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도착했습니다!”
리무진 기사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왔다. 곧바로 사람들과 합류하려 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예상치 못한 풍경에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야만 했다.
“여긴…….”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운동장이었다. 칠이 벗겨진 축구 골대와 철봉. 내가 알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흙으로 덮인 넓은 운동장의 한가운데, 그림자처럼 새카만 게이트가 둥둥 떠있었다. 게이트의 주변엔 헌터들과 연구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고, 천막 한편에선 치료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신지의 헌터, 하미준 헌터 이쪽입니다!”
그때 게이트 바로 앞에 있던 차도윤 헌터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게이트 앞으로 가는 동안 하미준 헌터가 중얼거렸다.
“그냥 게이트 오픈이나 폭발과는 확실히 다르네. 몬스터가 빠져나온 흔적들이 없어.”
그의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로 전투가 벌어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수습이 빨리 이루어졌다고 해도 이 정도로 운동장 바닥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이번엔 뭐 아는 거 없어?”
“저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에요.”
“흐응. 신지의 헌터도 모르는 일이라니.”
하미준 헌터가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한가롭게 나에 대해 이야기할 타이밍이 아니라는 건 그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차도윤 헌터가 있는 게이트 앞쪽에 다다르자 인기척을 느낀 그가 뒤를 돌더니 짧게 눈인사를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S급 게이트가 갑자기 생겨났어요. 레이더에 잡히지도 않았고요.”
“회장님은?”
“지금 인도에서 귀국 중이세요. 일단 게이트 발생 매뉴얼대로 대처하라고 하셨어요.”
차도윤 헌터가 하미준 헌터의 물음에 대답하며 게이트를 흘긋 바라보았다.
“다행히 신고가 빨리 이루어져서 학생들과 인근 주민들은 대피했습니다.”
“몬스터는?”
“보시다시피 단 한 마리도 안 나왔어요. 뭐, 한 가지 이상한 점이라면…….”
차도윤 헌터가 검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인간형 몬스터 한 마리만이 던전 안에 있었다는 것 정도.”
“보스 몬스터였어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일반 몬스터는 없고 보스 몬스터만 있는 던전이라……. 희한하군.”
하미준 헌터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차도윤 헌터가 다시 입술을 뗐다.
“그리고 저희를 먼저 공격하지도 않았어요. 게이트 밖으로 나올 때도 순순히 보내줬고요.”
“그럼 저랑 통화했을 때 들렸던 사람들 비명 소리는 뭐였어요?”
“아, 공격 패턴을 보려고 들어간 파견 팀이었을 거예요. 크게 다치긴 했지만 목숨엔 지장이 없었습니다.”
‘헌터들을 죽일 의지가 없는 걸까, 아니면 녀석에게 더 큰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걸까.’
인간형 몬스터는 민첩한 데다가 지능까지 높다. 표리부동한 연기자가 짧은 대화로 정보를 얻어내고 자연스럽게 연기했던 것처럼, 지금 저 게이트 안에 있는 녀석도 엄청난 계략을 꾸미고 있을 수도 있다.
덜컹―
그때 갑자기 게이트가 열림과 동시에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장신의 여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최민 헌터!”
“아.”
최민 헌터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눈썹을 움찔거리더니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무사했군요.”
“최민 헌터, 내부는 어떤가요?”
“그대롭니다.”
최민 헌터가 내 옆으로 발을 옮기며 손을 털었다. 그러자 장갑 형태의 그의 무기가 다시 반지가 되어 그의 손가락에 끼워졌다.
“여전히 그 인간형 몬스터가 가만히 앉아 있더군요.”
“일반적인 게이트 발생과는 좀 차이가 있지만, 일단 공략하는 게 낫지 않겠어? 그게 매뉴얼이기도 하고.”
“…섣불리 결정할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민 헌터가 조용히 말을 뱉었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최민 헌터를 쳐다보자 그가 말을 덧붙였다.
“그 몬스터, 제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름을 알고 있다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예상치 못한 발언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제 이름을 부르면서 던전 밖의 상황을 물어보더군요.”
“그래서 뭐라고 말했어?”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어떻게 날뛸지 모르니까요.”
최민 헌터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검붉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몬스터라는 느낌이 잘 안 들었습니다. 정말로 사람처럼 이야기하고,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사람……?”
“헌터들에 대한 이해도 매우 높았고요.”
하미준 헌터 쪽으로 고개를 올리자 이미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 말 없이 교환한 시선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표리부동한 연기자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형태라는 것.’
연기자는 그나마 우리의 모습을 관찰할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던전의 주인인 몬스터는 그럴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김강희가 만든 던전인가? 하지만 그에게 이 정도로 발달한 몬스터를 만들 능력까지는 없을 텐데…….’
그는 이미 소멸했거나 존재하고 있는 게이트를 꺼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적어도 바로 지난 회차 때까지는 그러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쳇.”
좀처럼 알 수 없는 상황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짝―
하미준 헌터가 박수를 쳐 우리의 주의를 끌었다.
“차도윤 헌터, 그 몬스터를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건 확실하지?”
“네. 던전 등급 파악하려고 부산물 캐러 들어갔을 때도 지켜보기만 했어요.”
