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반짇고리가 당신의 치수를 잽니다.]
[체력 : 111,423/120,000]
촤악!
이번엔 바구니에서 줄자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뱀처럼 꿈틀거리며 나를 향해 기어왔다.
탕!
“쳇.”
녀석의 움직임이 워낙 빠른 터라 공격은 빗겨 맞혔다. 나는 일단 낮말을 듣는 새로 뛰어올라 허공을 밟았다.
탁!
“윽!”
쿠구궁―
하지만 녀석도 빠르게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결국 녀석은 내 발목을 휘감아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몸이 바닥에 처박히자마자 나도 모르게 볼을 씹었는지 비릿한 액체가 입 안에 퍼졌다.
[반짇고리는 약이 올랐습니다.]
[체력 : 111,423/120,000]
겨우 몸을 일으키자 줄자 뒤로 굴러오는 실타래가 눈에 들어왔다.
탕!
“아우―!!”
자아의 방아쇠를 당김과 함께 녹두의 울음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 새하얀 탄환이 줄자에 명중하는 동시에 빛의 기둥은 성난 소처럼 달려오는 실타래를 쳐내 그것들의 경로를 바꾸었다.
‘약이 오르면 실타래, 치수를 재면 줄자 공격이다.’
지금까지의 패턴을 곱씹으며 구원자의 무기 창고에서 바주카를 꺼냈다. 묵직한 무게가 팔에 그대로 전해졌지만 나는 흔들림 없이 자세를 잡아 바구니를 향해 조준했다.
퍼엉!!
둔탁한 폭발음과 함께 소리 포탄을 발사하자마자 바로 자아를 확성기 형태로 바꾸어 방아쇠를 몇 번 더 당겼다. 아무리 빠르다곤 하나, 녀석의 커다란 몸집은 내 공격들을 피하기엔 너무나 둔했다.
콰과광!!
[반짇고리가 고통스러워합니다.]
[체력 : 99,314/120,000]
파바박!
실이 끼워진 바늘이 공중으로 높이 날아오르더니 이내 나를 향해 내리꽂혔다.
내가 간발의 차로 뒤로 굴러 피하자 바늘들은 무의미하게 바닥에 박혔다.
두두둑―
빠르게 검으로 바꾼 자아로 바늘 끝에 달린 실까지 잘라내니 그것들은 먼지처럼 사라졌다.
“윽!”
그때 내 발 바로 앞에 박힌 실에 다리가 걸려 중심을 잃었다.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중에도 등 바로 뒤로 서늘한 기운이 다가옴을 느꼈다.
“오지 마!!”
“아우!!”
쿠우웅―
내 목소리와 녹두의 울음소리에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크게 흔들렸다.
나는 재빨리 앞으로 구른 후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방금까지 내가 있던 곳에 바늘 수십 개가 꽂혀 있었다. 그것들을 연결하고 있던 실은 이미 끊어져 공중에서 팔랑거리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마워, 녹두야! 계속 공격 부탁해!”
‘으, 응!’
우선 지금까지 나온 패턴은 총 네 가지다. 나를 추격하는 바늘 폭풍, 내 몸을 묶는 줄자. 그리고 나의 경로를 방해하는 실타래와 실이 꿰어진 바늘.
녀석의 공격이 어느 정도 눈에 익었다. 실수만 하지 않으면 녹두가 공격할 틈은 물론, 아까처럼 내가 공격할 찬스도 생길 것이다.
타닥!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녀석이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나의 탄환과 녹두의 빛이 바구니를 계속해서 부쉈다.
[반짇고리가 당신의 치수를 잽니다.]
[체력 : 87,762/120,000]
줄자 두 개가 굴러 나와 나를 쫓았다. 촉수처럼 길게 뻗은 자와 거리를 벌리며 자아를 조준하자 녹두는 아예 그것을 자신의 이로 물어 끊었다.
[반짇고리가 불같이 화를 냅니다.]
