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이 녀석을 죽이게 해주면 나머지 인간들은 살려줄게.”
연기자의 말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그러고 나서 물론 나도 그 자리에서 죽을게!”
내가 입을 열어 반박하기도 전에 녀석이 먼저 말을 잇기 시작했다.
“나나 얘나 겉과 속 다른 더러운 위선자잖아. 이 세상에 있어 봤자 도움이 되겠어?”
“이런 미친…….”
“나는 이미 내 최고의 연기를 마쳤거든. 남은 연기 인생에 큰 미련이 없어.”
웃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얼굴에 미소를 거뒀다.
“그런데 이 녀석이 살아 움직이면서 연기하는 꼴은 내가 도저히 못 보겠어서 말이야.”
“…….”
“어때? 괜찮은 조건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개소리였다. 만약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녀석이 다른 사람을 살려준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뚜둑―
“컥!”
“내가 이 위선자 놈을 죽이기 전에 빨리 선택해 줄래?”
연기자는 끈을 양쪽으로 당기며 조슈아의 목을 더욱 거세게 조였다. 그럴 때마다 조슈아의 입에선 벽을 긁는 듯한 거친 신음이 터졌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 연기자는 자신과 조슈아를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나도 벤자민한테는 매정하게 굴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달랐다. 조슈아와 연기자의 연기는 원초적인 목적부터 달랐다.
바스락―
온몸의 힘을 다 짜내 겨우 몸을 일으켰다. 중심이 자꾸 흔들리고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그럼에도 녀석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탕!!
그러곤 빠르게 방아쇠를 당겨 작살에 달린 끈을 끊었다.
날아드는 탄환에 녀석이 얼굴을 구기며 뒤로 물러났다. 그 틈에 나는 조슈아의 팔을 잡아끌었고 내 뒤로 던졌다.
쿵―
자아에 주입된 모든 목소리를 끌어와 큰 실드를 뽑았다. 그와 동시에 녀석도 방아쇠를 당겼다.
끼기기기긱!!
수십 개의 탄환이 내 실드에 부딪혀 소름끼치는 마찰음을 냈다.
“그래, 이 인간이… 윽! 겉과 속은 다르지.”
“…당장 그 실드 안 치워?”
“하지만 너랑은 달라.”
쩌적―
실드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실드를 받친 손에 힘을 주었다.
“조슈아한텐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려 하는 마음이 있어.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할 수 없는 마음이.”
“…….”
“자아 없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흉내 내려 했던 네 더러운 연기하고는 다르다고!”
쨍그랑!
“큿!”
기어코 실드가 깨졌다.
나는 두 팔을 쫙 벌려 탄환을 온몸으로 받았다.
파바바밧!
<업적>
[생명의 은인]
[본인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구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업적]
[업적 효과 : 누군가를 대신하여 물리적 공격, 또는 상태 이상에 걸릴 때 절대 사망하지 않는다. 단, 고통은 느껴진다.]
이미 온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라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번엔 진짜 죽었을 수도 있지. 이런 우스운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도 정신이 나가긴 나갔나 보다.
치지직―
[각성자 ‘조슈아 체스터’의 ‘연기는 그만두고, 진실을 고백해’의 씨앗 개화]
[각성자 ‘조슈아 체스터’는 각성자 ‘신지의’의 말에 영향을 받는다]
[고유 스킬 ‘호령여산(號令如山)’의 파괴력 증가]
그때, 기적 같은 현실이 나를 절망으로부터 건져 올렸다.
* * *
3년 전, 앨라배마주 베세머.
쨍그랑!
‘오늘은 오전부터 운이 좋네.’
바보 같은 외지인 하나가 공터 옆 코인 주차장에 떡하니 차를 세워놓았다. 이 넓은 주차장에 차가 한 대도 안 세워진 걸 보고 행운이라고 생각했겠지.
“이 지역 놈들이 여기에 왜 안 세우겠냐~ 나 같은 놈들이 다~ 털어가니까 그렇지.”
노래를 흥얼거리며 창문 안으로 몸을 쑥 집어넣고 콘솔 박스부터 열었다. 그러곤 지폐 몇 장과 동전을 전부 털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또 돈 될 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 조수석 스토리지 쪽으로도 손을 뻗었다.
쿵!
“악!”
그때였다. 누군가 내 옷깃을 잡아채 창문 밖으로 꺼냈고, 덕분에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뭐, 뭐야!”
