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85화 (185/366)

185화

“세빈아.”

녀석의 이름을 부르자 ‘강세빈’이 눈을 크게 떴다. 빛이라곤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던 녀석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물론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녀석은 없었다. 내가 ‘강세빈’을 떠올린 것처럼 연기해 녀석이 검을 놓는 그 순간을 노리기 위함이었다.

“기억 못 해서 미안해.”

“…어?”

내 허술한 거짓말에 녀석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강세빈’은 뒤로 한발 물러나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조금 더 동요하게 만들어야겠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녀석을 향해 팔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양어깨가 닿았을 때 그대로 녀석을 내 품 안쪽으로 끌어왔다. 우리 둘이 어떤 사이였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지만, 녀석의 말대로라면 동료였던 것은 확실하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갑자기 너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졌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기억했어야 했는데.”

“…진짜로 기억난 거야?”

“내가 너한테 거짓말하는 거 봤어?”

“거짓말은 아니어도 숨긴 건 많았지.”

감격의 포옹을 했는데도 ‘강세빈’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녀석이 내 어깨에 기댔던 고개를 천천히 들고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아 입술이 바짝 말랐다.

이번엔 녀석이 제품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피 냄새와 탄내가 섞여 머리가 지끈거렸다.

“근데 이번엔 그냥 속고 싶네.”

“…….”

“날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네가 신지의인 건 변함이 없으니까.”

쿵.

또다시 불쾌한 익숙함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쓰러진 사람들이 만든 붉은 풍경의 한가운데 서서 누군가에게 안겼던 경험.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그 장면이 머릿속에 수십 번 재생되고 있었다.

치지직.

[떠올려 봐.]

그때 내 눈앞에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오랜만에 보는 멀쩡한 글자에 눈만 깜박이며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비합리적인 선택을 했던 그때를 떠올리라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게 말을 걸고 있는 이가 지난 시간선의 나라는 것을.

아니, 정확히는 98번째의 나라는 것을.

98번째의 나는 다른 시간선의 나보다 훨씬 냉정했다. 사도들을 전부 죽였고, 김강희는 물론 지옥도도 처리했다. 세상이 내게 씌운 회귀자의 업 때문에 결국 희생을 피할 수 없었…….

‘…잠깐.’

뭔가 이상하다. 그 당시에 희생을 각오했던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누가 우리의 희생을 막았지?]

내 생각을 전부 알고 있는지, 98번째의 내가 질문을 던졌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우린 왜 그때 기억을 지워 달라고 했지?]

그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분명 ‘말의 힘’으로 내 기억을 지우고 시간을 돌려달라고 말한 건 기억나는데, 내가 왜 그런 바보 같은 소원을 빌었던 것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강세빈’의 품에 안긴 채 빠르게 떴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상태창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텁.

그때 상태창에서 반투명한 손이 튀어나왔다. 여기저기 흉터가 남아 있는 손이 내 손목을 잡아 어딘가로 끌었다.

그 방향의 끝엔 바닥에 꽂힌 ‘강세빈’의 검 손잡이였다.

[기억해 내.]

손가락 끝이 차가운 검에 닿자 98번째의 내가 명령했다.

이 검으로 나 자신을 찌르면 자아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강세빈’과 나 사이에 있던 일, 지난 시간선의 ‘나’들이 떠올리기를 간절히 바란 그 기억을 되살릴 수도 있다.

손끝으로 검 손잡이를 살짝 쓸어보다가 손으로 완전히 감싸쥐었다. ‘강세빈’은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제 머리를 내 머리에 기댄 채 침묵을 유지했다.

잔뜩 긴장한 탓에 터질 것 같은 심장은 아무리 호흡을 가다듬어 봐도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강세빈’을 한 번 흘겨본 후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탁!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강세빈’을 강하게 밀었다.

“지의…….”

푹.

‘됐다.’

배에 퍼지는 알싸한 통증, 손등 위로 왈칵왈칵 쏟아지는 뜨뜻한 액체, 그리고 그 모든 광경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강세빈’.

무엇 하나 익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의야!!”

“어, 흑……!”

‘강세빈’이 내 배에 꽂힌 검을 뽑아내자 오히려 더 많은 피가 밑으로 쏟아졌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내 몸이 뒤로 넘어가고 있다는 걸 느끼기 무섭게 ‘강세빈’이 내 몸을 끌어안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친구란 뭘까?]

고통 때문에 스르르 감기는 눈을 비집고 상태창이 떴다. 98번째의 내가 건넨 질문은 다소 철학적으로 느껴졌다.

[도대체 친구가 뭐길래 우리가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하게 만든 걸까?]

‘몰라. 모르겠어.’

녀석의 질문에 대답할 때쯤 시야가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전신을 집어삼켰던 고통이 어느 순간 잦아들었다. 귓가에 맴도는 이명에 ‘강세빈’의 절규가 섞여 있었다.

[그럼 떠올려 보자.]

[우리가 처음으로 그 아이에게 마음을 열었던 때를.]

파아앗.

검게 변했던 눈앞이 이번엔 새하얗게 물들었다.

곧이어 따뜻하면서도 그리운 기억이 머릿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 * *

삐이이!

호루라기 소리가 운동장을 울려 퍼지자 트랙 위에 있던 학생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10미터쯤 지나자 가장 끝에 서 있던 학생이 앞으로 치고 올라왔다. 서서히 격차를 벌리며 선두를 탈환하더니 그대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와 씨, 신지의 기록 또 좋아졌네.”

