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민아섭 헌터는 하미준 헌터와 차도윤 헌터 사이에 껴 약간 주눅 들어 있었다. 하나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신지의 헌터!”
“민아섭 헌터!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어, 두 분 아는 사이였어요?”
한진우 헌터가 눈을 크게 뜨며 나와 민아섭 헌터를 번갈아 보았다. 그사이에 민아섭 헌터가 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네. 첫 파견 때 만났어요.”
“그때 신지의 헌터가 절 엄청 신경 써주셨거든요!”
“어이구, 그랬어? 아섭 군, 아까보다 훨씬 표정이 밝아졌네.”
하미준 헌터는 민아섭 헌터를 귀엽다는 듯이 본 후 최민 헌터 쪽으로 살짝 눈짓했다. 그에 최민 헌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민아섭 헌터 앞으로 발을 옮겼다.
“자, 그럼 우리 아섭 군. 은신계 스킬 있다고 했지?”
“아, 네!”
“그걸 최민 헌터에게 걸어주겠어?”
‘민아섭 헌터에게 은신계 스킬이 있었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에 민아섭 헌터를 빤히 바라보자 내 시선을 느낀 그가 머쓱한 듯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사실 최근에 은신계 스킬 하나가 생겼거든요. C급으로.”
“고유 스킬이랑 동일한 등급으로 일반 스킬이 생기는 건 쉽지 않은데. 민아섭 헌터는 그런 일반 스킬이 두 개나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죠.”
차도윤 헌터도 민아섭 헌터를 흘긋 보며 말을 얹었다.
“그 홍천 B급 던전에서 처음으로 교란계 스킬 쓴 후로, 그 스킬을 엄청 연습했거든요.”
“그러다 새 스킬이 생긴 거예요?”
“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스킬이었어요.”
민아섭 헌터는 잔뜩 신난 목소리로 대답한 후 최민 헌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 뒤 그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스킬 걸어도 될까요?”
“네.”
휘이잉―
민아섭 헌터가 숨을 들이마시며 최민 헌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주위로 초록빛 바람이 모였다. 바람이 최민 헌터의 위로 스칠 때마다 그의 모습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 기억났다.’
지금의 자아가 민아섭 헌터에게 기회를 주라고 했던 이유. 그리고 민아섭 헌터가 지난 시간선에서 보여주었던 활약이 이제야 떠올랐다.
내가 갖고 있던 파편이 지옥도에 흡수되어 온 세상이 쑥대밭이 되었던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었다. 그 바람은 병원과 학교 주변을 감싸 순식간에 모습을 숨겨버렸고, 덕분에 지옥도 밖으로 쏟아져 나온 몬스터들은 그것들을 지나쳐 큰 피해를 막았다.
그리고 그 스킬은 바로 민아섭 헌터의 스킬이었다.
“다 됐어요.”
“음? 스킬 걸린 거 맞아?”
하미준 헌터가 최민 헌터를 바라보며 약간 의문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가 말한 대로 최민 헌터는 아까와 크게 다를 것 상태였다.
민아섭 헌터는 그의 질문에 어깨를 움찔 떨더니 곧장 입을 열었다.
“저, 저희가 최민 헌터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래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엄청 흐릿하게 보일 거예요!”
“지속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한 한 시간 정도요. 하지만 사람이랑 접촉하거나 공격을 받으면 바로 풀려요.”
“지금은 대화만 하고 올 거니까 넉넉하겠네요.”
내 말을 들은 최민 헌터가 고개를 끄덕이곤 민아섭 헌터에게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도 민아섭 헌터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조금 막막한 상황이었는데 민아섭 헌터 덕분에 잘 풀렸네요.”
“네? 별것도 아닌데요 뭘…….”
“아니요.”
칭찬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민아섭 헌터의 말에 내가 곧바로 반박하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민아섭 헌터는 아직 그 스킬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지 모르겠지.’