“…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
소리를 버럭 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한 손엔 대형 마트의 비닐봉지를,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론 아이를 안아 든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아이 씨… 오전부터 운이 좋긴 개뿔이 좋아.’
나는 일단 모자를 눌러쓰며 주차장 밖으로 허겁지겁 내달렸다.
“조슈아 체스터!”
하지만 그놈이 내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녀석의 손에 내 지갑과 운전 면허증이 들린 게 보였다.
“어, 어어?!”
뒤늦게 바지 뒷주머니를 뒤져봤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너, 조슈아 체스터 맞아?”
“맞으면 어쩔 건데. 신고하게? 그래봤자 본전도 못 찾을걸? 여긴 경찰들도…….”
“아하하, 신기하다. 나도 조슈아야.”
“…뭐?”
탁―
녀석이 내 쪽으로 지갑을 다시 던졌다. 한 손으로 받은 후 현금부터 살폈다. 144달러 75센트. 돈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녀석의 손에 내 면허증이 그대로 들려 있었다.
‘도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
터벅, 터벅―
녀석이 내게 걸어왔다. 이 난리 통에도 녀석의 한쪽 팔에 안긴 아이는 여전히 잠에 들어 있었다.
“난 조슈아 크리머야. 지난주에 길드 때문에 여기로 이사 왔어.”
“그래서, 뭐.”
“아는 사람도 없고 내 나이 또래도 아무도 없어서 솔직히 좀 심심했거든.”
녀석은 자기 주머니에 내 면허증을 넣은 후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나랑 친구 해주면 안 될까?”
기대감으로 반짝거리는 갈색 눈동자. 그 뒤로 펼쳐진 파란 하늘.
점점 뜨거워지는 햇빛이 여름의 시작을 알린 날, 나는 조의 친구가 되었다.
* * *
조는 앨라배마 지역 길드인 ‘황무지’에 소속된 공략 보조 담당 길드원이었다. E급이다 보니 본격적인 헌터 활동은 어려워, 다른 헌터들이 몬스터를 잡는 사이에 부산물과 아이템을 수거하는 역할이었다.
‘그냥 심부름꾼이잖아.’
나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조의 얘기를 계속 들어주며 팬케이크를 입에 쑤셔 넣었다.
각성 전 그는 텍사스의 한 레스토랑 서빙 직원이었고, 그 레스토랑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해 벤자민까지 낳았다고 했다. 하지만 출산 후 아내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벤자민이 눈을 제대로 떠보기도 전에 죽었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병원으로부턴 벤자민이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럼에도 조는 좌절하거나 세상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핸드폰 배경 화면으로 설정된 결혼식 사진을 바라보며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겠다고 다짐할 뿐이었다.
“아빠, 베이컨 먹었어?”
“그럼. 네 건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먹으렴, 벤.”
조는 자신의 접시에 있던 베이컨을 벤자민의 접시로 옮긴 후 제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흐릿한 회색 눈동자를 가진 벤자민이 활짝 웃었다. 녀석은 입을 접시에 딱 붙이곤 포크로 접시를 쭉 쓸어 베이컨이 있는 곳을 찾아 헤맸다.
끼익―
그릇을 긁는 소리가 싫어 벤자민의 포크 밑으로 베이컨을 슬쩍 밀어 넣었다. 그러자 그 바보 같은 꼬맹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그저 헤벌레 웃으며 베이컨을 우물거렸다.
“애기 좋아해? 좋은 아빠가 되겠네.”
“좋아할 리가 있겠냐?”
그 이후에도 조와 벤자민은 내 일상에 파고들어 인생 자체를 야금야금 바꿔 놓기 시작했다.
녀석이 나를 길드에 소개한 덕분에 나도 조를 따라서 간간히 던전 공략을 따라가 일당을 쏠쏠히 챙겨왔다.
그 돈을 들고 장난감 가게에 가장 먼저 가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내가 이 부자를 만나고 난 뒤, 단 한 번도 약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소소한 일상이 주는 안정감에 취했다. 벤자민에게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고, 시간이 날 땐 옆집에 가 애플파이를 나누어 먹는 이 지독한 평화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걱―
애팔래치아 산맥 C급 던전의 보스 몬스터 ‘채광용 곡괭이’가 공격계 B급 헌터였던 사만다를 반으로 가르기 전까지.
“어, 어어……!”
“하, 속 시원하네.”
