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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비명헌터-184화 (184/366)
  • 184화

    ‘그리고 네가 나를 쓰려면 ‘강세빈’의 검에 찔려야 한대.’

    자아가 하는 말을 한 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 바쁘게 돌아가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 입 밖으로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내 무기를 쓰려면 녀석에게 찔려야 한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설마 구원자의 무기 창고도?!’

    철컹.

    [일시적인 접근 차단]

    “도대체 왜……?”

    나를 돕기 위해 존재해 온 돌발 지령이 나를 사지로 내몰고 있었다. 눈앞의 현실을 믿기 힘들어 자아의 방아쇠를 몇 번이고 당겨 보았다.

    틱, 틱.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자아에선 그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파바바박!

    멍하니 선 나를 둔 채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차도윤 헌터가 시위를 당겨 초록빛 화살 비를 쏟아내자 ‘강세빈’은 또다시 모습을 숨겼다. 그리고 곧바로 차도윤 헌터의 앞에 나타나 검을 위에서 아래로 올려쳤다.

    펑!!

    하지만 갑자기 생성된 방공호의 벽에 막혀 녀석의 공격은 무의미해졌다. ‘강세빈’의 그림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손들도 불길에 휩싸여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신지의 헌터, 무슨 일이야?”

    치료를 마친 하미준 헌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무기가 잠겼어요.”

    “뭐? 어디 줘봐.”

    “하미준 헌터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거예요.”

    내 말에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나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무기라 아니라 제가 문제라서 그렇거든요.”

    “…아무튼 해결 방법은 있는 거야?”

    “저 녀석의 검에 찔리면 된다고 해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미준이 보기 드물게 정색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더군다나 이것을 요구하는 게 과거의 나 자신들이라는 걸 알면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내가 말한다고 들을 신지의 헌터가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

    “함부로 몸 던지지 마.”

    또각.

    하미준 헌터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강세빈’이 있는 곳으로 달려 나갔다.

    그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지키지 못할 약속이다. 자아를 쓰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저 녀석의 검에 뛰어들어야만 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나’들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일대일 대치 상황이 아니었으니 다행이지, 만약 나와 ‘강세빈’이 격렬하게 싸우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나’들의 바람대로 저 검에 몸이 꿰뚫렸을 것이다.

    ‘혹시 저 검에 찔려야 뭐가 기억나는 건가?’

    그때 자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묘한 기시감이 들어 잠깐 눈을 감았다 뜨자 잊고 있던 작은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남원 S급 던전!’

    남원 S급 던전에서 ‘이몽룡’의 마지막 일격을 맞았을 때, 그리고 시부야 S급 던전에서 텐구의 불꽃에 등 전체가 탔을 때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었다. 만약 지난 시간선의 ‘나’들이 그것을 노리는 거라면 그 기억은 분명 ‘강세빈’에 관한 것이겠지.

    나는 고개를 내려 자아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걔네들은 나한테 그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한 걸 거야. 그건 아마 ‘강세빈’에 대한 기억일 거고.’

    ‘걔네들이 너한테 굳이 저 녀석을 기억하게 만든다고? 공략법이라도 따로 있는 건가?’

    ‘그건… 모르겠어.’

    키이잉

    작동하지 않는 자아를 피어싱으로 돌려놓고 발목을 천천히 풀었다.

    ‘과정은 이해할 수 없지만 걔들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해가 될 만한 짓은 하지 않아.’

    ‘그건 그렇긴 하지.’

    쾅!

    방공호로 그림자를 튕겨낸 최민 헌터가 운석처럼 ‘강세빈’에게 날아가 녀석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촤아악.

    “최민 헌터!”

    “커헉……!”

    하지만 녀석의 그림자가 최민 헌터의 몸을 옭아매는 바람에 날카로운 검날이 그의 배를 그대로 파고들었다. 피할 틈도 없이 당해 버린 그가 배를 움켜쥔 채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화르륵.