턱―
나는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 언젠가 이 스킬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민아섭’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강한 기대]
자신의 스킬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에 엄청난 보람을 느꼈는지, 민아섭 헌터는 자신의 스킬이 만들 미래를 몹시 기대하는 듯했다.
탁―
수줍은 미소를 띤 민아섭 헌터를 뒤로한 채, 나와 최민 헌터는 게이트 쪽으로 발을 돌렸다.
“그럼, 갈게요.”
“신지의 헌터 조심해!”
“조심히 다녀오세요!”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조심히 게이트 안으로 발을 들였다.
타닥―
게이트 안은 아까처럼 고요했다. 녀석은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는지 입구엔 흙먼지만이 나뒹굴 뿐이었다.
“최민 헌터.”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최민 헌터를 부르자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앞장설게요. 그 몬스터랑 얘기하는 동안 적당한 곳에 몸을 숨겨 주세요.”
최민 헌터는 고개를 끄덕이곤 내 쪽으로 살짝 몸을 숙여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장난기라곤 하나도 없는 그의 말에 오히려 웃음이 났다.
변하지 않는 그 진중한 얼굴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강세빈’이 있을 던전 안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찰방―
저 멀리 녀석이 앉아 있는 시체 더미가 선명하게 보일수록 바닥을 따라 흐르는 검붉은 액체가 신발에 끈적하게 눌어붙었다.
액체를 따라 계속해서 걸어가니, 여전히 시체 위에 앉아 있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왔어?”
학살자의 업을 지고 있는 ‘강세빈’이 나를 향해 웃었다. 녀석은 내 주위를 눈으로 슥 훑더니 다시 나와 눈을 맞췄다.
“네 말대로 혼자 왔어.”
“응. 그런 것 같네.”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 되지?”
“응.”
또각―
녀석이 시체 위에서 뛰어내려 내 바로 앞에 착지했다. 그에 내가 뒤로 두 걸음 물러나 녀석과 거리를 두니, 녀석은 눈썹을 움찔거리며 약간 동요하는 듯 보였다.
“넌 도대체 어떻게 우릴 알고 있는 거지?”
“어떻게 말해도 안 믿을 것 같긴 한데.”
“그건 내가 판단해. 넌 일단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강세빈’은 멍하니 나를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한국의 S급 헌터였으니까.”
“그게 무슨 소…….”
순간적으로 반박하려 했지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지 않으면 진실을 놓칠 수도 있다. 녀석의 말을 들어 보기로 마음먹은 이상, 나는 녀석이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한다.
나를 바라보던 ‘강세빈’의 시선이 밑으로 뚝 떨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밑으로 가느다란 그림자가 졌다.
“계속 얘기해.”
“…그러다 갑자기 이상한 던전으로 떨어졌어. 지의 네가 떨어진 것 같은 그런 던전 말이야.”
쿵―
심장이 내장 깊은 곳까지 떨어졌다 다시 붙는 듯한 기분이었다. 녀석은 마치 나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게이트는 안 보이지, 독 때문에 숨쉬기는 어렵지. 결국 ‘□□’를 한계 시간까지 써버린 거야.”
삐이이―
‘뭐지?’
녀석이 하는 말 중 일부분은 귀에 꽂히기 전에 흩어져 사라졌다. 98번째의 내가 진실을 듣지 못하도록 막는 것처럼, 녀석의 말도 무언가에 의해 방해받고 있었다.
“그래서 내 존재는 사라졌어. 대신 □□의 □가 내게 □을 씌워서 몬스터로 바뀐 거지.”
‘망할, 하나도 안 들려.’
녀석이 하는 말의 절반 정도가 끔찍한 이명으로 바뀌었다. 그 기묘한 현상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녀석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추론한 녀석의 이야기의 결론은 ‘모종의 이유로 자신이 몬스터가 되었고,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선 내가 ‘강세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였다.
