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the lier imitates hero’s gift]
포스터 속 광대가 들고 있는 칼에는 짧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거짓말쟁이는 영웅의 재능을 모방한다…….”
미준이 중얼거렸다. 이곳에 들어온 4명 중 한 사람은 가짜라는 걸 알려주는 문장이었기에, 문장 자체가 큰 단서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문장이 쓰인 위치였다. 유려한 필기체의 그 문장은 광대가 들고 있는 칼에 쓰여 있다.
미준의 중얼거림을 들은 지의가 조용히 눈동자를 굴려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불안하게 떨리는 그의 눈동자에서 그의 엄지손가락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무기, ‘광대의 칼’이 반지의 형태로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광대의 칼’을 알고 있는 또 다른 사람, 미준도 입술을 살짝 비틀며 조슈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슈아는 애써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 피부로 느껴져 지금 당장이라도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단서들은 모두 조슈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건 이 공간에 있는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본인이 가짜라는 사실을 모르는 걸 수도 있어요.”
그때 지의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에이든 헌터?”
“TRUTH or DARE에서 거짓 반응이 나오긴 했지만, 결국 그 전투로 다친 것도 길드장님이니까요…….”
에이든이 힘겹게 말하자 조슈아는 눈을 크게 뜬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이든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진짜로 내가 가짜인 건가?’
이젠 조슈아 스스로도 자신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자신은 가짜가 아닌데, 모든 단서들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의의 말대로 가짜 스스로가 자신이 가짜라는 걸 모른다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딱―
그때 미준이 손가락을 튕겨 주의를 환기시켰다.
“일단 다음 장소로 이동할까? 아무래도 거기가 마지막 장소인 것 같아서 말이야.”
“마지막 장소요?”
지의의 물음에 미준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끝은 무대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커튼을 향해 있었다.
“가짜를 찾아서 무대 위로 올리라고 했잖아. 아마 저기가 단서를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겠지.”
“그럼 TRUTH or DARE도 또 해야 하는 거네요.”
에이든은 약간 긴장한 채로 커튼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둑어둑한 백스테이지를 밝히는 유일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탁―
지의가 가장 먼저 무대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뒤를 돌아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조슈아가 부상을 입었으니까 다음 질문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진실만 말하기로 해요.”
까득―
조슈아의 이가 서로 맞물리는 소리를 냈다. 반박하고 싶지만, 결국 자신의 거짓말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툭―
미준이 조슈아의 어깨를 토닥인 후 곁눈으로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악에 바친 듯한 푸른 눈동자가 가장 뜨거운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커튼 너머로 모두 이동하자 주위가 또다시 어둠으로 물들었다.
키이이잉―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두 개의 카드가 이번엔 미준의 앞에 등장했다.
[TRUTH : 이 카드를 고르면 당신은 무조건 진실만 이야기해야 합니다. 거짓을 이야기할 시 DARE 카드가 강제로 오픈됩니다.]
[DARE : 이 카드를 고르면 당신은 무조건 몬스터와 싸워야 합니다. 몬스터는 당신의 파괴력과 동일한 수준으로 등장합니다.]
[두 번째 도전자 : 하미준]
미준이 흥미로운 눈으로 카드를 천천히 읽었다.
“하미준 헌터, DF가 어떻게 되죠?”
“안 잰 지 좀 됐는데. S1 초반이었던 걸로 기억해.”
미준은 지의의 질문에 대답한 후 몸을 돌려 다른 헌터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거짓말할 생각은 없지만 혹시라도 DARE로 바뀌어도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믿을게요.”
“그래, 왕자님.”
에이든에게 윙크를 하며 미준이 앞으로 팔을 뻗었다.
투웅―
미준의 손이 TRUTH 카드에 닿자 DARE 카드는 사라졌다.
질문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들을 감싼 어두운 공간은 적막으로 물들어 갔다.
[당신이 신지의를 동료로 받아들인 순간은 언제입니까?]
[제한 시간 : 60초]
“하하, 나 원 이것 참…….”
질문이 나오자마자 미준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곤 자신의 뒤쪽에 있던 지의를 흘긋 바라보았다. 지의도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입을 벌린 채로 카드와 미준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신지의 헌터는 언제인 것 같아?”
“네? 아니,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매정하군. 그럼 이번 기회에 똑똑히 듣도록 해.”
미준이 목을 가다듬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나 대신 공격을 맞았을 때.”
지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미준이 말했다. 그는 픽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색도 낼 법한데 그런 티도 안 냈지.”
“…….”
“그건 거의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어. 희생 본능이라니, 나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담담하게 말을 쏟아내는 미준을 바라보던 조슈아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체스터, 일단 넌 피해 있어! 내가 시간을 벌어 볼게!”
쿵―
용암에 녹아버린 자신의 친구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친구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 컸던 크리머와 지의가 묘하게 겹쳐 보였다.
‘저 인간도 누군가에겐 크리머 같은 존재인가 보네.’
