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59화 (159/366)
  • 159화

    국제 부산물 학회 개최 당일, 한국

    달그락―

    세빈이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메리카노가 컵 속에서 작게 흔들렸다. 그의 맞은편엔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미준이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강세빈 헌터 말은, 나보고 강세빈 헌터를 대신해서 텍사스에 가달라는 말이지?”

    “네.”

    미준은 그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과학자 남매를 따라 학회에 참석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지만, 거기서 조슈아를 만나야 한다고 말한 건 아무래도 수상하게 들렸다.

    “신지의 헌터가 불릿 길드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를 만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말이지.”

    “저도 비슷하게 생각해요. 분명 다른 이유일 거예요.”

    세빈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게이트의 이상 현상 같은 것.”

    “…그, 노블레스 길드에서 터졌던 던전도 오만과 편견 속으로 연결되는 던전이었다면서?”

    “네. 등장인물에 빙의하는 던전은 처음이었어요.”

    세빈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러고 보니 하미준 헌터는 둘 다 겪어본 적이 없겠네요.”

    “아, 그러게.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하하하!”

    미준이 호탕하게 웃으며 뒤로 고개를 젖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아주 찰나 미준을 흘긋 쳐다봤지만 금방 시선을 돌려 재미있다는 듯 자기들끼리 키득거렸다.

    세빈은 그런 그를 뚱하게 쳐다 보다 이내 말을 덧붙였다.

    “지의는 이런 현상이 앞으로 세 번 정도 더 있을 거라고 했어요.”

    “신지의 헌터는 그런 걸 어떻게 알았대?”

    “…말해주지 않으니 저도 모르죠.”

    세빈이 입을 다물었다. 지의가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설명해 준 적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게 사라지지 않겠다는 약속만 했을 뿐. 그가 어떻게 그 정보들을 모았는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나도 더 물어볼 용기가 없었고.’

    세빈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은 걸 눈치 챈 미준이 상체를 다시 앞으로 숙여 세빈과 눈을 맞췄다.

    “숨기는 이유가 있겠지.”

    “지의가 저한테 뭘 숨기는 건 처음이에요.”

    세빈이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의는 거짓말을 한 적도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각성한 후, 정확히는 가평 S급 게이트 재생성 사건 때를 기점으로 지의는 변했다.

    “아무래도 가평 S급 게이트 안에서 지의 혼자만 뭔가를 본 것 같아요.”

    “가평에서 본 건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신지의 헌터가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 건 맞는 것 같아.”

    미준이 아인슈페너를 입에 전부 털어 넣은 후 말을 덧붙였다.

    “어쩌면 신지의 헌터는 그 이상한 던전이 생길 위치를 알고 있는 거 아닐까?”

    미준의 말에 세빈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볼 만한 가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든 후 미준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텍사스에서도 이상 현상이 생기면 그게 제일 유력한 가설이겠네요.”

    “신지의 헌터가 정의로운 건 알고 있지만 말이야.”

    미준이 말문을 트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신경 쓸 정도로 정의로운 사람이야?”

    세빈의 눈이 평소보다 더욱 커다래졌다.

    분명 지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람이다. 늘 자기보다 남을 더 신경 쓰는 경우가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좀 과하지 않나?’

    그들은 지의에게 도와달라고 한 적이 없고, 심지어 노블레스는 지의를 먼저 납치했다.

    앞뒤가 들어맞지 않는 상황에 세빈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겹겹이 쌓였던 걱정은 어느새 순수한 의문이 되어 자신을 짓눌렀다.

    드르륵―

    미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세빈을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뭐, 내가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지. 조슈아 군을 또 보게 생겼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뭘. 나도 신지의 헌터의 행동이 슬슬 궁금해지던 참이었으니까.”

    의자에 걸쳐놓았던 코트를 들며 미준이 한마디 덧붙였다.

    “둘이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솔직하게 얘기 좀 해봐. 강세빈 헌터는 신지의 헌터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줄 거잖아.”

    “…….”

    “어머, 진짜였네.”

    ‘사람 다 됐네.’

    미준은 변해가는 세빈의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감정이 없는 괴물보다 친구의 안전을 걱정하느라 전전긍긍 할 줄 아는 사람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난 바로 표 끊어서 가볼게. 우리 말괄량이 아가씨가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무슨 일 있으면 알려주세요.”