‘강세빈’은 그 이후로도 우리에게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읊었다. 미식가의 파편 안에서의 일. 내가 레일리를 따라 길드전에 참여한 일. 그리고 조슈아를 만나기 위해 미국까지 간 것까지 녀석은 전부 알고 있었다.
내가 얼굴을 구긴 채로 한참을 가만히 서있자 ‘강세빈’의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의야, 혹시 어디 아파?”
“…걱정은 됐고.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글로 한 번 써봐.”
그 말에 ‘강세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별다른 대꾸 없이 내 말을 따랐다.
끼기긱―
녀석은 새카만 장검의 끝으로 빠르게 글자를 써내려갔다.
파사삭―
하지만 선 하나를 긋기 무섭게 그 글자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명백한 누군가의 방해였다.
그 광경을 본 ‘강세빈’이 어깨를 움찔 떨며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다.
“지, 지의야. 정말로 내가 누군지 조금도 기억 안나?”
“…….”
“우리 초등학생 때 처음 만났잖아. 중학교, 고등학교도 같이 나오고, 응?”
그러자 차분했던 녀석의 태도가 변했다. 몬스터 주제에 다정한 말투는 그대로였지만 나의 기억과 대답을 종용하는 목소리는 옅게 떨리고 있었다.
‘만약 내가 진짜로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면?’
녀석이 말한 내용들은 정말로 내 동료가 아니었다면 알 수 없는 정보들이었다. 심지어 미식가의 파편과 소설가의 파편 안에는 본인도 있었다고 말했다.
생각에 잠기느라 잠깐 숙였던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너 울어?”
‘강세빈’은 울고 있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계속해서 떨어져 녀석이 입고 있던 셔츠를 적셨다.
두근―
녀석이 눈물을 흘릴 때마다 온몸이 울렸다. 누군가 내 뇌를 주무르는 듯한 느낌을 이겨내며 나는 녀석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억이 도려내진 부분에 혹시라도 ‘강세빈’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 시간선의 나들도 누군가를 떠올리라고 했잖아.’
만약 그게 눈앞의 ‘강세빈’을 가리키는 거라면, 나는 이 녀석을 위해 무엇을 해줘야 하는 거지?
찰방―
그때 물웅덩이를 밟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울상을 짓던 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뭐야.”
‘강세빈’이 고개를 숙여 사방으로 쭉 뻗어나가는 검붉은 액체 줄기를 눈으로 좇았다. 갑자기 얼어붙은 분위기에 나도 녀석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액체는 던전의 구석에 있는 한 수풀까지 뻗어 있었다.
‘설마……!’
콰광!
액체인 줄 알았던 그것은 갑자기 새카만 손이 되더니 이내 수풀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큿…….”
“최민 헌터!”
퍼버벙!
수풀 안쪽에 숨어 있던 최민 헌터가 불꽃으로 검은 손을 불태우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피가 아니라 이 녀석의 스킬이었구나……!’
최민 헌터는 내 쪽으로 빠르게 하강한 후 내 허리를 잡아챈 뒤 날아올랐다. 단숨에 녀석과 거리를 벌린 그는 나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왜? 왜 또 최민 헌터야?”
눈물을 흘리며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던 ‘강세빈’은 어디 가고, 눈앞엔 검은 눈을 크게 뜬 몬스터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녀석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비틀거렸다.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의의 옆에 가장 오래 있던 건 난데. 왜 매번 지의를 구하는 건 저 사람인 거냐고…….”
“신지의 헌터.”
“알겠어요.”
최민 헌터의 신호에 나는 곧바로 자아를 꺼내 손에 쥐었다.
‘강세빈’의 양손이 얼굴에서 머리카락으로 올라갔다.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갈색 머리카락이 무참히 구겨졌다. 순식간에 초췌해진 인상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입.
‘저런 게 내 동료일 리 없잖아.’
순식간에 ‘강세빈’이 내 동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눈 녹듯 사라졌다.
쾅!!
지금 내 앞의 녀석은 몬스터 ‘강세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