사라락―
[TRUTH]
[당신은 진실을 말했습니다.]
[두 번째 TRUTH or DARE 종료]
[세 번째 공간이 개방됩니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TRUTH 카드가 사라졌다. 미준이 한껏 당당한 얼굴로 헌터들을 바라보자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미준은 지의에게 성큼 다가가 허리를 살짝 숙인 후 입을 열었다.
“어땠어? 감동받아서 나한테 데이트 신청하고 싶은 마음이 막 들지 않아?”
“됐거든요.”
“한 번 상대해 줄 때도 됐는데, 역시 쉽지 않네.”
지의가 한숨을 쉬는 동안 그들을 에워싸던 어둠이 걷혔다.
미준의 예상대로 그들은 무대를 마주보는 관객석에 서있었다. 무대 위에는 갈색 소파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저기에 가짜를 앉혀야 하나 보네요.”
지의가 소파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슈아도 그 소파를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곳에서도 자신이 가짜라는 단서가 나온다면 저 소파에 앉게 되는 건 자신일 것이다.
조슈아는 떨리는 숨소리를 들킬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온몸을 울리는 게 느껴졌다.
“마침 좌석도 네 구역으로 나눠져 있으니까 흩어져서 찾아봐요!”
“알겠습니다!”
지의는 지시를 한 후 가장 중앙에 있던 관객석부터 살폈다. 접혀 있는 의자를 하나씩 펴보며 어딘가에 있을 가짜에 대한 단서를 꼼꼼하게 살폈다.
하지만 수십 분이 지나도록 그 누구도 단서와 관련된 걸 찾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의자를 펴고 접는 소리만 계속해서 울려 퍼질 뿐이었다.
“하아, 하아……. 거기도 아무것도 없나요?”
“네……! 밑 부분까지 손으로 전부 만져봤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의의 물음에 에이든이 대답한 후 허리를 폈다. 오랫동안 숙이고 있던 터라 척추뼈에서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에서도 앓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타타탁―
[가짜를 찾아내 그를 무대 위 소파에 앉히세요.]
[제한 시간 : 10분]
얼마 안 있어 허공에 글자가 나타났다. 그 밑엔 10:00에서 시작한 카운트다운이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일단 무대 앞으로 모일까?”
미준의 말에 모두 통로 쪽으로 나와 무대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아무런 수확 없이 모인 탓에 분위기는 또 다시 깊게 가라앉았다.
“지금까지 모은 단서라도 얘기해 보죠.”
“첫 번째 공간에선 2였어요. 똑같이 생긴 번호판이 두 개가 있었고, 아, 포스터도 두 장이었죠.”
“저랑 조슈아가 봤던 트럭에서도 똑같은 물품이 두 개씩 있었어요.”
에이든의 말에 반응한 후 지의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공간은 광대 포스터랑…….”
“이 쪽지지.”
지의의 말을 가로챈 미준이 품속에서 아까 지의가 분장실에서 발견한 쪽지를 내밀었다. 그것을 처음 보는 조슈아와 에이든이 고개를 쭉 빼고 쪽지에 적힌 글자를 보았다.
“왕자? 아, 공주도 있네요.”
“원래는 공주와 왕자인데 대본이 바래면서 S 두 개만 사라졌군요.”
미준은 다시 그 쪽지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6:21]
시간은 그들을 기다려 주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다들 의심 가는 사람을 짚어볼까요.”
지의의 말에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조슈아는 그 말이 사형선고라도 된 것처럼 불안하게 손을 덜덜 떨었다. 지의는 그런 그의 모습을 살짝 바라보다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저는 조슈아요.”
“…저도 길드장님.”
“고작 저 따위 증거 몇 개로 지금 날……!”
조슈아가 불같이 화를 내려다 다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본성이 새어나오는 빈도가 잦아졌고, 발화점 역시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자신에게 꽂히는 사람들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이제 받아들일 수밖에 없군.’
자신이 가짜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멍청한 가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무대 위의 소파를 바라보았다. 평범해 보이는 소파가 꼭 단두대처럼 느껴져 등골이 서늘해졌다.
“진짜의 생각까지 흉내를 낸다더니, 정말로 그런가 보네요. 저 스스로도 제가 가짜인 걸 몰랐으니 말이에요.”
조슈아가 사람들을 향해 웃음 섞인 말을 뱉었다. 그는 아까보다 차분한 태도로 한 사람씩 눈을 맞췄다.
“진짜 저는 던전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꼭 찾아주세요, 아시겠죠?”
조슈아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예쁜 웃음을 얼굴에 띠었다. 그 웃음마저 너무나 진짜 같아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에이든의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사실 난 좀 다르게 생각하는데.”
그때 미준이 입을 열었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미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조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싸늘한 검은 눈동자가 그에게서 지의 쪽으로 넘어갔다.
미준과 시선이 맞닿은 지의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미준이 고개를 살짝 꺾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우리 신지의 헌터가 가장 의심스럽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