    방공호가 최민 헌터와 ‘강세빈’의 사이에 생성됨과 동시에 한진우 헌터의 약손이 최민 헌터 쪽으로 쏟아졌다. 방공호는 야금야금 영역을 넓혀 최민 헌터와 한진우 헌터를 완전히 덮었다.

    ‘예상외로 전투가 너무 길어지고 있어.’

    ‘강세빈’ 하나를 상대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한진우 헌터의 치유 스킬이 없었다면 이미 전투 불능이 됐을 상황이 몇 번씩이나 벌어졌다.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하면 녀석의 그림자가 우리를 전부 집어삼킬 것이다.

    “쳇.”

    ‘강세빈’이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낸 후 자신의 검을 고쳐 잡았다.

    물론 녀석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긴 했다. 내가 구멍을 낸 손목에선 여전히 끈적한 액체가 배어 나왔고, 여기저기 불에 탄 듯한 상처들도 온몸 곳곳에 보였다.

    ‘일단 내게 검을 들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겠어.’

    파밧!

    “신지의 헌터?!”

    차도윤 헌터의 다급한 외침을 뒤로 한 채 ‘강세빈’ 쪽으로 달렸다. 녀석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검은 눈이 커다래졌다.

    “지의……!”

    퍼억!

    둔탁한 소리가 이 공간에 울려 퍼졌다. 내 주먹에 고개가 돌아간 ‘강세빈’이 크게 휘청거렸지만 금방 중심을 잡곤 눈을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후웅.

    곧바로 녀석의 몸을 향해 발을 뻗자 ‘강세빈’은 뒤로 굴러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왜 반격을 안 하지?’

    ‘강세빈’은 자신이 공격을 당한 상황에서도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는 민첩함을 가진 녀석이다. 녀석에게 있어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달려든 나를 제압하는 건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든 손을 뒤쪽으로 빼면서 위험 요소를 치워 버리는 듯했지.

    ‘설마 날 공격할 생각이 없나?’

    쩌엉!!

    엄청난 마찰음이 나의 주의를 끌었다. 나의 난입에 ‘강세빈’의 뒤를 잡은 하미준 헌터가 도끼로 녀석의 등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렸다. 검붉은 핏방울이 땅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동시에 녀석이 얼굴을 찌푸리며 모습을 감췄다.

    “무기는 여전히 잠겨 있어?”

    “네.”

    하미준 헌터는 혀를 찬 후 다시 잔뜩 긴장한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강세빈’은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 듯 주위는 고요하기만 했다.

    한진우 헌터와 최민 헌터가 있을 방공호를 흘긋 바라보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의 벽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태워 버릴 기세였다.

    파스스.

    그때, 방공호가 풀렸다. 자욱하게 깔린 연기의 너머로 사람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오자 긴장이 풀려 잇새로 한숨이 샜다.

    “최민 헌터, 다친 곳은 좀…….”

    그의 상태를 물으려 입을 연 순간, 불길한 예감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연기 너머의 실루엣에서 코트 자락이 펄럭였기 때문이었다.

    “후…….”

    연기가 걷히자 ‘강세빈’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쿵.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최민 헌터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최민 헌터!!”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에게로 달려가자 저 멀리 한진우 헌터까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최민 헌터의 몸을 끌어당겨 내 무릎 위에 눕히자 ‘강세빈’이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너무 걱정 마. 한진우 헌터는 기절시킨 거고, 최민 헌터도 목숨에는 지장 없을 거니까.”

    “…물러나.”

    [발언력 상승]

    [■■■■■■■■■■]

    [출력 실패]

    녀석에게 발언력이 든 것도 아닐 텐데 ‘강세빈’은 내 말에 멀찍이 떨어졌다. 녀석이 움직인 경로를 따라 검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커헉……!”

    최민 헌터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힘겹게 눈을 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아까 생겼던 상처를 다시 한번 후벼 판 건지 복부에서 검붉은 피가 계속해서 왈칵 쏟아지고 있었다.

    “녹두야!”

    쾅!

