 별로 무겁지 않아 그것을 든 채로 어렵지 않게 교무실 문을 열 수 있었다.

쿵.

자리 위에 상자를 올려놓은 후 그의 담임이 이야기한 머핀을 찾아 자리를 기웃거렸다. 지의는 가족사진 앞에 놓인 초코 머핀을 챙겨 다시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2학년 1반 강세빈이라고 합니다!”

‘어?’

교무실 문밖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의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숨긴 후 문 틈새로 눈만 빼꼼히 내보였다.

집에 갔다고 생각한 자신의 소꿉친구와, 방금 전까지 연희를 지도하던 지의의 코치였다. 상상치도 못한 조합에 지의는 교무실 문에 완전히 기댄 채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 이름이 익숙하다 했더니 다른 선생님들이 말씀하셨던 우등생이 너구나? 그… 전교 1등?”

“네? 아, 하하하…….”

“왜, 갑자기 육상에 흥미가 생겼어?”

어색하게 웃던 세빈이 목을 가다듬었다.

“이번 구청장 배 육상 대회에 지의를 내보내시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뭐? 허허… 지의가 말하든?”

“아니요. 어제 코치님께서 지의랑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저도 그때 교무실에 있었거든요.”

코치가 난처하다는 듯 억지로 웃었다. 연희에게 출전권을 양보하라고 말했을 때와 같은 얼굴을 했으리라, 지의는 추측했다.

“지의가 우리 학교 육상부에서 가장 기록이 좋다고 들었습니다. 학교 이름을 걸고 나가는 대회라면 실력이 가장 좋은 선수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강세빈 학생, 다 나름의 고민과 사정이 있는 거야.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리는 건 학생의 일이 아니야.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세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코치의 긴 한숨이 이어지더니 그가 말을 덧붙였다.

“친구가 대회에 나가지 못해서 속상한 건 알겠어. 하지만 이게 부탁한다고 되는 부분이 아니라서 말이야.”

“…부탁해서 되는 부분인 줄 알았네요.”

세빈이 웃음이 약간 섞인 어투로 이야기를 하자 지의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세빈이 마치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어제 가방에서 웬 하얀 봉투를 꺼내시길래 저런 식으로라도 부탁하면 되는 일인 줄 알았거든요.”

“…어?”

코치가 되묻는 동시에 지의도 숨을 훅 들이켰다. 당혹스러워하는 두 사람의 귀에 세빈의 음성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 선발로 뽑힌 그 선배가 주신 거죠?”

“…강세빈 학생이 무슨 말 하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오해가 있는 것 같네.”

“코치님 성함이 적혀 있었잖아요. 안에 오만 원권 뭉치가 그대로 비쳐 보이던데.”

지의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단호한 세빈의 말투도, 연희가 코치에게 돈을 건넸다는 것도 전부 믿기 힘들었다. 그저 멍하니 텅 빈 교무실을 바라보며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초코 머핀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모양이 찌그러지고 있었다.

“버릇없었다면 죄송합니다.”

“…….”

“하지만 코치님도 후회하시는 것 같아서요. 어제 계속 봉투 꺼냈다 넣었다 하시면서 한숨 쉬시는 거 봤거든요.”

세빈은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지의는 분명히 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거예요. 걔가 실력 좋은 건 육상부 아닌 애들한테도 다 소문나 있어요.”

“우등생이라고 해서 마냥 호락호락한 녀석도 아니구나. 맹랑한 구석이 있어.”

코치는 헛웃음을 섞으며 말을 뱉었다.

“지의가 잘하는 애니까 그 대회에 보내야 하는 이유 말고, 다른 이유도 있어?”

“그건…….”

“만약 지의보다 그 출전권이 더 간절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한테 가도 되지 않을까?”

“지의도 간절해요.”

세빈이 곧바로 받아쳤다.

“표현을 안 하는 것뿐이에요. 아니, 그걸 표현하는 것 자체가 욕심이라고 생각하는 애라서 그런 거예요. 지의도 누구보다 그 경기를 나가고 싶어 했어요.”

