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덜그럭―
단서를 두 번째 미니어처 공간에 집어넣었다. 거친 표면의 돌덩이는 어느새 얄팍한 종이가 되어 드레스 안쪽으로 팔랑거리며 들어갔다. 그것이 단서가 된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자아에 목소리를 주입하며 하나 남은 상자 앞으로 걸어갔다.
별 네 개짜리의 공격도 웬만한 A급, 아니 조금 더 높게 쳐주면 S급 몬스터의 수준이었다. 본체의 크기가 커서 공격하기가 쉬웠을 뿐, 녀석의 변칙적인 패턴과 파괴력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별 다섯 개짜리는 아마 그것보다 훨씬 위험한 놈일 것이다.
터벅―
[★★★★★]
[시민 1]
[체력 : 30,000/30,000]
[※도전을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상자 위에 녀석의 정보와 아까까진 없던 경고문이 함께 붙어 있었다.
‘체력은 낮은데 말이지.’
하지만 몬스터의 이름으로 보았을 때 인간형일 가능성이 높다. 약간의 긴장감을 갖고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뭐야?”
인간형 몬스터를 생각하며 긴장한 채 연 상자 안에는 검은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내 모습이 훤히 보일 정도로 새카만 물이었다.
철벅―
얼마 안 있어 그 속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람의 등처럼 보이는 것이 가장 먼저 상자 밖으로 나타나더니 이내 길고 가느다란 다리도 쭉 빠져나왔다. 그것이 느릿하게 상자 밖으로 발을 내딛은 후 척추를 바로 펴자 새카만 머리와 긴 팔이 함께 생겨났다. 3미터는 족히 될 신장이 주는 본능적인 불쾌감이 발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시민 1은 오늘도 연극 대본에 자신의 대사가 없음을 알고 좌절합니다.]
[체력: 30,000/30,000]
낮은 체력, 몸은 종잇장처럼 얄팍하지만 큰 키와 길쭉한 팔과 다리가 위협적이다. 그리고 온통 새카만 전신.
‘불쾌해.’
징그럽거나 잔인한 것을 본 것도 아닌데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주는 생김새였다.
녀석은 가만히 선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터벅―
일단 녀석과 천천히 거리를 벌렸다. 어떤 공격을 할 지 모르는 놈이다. 지금은 적당히 녀석의 움직임을 봐야겠…….
“…어?”
쾅!!
녀석의 움직임을 볼 틈조차 없었다. 녀석의 검은 얼굴이 바로 내 앞에 온 걸 인지하자마자 몸이 붕 떴다.
“커헉……!”
눈앞이 아찔해졌다. 어디를 맞은 건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전신이 울렸고, 방향 감각이 사라진 탓에 낮말을 듣는 새로 어딘가에 서있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우웅―
나는 일단 손가락에 힘을 주어 방아쇠를 길게 당겼다. 그렇게 공기를 진동시킨 후 곧바로 허공에 발을 디뎠다.
“컥! 콜록, 커흑……!”
속이 뒤집히는 고통에서부터 겨우 정신을 차렸다. 나는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더욱 힘을 준 채로 밑을 내려다보았다.
[시민 1은 언제나 생각합니다.]
[자신에게도 대사가 생기는 날이 올까, 라고 말이죠.]
[체력 : 29,424/30,000]
녀석의 얄팍한 몸이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녀석의 상태를 살피던 중 그 손에 들린 메스의 끝에서 새빨간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윽!”
그제야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더 내려 몸을 보니 왼쪽 가슴 부근이 가로로 그어져 있었다.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니었기에 아이테르의 로브 효과로 조금씩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지만, 아까와 같은 속도로 공격이 휘몰아친다면 회복 속도가 절대로 따라가지 못할 게 예상됐다.
덜컥―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힘을 풀었다.
투쾅!
역시 녀석은 빛처럼 빠른 속도로 내가 있는 곳까지 펄쩍 뛰어올랐다.
킹, 킹, 킹―
“크읏……!”
실드로 녀석을 막았지만 녀석이 통제를 벗어난 기계처럼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실드를 긋기 시작한 탓에 유지가 어려웠다.
탕!!
결국 아예 실드에 자아를 붙인 채로 방아쇠를 당겼다. 새하얀 소리의 벽이 산산조각 나는 동시에 탄환이 녀석의 가슴을 관통했다.
[시민 1은 배역을 받기 위해 수십, 수백 번의 오디션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받은 역할은 여전히 시민 1입니다.]
[체력 : 21,633/30,000]
쿵―
탄환을 맞은 녀석이 힘없이 바닥 위로 떨어졌다.