“아니, 난 죽일 생각까진 없었다고!”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파악할 때쯤 길드의 C급 헌터들이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사만다와 계속해서 부딪힌다 싶더니 결국 일을 친 것이다.
“매디슨, 쫄지 마. 높은 등급도 아니고 우리랑 똑같은 C급이라고.”
“그래도 보스 몬스터는 그 등급의 평균 공격력보다 높잖아!”
“하여간 새끼 질질 짜…….”
서걱―
그것은 이내 글렌과 매디슨의 목도 꿰뚫었다.
단 몇 분 만에 이곳에 있는 모든 헌터들의 목숨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어……?”
그와 동시에 내 눈앞도 순간 새카맣게 물들었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고 성큼 다가온 생명의 위협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텁―
그때 조가 내 팔을 잡아 커다란 바위 뒤로 숨겼다. 그러고 나서야 시야가 돌아왔다.
녀석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보스 몬스터와 나를 번갈아보다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체스터, 일단 넌 피해 있어. 내가 시간을 벌어 볼게."
쿵, 쿵―
녀석은 메고 있던 부산물 보관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에 멈추지 않고 인벤토리 안에 있던 모든 부산물까지 전부 꺼냈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일단 본부에 연락은 넣어뒀어. 아마 몇 시간만 있으면 다른 길드에 도움을 요청하든 뭐든 해서 구조팀이 올 거야.”
“구조팀이 오는 건 오는 건데, 넌 왜 갑자기 싸울 준비를 하냐고.”
내 말에 조가 픽 웃었다.
“공략집 보니까 저게 그냥 곡괭이처럼 보여도 사람 냄새를 엄청 잘 맡는다고 하더라.”
“너 설마…….”
“내가 시간을 벌 테니까 넌 그사이에 입구 쪽으로 뛰어.”
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죽어.”
부정적이나, 현실적인 내 말에 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내 말에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E급 스킬로는 C급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긴커녕 시간을 버는 것도 어렵다는 걸 조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벤자민은.”
“…….”
“벤자민은 어떡할 건데.”
꼬맹이의 이름을 꺼내자 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녀석의 눈에 눈물이 울컥울컥 차오르더니 이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야, 애 딸린 건실한 청년이랑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약쟁이였던 절도범 중에 하나가 희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약쟁이 아니냐?”
“…하지만 넌 비각성자잖아.”
“E급은 뭐 다를 것 같아?”
“헌터는 비각성자인 민간인을 지킬 의무가 있어.”
“그딴 의무 갖고 있는 새끼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다 X신같이 뒤졌잖아. 더 높은 등급 놈들도 안 갖고 있는 그런 의무감을 니가 가져서 뭐 하게.”
쿠구구궁―
우리의 냄새를 맡은 곡괭이가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다.
철컥―
총을 든 조가 바위 밖으로 달려 나갔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되면, 우리 벤을 잘 부탁해.”
“안 돼……!”
펑!
조가 쏜 탄환이 곡괭이의 몸통을 맞고 튕겨져 나왔다. 조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 흠집 사이로 작은 스파크를 만들어졌다. 곡괭이의 주의는 완전히 조를 향했다.
그것이 빙글빙글 돌며 조를 향해 위협적으로 날아들자 조는 상체를 숙여 곡괭이와 바닥 사이의 좁은 틈을 공략했다.
쾅!!
“아아아악!”
“조!!”
조의 몸이 곡괭이의 손잡이 부분에 맞고 저 멀리 튕겨졌다.
반대 방향으로, 조가 말한 던전 입구 방향으로 달려야 하는데… 내 다리는 그를 향하고 있었다.
제발 죽지만 말아 줘.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너는 살아서 벤자민의 옆에 있어야 해.
휘이이잉―
곡괭이가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고 조에게 달려갔다.
이젠 정말로 곡괭이가 우리의 코앞까지 왔다고 느낀 순간.
[각성자 조슈아 체스터]
[불 속성 개방]
[고유 스킬 ‘분노의 용암(Magma Fury)’ 개방]
[S급 공격계 스킬 ‘분노의 용암(Magma Fury)’]
[‘분노의 용암(Magma Fury)’ : 정해진 공간에 용암을 생성한다.]
[연계 패시브 스킬 ‘화염 돌격(Flare Rush)’ 개방]
[‘화염 돌격(Flare Rush)’ : 활성화 시 움직임을 따라 불길이 솟는다.]
신이 내게 기회를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