    녹두를 부르자마자 녀석이 몸으로 ‘강세빈’을 튕겨 낸 후 곧바로 배리어를 펼쳤다. 배리어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며 한진우 헌터까지 감싸자 두 사람의 상처 주변으로 새하얀 빛무리가 날아들었다.

    배리어의 치료 효과 덕에 최민 헌터의 복부 상처가 조금씩 아물고 있었지만  속도가 너무 더뎠다.

    콰과과광!

    한진우 헌터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최민 헌터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때, 나무줄기가 ‘강세빈’을 집어삼켰다. 배리어 너머의 ‘강세빈’ 위로 초록빛 화살 비가 그 위로 쏟아지자마자 하미준 헌터가 나타났다.

    “상황 봐서 후퇴하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 같아!”

    “…시간 조금만 벌어 주세요.”

    내 말에 하미준 헌터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강세빈’ 쪽으로 몸을 돌렸다.

    투쾅!

    상황이 영 좋지 않게 흘러간다. 찝찝한 기분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강세빈’은 최민 헌터도 전투 불능으로 만든 녀석이다. 하미준 헌터와 차도윤 헌터가 협공을 해도 쓰러트리는 건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한진우 헌터! 정신 차려 봐요!”

    바닥에 쓰러진 한진우 헌터의 몸을 살폈다. 다행히 특별한 외상은 없었고, 일정한 속도로 여린 호흡을 내쉬기만 할 뿐이었다.

    배리어 너머의 ‘강세빈’은 나무줄기와 바람 화살을 피하며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쾅!

    “윽!”

    그때 차도윤 헌터의 그림자에서 커다란 손이 튀어나와 그의 몸을 땅으로 홱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을 떠나간 바람 화살이 ‘강세빈’의 어깨에 꽂혔다.

    깡!

    하미준 헌터의 도끼와 ‘강세빈’의 검이 맞부딪히자 ‘강세빈’이 아예 검을 놓아 버렸다. 그 바람에 그의 중심이 흔들렸다. 녀석의 발밑에 있던 그림자가 하미준 헌터를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안 돼!”

    쿵.

    내 의미 없는 외침은 하미준 헌터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그는 한진우 헌터처럼 힘없이 엎어져 있었다. 그림자를 떼놓으려 온몸을 비틀던 차도윤 헌터 역시 그림자에 얼굴을 박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하아, 하아…….”

    아예 배리어 밖으로 나오자 ‘강세빈’의 거친 숨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바람 화살이 꽂혔던 어깨에서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쿵, 쿵, 쿵.

    기시감이 들었다. 모두가 쓰러지고 나와 ‘강세빈’만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이 상황이 끔찍하리만치 익숙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포기하지 않으려 했는데, 도저히 방법이 안 보여.”

    “…….”

    “내가 어떻게 해야, 지의 네가 날 떠올릴 수 있을까?”

    ‘강세빈’의 입 밖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녀석을 바라보니 무표정한 얼굴 위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고, 검을 잡은 손은 덜덜 떨렸다.

    쿵, 쿵.

    심장이 또다시 쿵쾅거렸다. 손잡이부터 날까지 시커먼 저 검을 바라볼수록 숨이 턱턱 막혔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뭔가 낯익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 희망을 걸어 볼 수 있는 건 내게 떨어진 돌발 지령뿐이야.’

    나는 ‘강세빈’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 나갔다. 녀석은 한두 걸음 정도 뒷걸음질을 치다 이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강세빈’은 나를 공격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녀석이 제 의지로 나를 찌를 일은 없을 것이다. 즉, 돌발 지령을 수행하려면 내가 녀석의 검을 뺏어서 스스로 찌르는 수밖에 없다.

    바스락.

    녀석의 바로 앞에 섰다. 지금 상태로 녀석의 검을 뺏을까 생각했지만, 완력으로 이길 자신이 없다. 녀석이 검을 놓는 그 순간을 노려야 한다.

    고개를 들어 ‘강세빈’의 얼굴을 바라보자 검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난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세빈아.”

    공허해 보이던 녀석의 눈동자에 순간 빛이 깃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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