탕, 탕, 탕―
‘너무 빨라.’
이어서 바닥에 있는 시민 1을 향해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지만 녀석은 몸을 굴러 그것들을 전부 피한 후 다시 일어섰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형태의 공격이었건만, 녀석의 몸에 닿는 건 단 한 개도 없었다.
‘역시 녹두 소환 안 하기를 잘했…….’
“아.”
무심코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 생각에 나도 모르게 짧게 탄식했다.
‘언니가 나를 믿지 않아서 그런가?’
녹두의 말이 또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방금 전에 그런 소리를 들어 놓고 저런 생각을 하다니, 나도 어지간히 학습 능력이 없나 보다.
쾅!!
그때 시민 1이 발로 벽을 디딘 후 곧장 몸을 돌려 나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깡―
배트로 바꾼 자아로 일단 메스부터 쳐냈다.
푹―
“큭……!”
하지만 녀석이 날아가던 메스를 다시 잡아채 내 팔을 찔렀다. 잠시 왼쪽 팔의 감각이 사라졌다가 다시 욱신거리는 고통이 느껴졌다.
콰그작!
녀석이 잠깐 몸을 멈춘 틈을 타 작살총을 녀석의 머리를 향해 쐈다. 소리로 된 작살은 녀석의 머리를 뚫은 후 단단히 고정됐다.
“으아아!!”
쾅!!
작살과 연결된 끈을 잡아 채찍 마냥 바닥을 향해 내리치자 녀석의 가벼운 몸이 그대로 끌어내려져 바닥에 처박혔다.
[시민 1은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체력 : 19,724/30,000]
잠깐의 쉴 틈도 없었다. 녀석이 조금이라도 무력화된 상태에서 가능한 공격을 전부 퍼부어야만 했다.
‘구원자의 무기 창고!’
펑!!
창고에서 바주카를 꺼내자마자 녀석을 향해 발포했다. 묵직한 포탄이 바닥에 엎어진 시민 1을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새하얀 공간이 흔들리고 미니어처가 있던 테이블도 좌우로 크게 흔들려 천막 분장실이 엉망이 되었다.
“으윽…….”
탱그랑―
그러고 나서야 팔에 박혔던 메스를 뽑을 여유가 생겼다. 왼팔에 꽂혔던 그것을 뽑아 녀석과 멀리 떨어진 곳에 던지자 검붉은 핏방울이 바닥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해 녀석이 누워 있을 바닥을 향해 실드도 들었다.
먼지바람이 여전히 바닥 전체에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감각이 둔해진 왼손으로 힘겹게 실드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론 녀석을 향해 자아를 겨눴다.
탕, 탕, 탕―
탄환이 바닥에 박힐 때마다 먼지바람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하얀 바닥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음에도 이상하게도 녀석의 형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딜 간 거야?”
콰그작―
뭔가 이상함을 느낄 때쯤, 이번엔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 소리만 들린 것이 아니었다.
“허억, 컥……!”
고개를 내리니 그곳엔 시민 1의 손에 잡혀 완전히 반대쪽으로 꺾여버린 내 오른쪽 발목이 있었다.
쿵!
한쪽 발로 착지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녀석이 내 몸을 다시 바닥으로 던져버리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또 다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져 이제 의식도 서서히 멀어지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시민 1에게 부족한 건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시민 1은 우선 자신의 몸에 피를 채우기로 했습니다.]
[체력 : 14,382/30,000]
녀석은 바닥에 떨어진 내 피를 손으로 마구 쓸어 담은 후 자신의 얼굴에 문질렀다. 그런 후 저 멀리 던져두었던 자신의 나이프를 향해 느릿하게 걸어갔다.
어디 하나 성한 곳 없는 몸을 겨우 일으킨 후 자아를 들었다. 제대로 서있을 수가 없어 팔이 계속 밑으로 내려갔지만 녀석의 몸에 반드시 맞히겠다는 일념으로 오른팔에 힘을 주었다.
타앙!
탄환이 힘겹게 빠져나와 시민 1의 등을 노렸다.
콰앙!
“아아악!!”
하지만 녀석은 너무나 쉽게 몸을 돌려 그것을 피했다. 오히려 내 바로 앞에 나타나 나이프를 쥔 주먹으로 내 명치를 쳐 올렸다. 내장이 뒤집히는 감각이 전신을 덮쳤다.
쿵―
공중으로 떴던 몸이 또다시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젠 정말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시민 1은 자신의 몸에 피를 채운 후 이번엔 피부에 관심을 갖습니다.]