[“이래선 옷을 만들 수 없잖니!”]
[체력 : 85,472/120,000]
‘새로운 패턴인가?!’
휘릭―
처음 보는 대사에 어깨를 흠칫 떨자마자 갑자기 줄자가 경로를 바꿔 녹두를 향했다.
“녹두야!”
타앙!!
소리를 지르며 곧바로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다. 녹두의 몸을 묶으려던 줄자는 탄환 때문에 찢어졌다. 하지만 금세 새로운 줄자가 나타나 녹두를 노렸다.
“녹두야, 돌아와!”
‘뭐?!’
키이잉―
녹두가 대답을 채 마치기도 전에 녀석의 형체가 연두색 빛으로 변해 그대로 내 팔찌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줄자에 몸이 졸려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녹두한테 괜한 일을 시켰어. 아직 성체도 아닌데.’
까득―
나도 모르게 이를 꽉 물어 이끼리 서로 맞닿는 소리가 났다.
“후욱.”
콰그작!!
자아를 작살총 형태로 바꿔 녀석의 몸에 박아 넣었다. 그러곤 다시 방아쇠를 당겨 녀석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아직 스틱스 강도 남아 있으니 조금 더 공격적으로 나와도 괜찮겠지.’
녀석은 내가 저를 향해 날아오자 뚜껑을 활짝 열어 나를 맞이했다.
쿵―
그 틈으로 박격포를 떨어트렸다. 바구니 손잡이를 지지대 삼아 밟아서 뛰어오르기 무섭게.
콰과과광!!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나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파편 몇 개가 내 쪽으로 튀어 얼굴이 긁혔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녀석의 생사가 더 중요했다.
흙먼지가 새하얀 공간을 가득 채우는 동시에 내 목에도 차곡히 내려앉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기침이 튀어나왔다.
[반짇고리가 처참해진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체력 : 8,405/120,000]
아직도 먼지에 가려져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체력을 순식간에 8천대로 떨어트려 놓았다.
철컥―
기세를 몰아 다시 내 손으로 돌려놓은 자아를 들고 방아쇠를 길게 당겼다.
푹―
“커헉……!”
먼지가 완전히 걷힘과 동시에 배가 타들어 가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무슨 상황이 일어난 건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사고 자체가 마비된 것 같아 그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반짇고리는 절반이 넘게 터져나가 더 이상 나무 바구니의 형체라고 볼 수 없었다. 그 안에 있던 재봉 도구들도 멀쩡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중 가장 날렵하고 굵은 바늘. 그 바늘이 내 배에 꽂혀 있었다.
[반짇고리가 통쾌한 기분을 느낍니다.]
[체력 : 8,405/120,000]
‘비명도 안 나와…….’
비명은 무슨 숨도 제대로 뱉을 수 없었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겨우 떠 자아를 든 손을 들었다.
탕―
어디에 맞긴 한 건지 파열음이 들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명에 삼켜졌다.
[★★★★]
[반짇고리]
[체력 : 0/120,000]
[상영까지 남은 시간 43분]
쿵―
상태창이 뜬 걸 확인하고 나서야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낮말을 듣는 새가 해제되자마자 나의 몸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10미터보다도 높은 곳에서 추락해서일까. 갈비뼈 어딘가에 금이 간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일단 바늘은 사라졌네…….’
배를 더듬자 차가운 금속 대신 뜨겁고 끈적한 액체의 감촉만 느껴졌다.
‘스틱스 강……!’
똑―
“허억……!”
물방울 소리와 함께 고통이 사라졌다. 몸을 일으켜 배를 내려다보자 언제 상처가 있었냐는 듯 말끔하게 치료되어 있었다.
“…으.”
손과 티셔츠는 피 범벅이었지만.
피 묻은 손을 대충 턴 후 반짇고리의 잔해 주변으로 발을 옮겼다. 방금 전까지 나와 녹두의 목숨을 앗아가려 했던 줄자와 실타래들이 처참하게 널려 있었다.