스톱워치를 보던 코치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가장 먼저 들어온 지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지의는 손을 드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 후 허리를 숙인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연희, 너도 기록 많이 좋아졌고……. 문혜연, 너는 막판에 속력 떨어지는 것 좀 어떻게 해야겠다.”

코치들은 한 명씩 다가가 이야기를 한 후, 다시 손뼉을 쳐 주의를 끌었다.

“단체 훈련은 여기서 끝. 더 할 사람은 알아서 하고 가라. 무리는 하지 말고.”

“네!”

“네에…….”

코치가 떠난 자리엔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가장 먼저 체력이 돌아온 혜연이 지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막판 스퍼트는 어떻게 내는 거냐? 너 치고 나오는 거 볼 때마다 진짜 경이롭다, 경이로워.”

“그냥 기를 쓰고 달리는 거지 뭐.”

지의는 물통 뚜껑을 돌려 연 후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대부분 얼굴을 적시는 데 쓰여 정작 목구멍에 들어간 건 몇 모금 되지 않았다.

“언니 벌써 가세요?”

“응. 다들 수고해.”

“연희 언니, 조심히 들어가세요!”

지의가 연희라고 불린 3학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지의의 인사를 받아주곤 도망치듯 운동장을 떠났다.

“저 언니도 타이밍 참 안 좋네.”

“왜?”

“에이스 소리 들으면서 작년부터 대회 준비했는데, 지금 선발 딱 봐도 쟤한테 뺏기게 생겼잖아.”

수건으로 땀을 닦던 아이들 중 한 명이 지의를 향해 턱짓했다.

“자기보다 늦게 육상 시작하고, 더 어린 애한테 선발 뺏기는 거 얼마나 자존심 상하겠냐.”

“그러게. 그 언니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지의는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는지 혜연과 이야기를 하며 몸을 풀고 있었다.

덜그럭.

정작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은 건 두고 간 물통을 가지러 온 연희였다. 아이들은 연희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연희도 별다른 말 없이 싱긋 웃으며 물통만 챙기고 자리를 삭제 떴다.

하지만 물통을 쥔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지의를 이기지 못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저 속으로 화를 억누르기만 할 뿐이었다.

우우웅.

그때 가방 안에 넣어 뒀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자신의 부친이었다.

“응, 아빠. 왜?”

―어, 딸. 가방 안에 아빠가 넣어 놓은 거 봤어?

연희가 교실 쪽으로 돌아가다 말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아빠.”

―너 고등학교 들어가면 나갈 수 있는 대회 규모가 너무 커져서 이런 짓 못 해.

“…….”

―이번 대회만 나가면 스폰서들 눈에는 일단 띌 테니까 아빠 말대로 하자. 알았지?

연희는 자신의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딱 봐도 두툼해 보이는 흰색 봉투에 코치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는 말없이 전화를 끊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이번 한 번만…….’

하지만 곧 다짐을 했는지 다시 눈을 떠 학교 안으로 발을 들였다.

* * *

“어, 지의야. 훈련 끝나고 잠깐만 남아라.”

“네? 네!”

어느 초여름의 오후였다. 코치의 말에 운동장을 돌던 아이들이 일제히 지의를 바라보았다. 대부분 부러움에 가득 찬 시선이었다.

“대회 얘기 하려고 그러나 봐.”

“에이, 설마.”

“얼씨구. 기대하고 있는 거 다 티 나거든?”

혜연이 짓궂게 말을 붙이자 지의가 그의 등을 한 대 내리쳤다. 그 모습에 같이 달리던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지의는 애써 내색하진 않았지만, 대회에 나가 상금을 받으면 집에 쌓인 빚을 얼마나 갚을 수 있을지 생각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해가 완전히 땅 밑으로 숨어 하늘에 붉은 노을이 걸릴 때쯤 지의는 코치의 뒤를 따라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대회 얘기 하시겠지?’

교무실 구석에 있던 의자에 앉은 채 제 코치가 냉장고에서 주스 두 병을 꺼내오는 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달그락.

코치는 지의 앞에 오렌지 주스와 함께 과자를 올려 두었다. 기대하면 실망이 크단 걸 알면서도 설레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지의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오렌지 주스 뚜껑을 열어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이번 달 말에 구청장 배 대회 있는 거 알고 있지?”

“네. 학교 별로 한 명만 나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어, 그래. 잘 기억하고 있네.”

코치는 눈을 빛내는 지의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거, 이번만 연희한테 양보하는 건 어떨까?”

“…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의의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지의가 되묻자 코치가 이번엔 지의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지의 너는 확실히 재능이 있어. 그런 네가 대회 1년 늦게 나간다고 해서 네 실력이 어디 가겠니?”

“전…….”

“연희한텐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거든. 아, 물론 네가 싫다고 하면 나도 강요하지는 않을게.”

코치가 뒤늦게 말을 덧붙여 봤지만 이미 지의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강요가 아니라는 말이 오히려 지의에겐 족쇄처럼 다가왔다.

“…알겠어요. 연희 언니한테 출전권 주세요.”

“고맙다, 지의야. 내년엔 꼭 챙겨 줄게.”

코치가 지의의 손을 덥석 잡곤 위아래로 흔들었다. 지의는 힘없이 흔들리는 자신의 손을 보며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찾았는데 그것을 너무나 쉽게 도둑맞은 것이다.

지의는 그렇게 과자 몇 개와 함께 교무실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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