[시민 1은 사람의 모습을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내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체력 : 14,382/30,000]
고개조차 움직이지 못해 눈동자만 굴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내 피를 맛본 녀석의 얼굴에 어느새 입이 생겨 있었다. 내 의식이 멀어질수록 녀석은 천천히 사람의 모습을 갖춰가는 중이었다.
우웅, 우웅―
힘을 겨우 짜내 방아쇠를 길게 당겼다. 공기가 진동하자 녀석의 가느다란 몸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내 손가락에 힘이 먼저 풀려 무의미한 공격이 되고 말았다.
[시민 1은 살구색 피부를 원합니다.]
[체력 : 12,766/30,000]
시민 1의 거대한 그림자가 내 몸 위로 걸렸다. 녀석은 실험 대상을 관찰하는 것처럼 미동도 않고 날 내려다보기만 했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떠올려야 하는데, 내가 사랑했던 이들의 얼굴이 자꾸만 스쳐지나갔다.
지유의 얼굴로 끝난 줄 알았던 이 바보 같은 주마등은 녹두의 모습으로 막을 내렸다.
‘이번엔 녹두가 성체가 되는 모습도 못 봤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번 회차는 분명히 전보다 더 많은 사람을 살렸고, 더 많은 재앙을 막았다. 모든 것이 올바르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녹두는 성장하지 못했다.
[시민 1이 괜찮은 피부를 발견했습니다.]
[체력 : 12,766/30,000]
스윽―
녀석이 메스의 끝으로 내 팔을 살짝 눌렀다. 그러나 아성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녹두로 머릿속이 가득 차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나한테도 얘기 못할 만큼 내가 못 미더운 거야?’
악에 바친 녹두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고 나서야 성장하지 못한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동반자인 내가 녹두에게 마음을 안 열어서 그런 거였어.’
녹두가 내게 오는 걸 어느샌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당연할수록 더 아끼고 사랑해 줘야 했는데, 나는 그저 이전 시간선의 녹두와 지금의 녹두를 비교하기만 했다. 성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위험한 상황에선 소환조차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결국 녹두의 성장을 막은 건, 녹두를 믿지 않은 나 때문이었다.
“미안해 녹두야…….”
나는 다 갈라진 목소리로 녹두에게 사과했다. 눈에서부터 눈물인지 피인지 알 수 없이 뜨거운 것들이 흘러내려 땅을 적셨다.
‘내가 널 못 믿었어. 내 멋대로 너의 한계를 정하고 진실을 숨겼어.’
우웅―
도저히 성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결국 녹두에게 머릿속으로 말을 걸자 팔찌가 반응했다.
‘내가… 정말 미안해.’
‘…….’
‘녹두 네 말대로 난 이미 끝을 보고 왔어. 100번의 회귀를 거쳐 지금의 내가 된 거야.’
우웅, 우웅―
이전보다 팔찌의 반응이 더 격해졌다.
‘스물세 번째의 회귀부터 지금까지 너는 나를 매번 찾아와 줬는데, 난 그런 널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어.’
우웅, 우웅, 우웅―
‘늦게 말해서 미안해.’
팔찌가 강하게 진동할수록 서서히 고통이 느껴졌다. 녀석의 메스가 내 팔을 거쳐 목을 향하고 있었다.
‘앞으로 더 의지할게. 부끄럽지 않은 동반자가 될게.’
‘…….’
‘그러니까… 한 번만, 도와줘.’
파아앗!
“윽?!”
그 순간 엄청난 빛이 내 두 눈을 가렸다. 손목에서 느껴지던 떨림도, 끔찍하게 아픈 발목과 감각이 무뎌진 왼팔도 더 이상 아무렇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내 눈앞에 푸른 글자가 반짝거렸다.
[소환수 ‘태양을 삼킨 늑대’가 ‘빛의 늑대’로 진화]
[빛의 늑대]
[성체]
[소환수와의 교감도가 대폭 상승]
[소환수 스킬 개방]
[S급 방어계 스킬 ‘신뢰‘]
[모든 공격을 방어하는 배리어를 소환한다. 배리어는 소환수의 등급보다 낮은 공격으로부터 완전 면역 상태를 유지하며, 배리어 내에 동반자가 있을 시 배리어 내 생물들의 자연 치유 능력이 대폭 상승한다.]
<사명>
[늑대의 동반자]
[동반자를 성장시켜라.]
[달성도 대폭 상승]
[달성도 : 100%]
[달성 완료]
[업적 ’늑대의 영원한 동반자‘ 개방]
[빛의 늑대 소환 시 소환수와 동반자의 공격력과 방어력이 동시에 상승한다.]
처음 보는 글자의 너머로, 새하얀 털을 가진 늑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