덜그럭―
그때 발에 묵직한 돌덩이가 닿았다. 그 위에 쌓인 실들을 치우고 그것을 들어 천천히 살폈다.
[‘Princess and Prince’라고 쓰인 대본 조각]
Princess의 ‘ss’가 바랜 것처럼 흐릿했다.
대놓고 ‘ss’라는 힌트를 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거라면 앞에 있던 단서들과 조합해서 가짜가 나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별 4개에 걸맞은 보상이라 배가 뚫린 보람 아닌 보람이 있었다.
키이잉―
“응?”
그때 녹두가 튀어나와 내 앞에 바로 섰다.
녀석은 아무런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리광은…….’
칭찬을 바라는 듯한 얼굴인지라 나는 녹두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툭―
하지만 녹두는 고개를 뒤로 뺀 후 입으로 내 손을 슬쩍 밀었다.
‘뭐야……?’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녹두를 처음 만났던 스물세 번째 시간선에서부터 지금까지, 녹두는 내 손길을 거절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 겪는 상황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녹두…….”
‘도대체 언니는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녹두의 날선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내가 다칠까 봐 그런 건 알겠어. 나도 처음엔 언니의 그런 다정한 점이 좋았거든.’
“…….”
‘그런데 아까 언니가 나를 강제로 들여보낼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녹두가 고개를 숙였다.
‘언니가 나를 믿지 않아서 그런가?’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나한테 안 알려주는 거야!’
녹두가 으르릉거렸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화가 난 얼굴이었지만 목소리엔 물기가 어려 있었다.
‘괴식가랑 싸운 이후로 언니 변했어! 알아?’
“내가?”
‘…이미 모든 것의 끝을 본 사람 같아졌다고.’
쿵―
녹두의 말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 녹두한텐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겠구나.’
녹두를 처음 만난 건 훨씬 오래전의 일이지만 98번 회귀한 ‘내’가 모든 기억을 리셋시키는 바람에 녹두의 기억은 그 이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바로 지난 회귀의 기억도 같이 날아갔어야 하지만, 녹두는 용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와 녹두는 기억하는 양 자체가 달랐다.
우린 동반자로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만, 볼 수 있는 풍경이 달랐던 것이다.
녹두는 여전히 송곳니를 드러낸 채로 말을 덧붙였다.
‘나는 이번에도 언니를 또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좋은데, 언니는 항상 슬픈 눈으로 나를 쓰다듬어. 꼭 곧 죽을 사람처럼 말이야.’
“…….”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얘기 못할 만큼 내가 못 미더운 거야?’
툭―
녹두는 내 손에 자신의 머리를 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이 피범벅이었던 내 손을 닦아주는 듯 따뜻했다.
‘내가 절대 보지 못하는 곳으로 언니가 또 사라질까 봐 무서워.’
“녹두야…….”
‘…언니, 미안. 나 잠깐만 쉴게.’
키이잉―
녹두는 다시 연두색 빛이 되어 내 팔찌 안으로 들어왔다.
어리석었다. 진실을 이야기해서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나의 이기심이 결국 나를 믿어주는 존재들, 내가 믿고 있는 존재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걸 보는 것 같아서 말이야.”
하미준 헌터가 했던 말이 다시금 귓가에 맴돌았다. 누군가 내 어깨에 커다란 바위를 얹어 놓은 것처럼 온몸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100번의 회귀, 100번의 실패, 100번의 좌절. 그리고 그 끝, 101번째의 시간선에 서있는 나.
걸어온 시간이 다른데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려고 했던 것부터 멍청한 짓이었다.
“하아아…….”
녹두가 그동안 참아온 감정들을 그대로 받아내려니 머리가 아팠다.
[상영까지 남은 시간 38분]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녹두에게 모든 걸 설명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날 도와주지 않았다.
‘일단, 할 일을 해야지.’
씁쓸한 기분과 함께 나는 미니어처 테이블 쪽으로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