“…지의가?”

“네. 그러니까 제발 지의한테 기회를…….”

드르륵.

“악!”

쿵.

그때 코치가 교무실 문을 옆으로 민 바람에 기대어 있던 지의의 등이 바닥에 부딪혔다. 누운 채로 두 사람을 올려다보자 그들이 동시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지의야?!”

“지의야!”

지의는 어색하게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그의 코치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내 머리를 거칠게 털더니 그대로 쪼그려 앉아 지의와 눈을 맞췄다.

“잠깐 얘기 좀 할까.”

30분간의 면담이 끝나고 지의가 교무실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세빈이 계단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이는 지의의 얼굴을 보며 세빈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텄다.

“어떻게 됐어?”

“…경기, 내가 나가기로 했어.”

“정말? 다행이다.”

세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지의는 코치에게서 모든 것을 들었다. 연희가 돈을 건넨 것과 자신이 그것을 받고 그를 선수로 선발했다는 것까지. 코치는 지의에게 계속해서 사과하며 용서를 구했고, 그가 보는 앞에서 연희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돌려주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지의의 마음은 여전히 불편해 쉽게 웃을 수 없었다. 선발 선수로서 행복해 보이던 연희의 마음에 커다란 스크래치를 내는 듯한 기분이었다.

“세빈아, 오늘 왜 그런 거야?”

지의의 말에 세빈이 입을 꾹 다물었다. 머릿속으로 적당한 표현을 고르더니 이내 대답했다.

“네가 조금 더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서.”

“뭐?”

“매번 양보하고, 다른 사람 도와주다가 다치고,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서 그랬어.”

지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세빈을 바라보았다.

“이기적으로 살라는 소리는 또 처음 듣네……”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다 이내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자신이 그동안 보인 모습이 바보같이 보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빈은 지의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서 입을 열었다.

“대회 나가고 싶어 했잖아. 충분히 자격도 됐고.”

“…….”

“나는 네가 조금 더 욕심을 냈으면 좋겠어. 네가 바라는 일이라면 고집을 부려 줬으면 좋겠어.”

세빈이 지의의 양손을 잡았다.

“너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세빈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확신에 찬 눈빛이, 지의에 대한 신뢰로 빛나는 눈동자가 별을 박아놓은 듯했다.

“내가 장담할게. 분명히 그 대회에서 지의, 네가 이길 거야.”

“…말은 잘해요.”

툭.

지의가 세빈의 어깨를 가볍게 친 후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누가 날 이렇게까지 믿어 준 적이 있었나?’

지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돌아온 대답은 ‘아니오’였다. 누군가의 두터운 신뢰와 믿음이 불편했던 마음 한구석을 순식간에 지워 버렸다.

“대회 꼭 보러 와.”

“당연하지.”

세빈은 기쁘다는 듯 웃었다. 그 순수한 미소가 지의에게까지 번져 그도 사르르 웃었다.

* * *

레이스의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선두 그룹, 그중 가장 앞에 지의가 있었다. 지의의 발이 먼 곳을 디딜 때마다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그리고 가장 먼저 결승선에 닿았다.

펑, 퍼엉!

여기저기서 터지는 축포와 사람들의 박수 소리, 잔뜩 흥분한 환호성은 오롯이 지의의 것이었다. 전광판에 뜬 자신의 이름을 보며 지의는 밝게 웃곤 곧바로 관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의야!!”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제 소꿉친구를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을 믿는 눈동자는 단 한 쌍뿐이었으니 말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반짝이는, 우주를 담은 눈동자. 지의는 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너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자신의 행동으로 무언가를 바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양보는 지의의 일부였으며 동시에 지의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세빈은 달랐다. 지의가 고집을 부리길 원했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길 바랐다. 지의가 원하는 것을 같이 원했고 지의가 하는 모든 일에 강한 믿음이 있었다.

지의는 세빈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굳은 다짐을 했다.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에게 끝없는 신뢰를 주고 욕심이라는 것을 알려준 세빈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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