“그럼 일단 들어가 보죠.”
내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그럼 저도 같이 들어갈게요.”
“나도 같이 갈게.”
차도윤 헌터와 하미준 헌터가 먼저 게이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말이 통하는 몬스터이니 말재주가 좋은 하미준 헌터가 들어가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리고 혹시 모를 전투 상황에 대비하여 차도윤 헌터까지 함께하니 확실히 든든했다.
‘어떤 몬스터인지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어.’
나도 그들을 따라 게이트를 향해 발을 옮겼다.
두근―
“윽!”
그때였다. 시커먼 게이트에 손을 대자마자 갑자기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날카로운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낯설지 않은 글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발 지령]
[제발 ■■해 내]
[그 아이■ 기■해 줘]
[보상 : 평■ 네 ■■ 있을 최■의 ■]
‘돌발 지령……?’
돌발 지령.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 나의 성장을 도와주던 지난 시간선의 ‘나’들이 내게 접촉하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내가 업을 청산할 수 있도록 업이 있는 곳으로 날 인도했고, 더 강력한 아이템을 쥐여 주기 위해 스킬을 걸어주기도 했다. 기억을 전부 되찾은 후로 이 돌발 지령은 단 한 번도 나온 적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을 전부 알고 있으니 그들도 세상에 무리해서 개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나타난 거지?’
심지어 돌발 지령이라고 해놓고 내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엉망진창으로 깨진 글씨로 보상만 겨우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기억이 도려내진 것 같은 느낌. 정체불명의 S급 몬스터. 그리고 난데없이 나타난 돌발 지령. 그 모든 것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신지의 헌터, 괜찮아?”
“네? 아…….”
게이트의 손잡이를 잡은 채 한참 서있던 건지 차도윤 헌터와 하미준 헌터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너무 힘들면 지금은 좀 쉴래?”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하미준 헌터를 향해 양손을 저은 후 나는 던전 안으로 완전히 발을 들였다.
‘분명 ‘나’들이 반응한 이유가 있을 거야.’
너무 사소해 내가 잊은 정보를 알려주기 위함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 소환된 그 S급 몬스터 자체가 지옥도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변수여서일 수도 있다.
터벅―
“그나저나 엄청 삭막하네요.”
내 말에 차도윤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도 그림자로 만든 것처럼 새카맸는데, 내부도 동굴에 들어온 양 어두컴컴했다.
흙길을 계속해서 걸어가자 저 멀리 언덕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저 위에 앉아 있는 녀석이 그 S급 몬스터예요.”
“인간형 몬스터가 아니라 진짜 인간 같네요.”
차도윤 헌터가 손으로 가리킨 곳엔 둥근 언덕 위에 앉은 사람의 실루엣이 있었다. 파주 A급 던전의 ‘신사’, 연기자의 파편 속 ‘시민 1’처럼 인간과 비슷한 형태를 갖고 있었으나, 녀석들보다 더 인간에 가까운 생김새였다.
휘이이잉―
그때 언덕의 뒤쪽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피비린내…….’
녹슨 철 같은 냄새가 코를 파고들자 나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옷소매로 코를 살짝 막은 채 몬스터가 있는 언덕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어렴풋했던 그 형체가 온전히 보이는 거리가 되고 나서야 그것이 언덕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그것이 앉아 있는 곳은 언덕이라고 생각될 만큼 높이 쌓인 사람의 시체 더미였다.
“…이 시체는 처음부터 있었던 거죠?”
“네. 헌터들 시체는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차도윤 헌터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시체 더미 사이사이에 끼워진 두개골과 그 틈에서 새어나오는 검붉은 액체들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
시체 더미를 마주하자 그것의 가장 높은 곳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올리니 잘 닦인 검은 정장 구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장 바지를 입은 긴 다리에서 셔츠와 넥타이를 맨 상체, 그리고 어깨에 걸친 트렌치코트까지.
그것은 완벽히 인간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더럽게 잘생겼네.”
“몬스터를 두고 그런 소리가 나와요?”
“우리 차도윤 헌터의 이 앙칼진 대답을 들으니 진짜 귀국했다는 느낌이 드는군.”
하미준 헌터가 차도윤 헌터의 핀잔을 받아치며 키득거렸다. 하지만 그는 몬스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조용히 손을 풀고 있었다.
‘잘생기긴 했네.’
몬스터라는 걸 몰랐다면 영화배우라고 착각했을 정도로 세련되고 잘생긴 인상이긴 했다.
몬스터는 아무런 말 없이 하미준 헌터와 차도윤 헌터를 눈으로 훑다 이내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쿵―
놈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누군가 몸을 꽉 쥔 것처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기억이 흘러 들어왔을 때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고 끔찍한 이명까지 일었다.
‘내 기억에는 문제가 없을 텐데……. 도대체 왜?’
“하아…….”
그때였다. 몬스터가 길게 한숨을 쉬며 상체를 숙였다.
녀석은 무릎 위로 얼굴을 묻으며 몸을 잠시 떨었다. 그리고 그 떨림이 멈출 때쯤,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물기가 서려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그 모습이 낯이 익다고 느낀 그 순간.
“무사해서 다행이야, 지의야.”
녀석이 내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