    “오냐.”

    미준이 손을 흔들며 그대로 카페를 나섰다.

    “하아…….”

    세빈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댄 채로 이마를 짚었다.

    ‘지의는 대체 뭐가 무서워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거지?’

    지의의 말이라면 뭐든지 믿을 준비가 돼있었다. 그가 사실 인간이 아니라거나,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생각이었다.

    그의 정체가 무엇이든 자신의 소꿉친구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세빈은 소설가의 파편에 들어가 있을 때 용기를 내서 물었다. 하지만 그의 소꿉친구는 끝까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끼익―

    한껏 무거워진 마음과 함께 세빈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픽업대에 컵을 가져다 놓은 후 카페를 나서자 제법 차가워진 밤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그가 걸친 ‘검은 뱀의 허물’ 덕에 몸은 따뜻했지만 그와 별개로 바람에 닿은 살갗은 점점 차가워졌다.

    “강세빈 헌터?”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주차장 쪽으로 몸을 돌리자 그의 앞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아, 회장님.”

    “우연이군. 약속이라도 있었나?”

    “네. 잠깐 볼일이 있어서요.”

    치지직―

    “…응?”

    그때, 세빈의 눈앞에 갑작스러운 노이즈가 생겨났다. 갑작스레 가려진 시야에 그가 한 발 뒤로 물러나 주위를 살폈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피곤해서 이상한 게 보이네요.”

    “저런, 젊은 나이에 벌써 그러면 안 되지.”

    치지직―

    ‘진짜 뭐지?’

    또다시 세빈이 보는 풍경에 커다란 금이 생겼다. 눈앞에 있던 강희의 모습까지 두 개로 보이기까지 해 그가 이마를 짚은 그 순간.

    끼이익―

    “윽……!”

    어느 순간 발밑에 생겨난 대리석 문이 열렸고, 그를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쿵―

    문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엔 강희만이 남았다.

    “푸흡.”

    강희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입을 꾹 다물었지만 잇새로 새어나오는 거친 숨은 숨길 수가 없었다.

    한참 몸을 떨며 웃던 그가 세빈이 서있던 곳을 조심스레 밟았다.

    “부디 내 작품의 좋은 재료가 되어줬으면 좋겠네.”

    그는 샐쭉 웃더니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잊힐 인간이니 죄책감은 가질 필요가 없겠지, 그치?”

    * * *

    현재, 텍사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조슈아가 난색하며 말했다. 깊게 팬 미간이 그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긴 믿기 힘들겠지.’

    자신의 몸에 이식된 것이 세상을 지키는 부적이 아니라 세상을 파괴하는데 쓰이는 재료고, 그것을 파괴하면 특수한 조건을 가진 던전이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그 어떤 사람이 덜컥 믿을 수 있을까.

    난 그런 조슈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가 정말로 벤자민이랑 같이 평화롭게 살고 싶다면 믿는 게 좋을 거야.”

    “…….”

    조슈아는 뾰로통한 얼굴로 허공을 빤히 노려다 보았다. 자신의 상태창을 살펴보고 있는 눈치였다.

    “사명 보상은?”

    “안 나와 있어.”

    “달성도는?”

    “50퍼센트.”

    “…이미 누구한테 과거를 이야기했나 봐?”

    질문 폭탄이 짜증났는지 그는 미간을 한 번 짚은 후 입을 열었다.

    “리즈. 내 비서 겸 우리 길드 소속 S급 헌터.”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 같아서 잠깐 생각에 잠길 때쯤, 다부진 체격을 가진 여자가 내 기억을 스쳤다.

    “그 연회장에서 게이트 발생 안내한 사람?”

    “기억력이 좋네. 맞아.”

    그제야 인상을 핀 조슈아가 말을 이었다.

    “리즈는 무슨 일이 발생해도 딱히 의문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 오히려 말하기 편하더라고.”

    “무뚝뚝해 보이긴 했지.”

    “거의 로봇이야. 내가 없을 때 벤자민을 돌볼 사람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말했는데, 다행히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 주더라고.”

    로봇이라. 잠깐 떠올린 사무적이고 경직된 그의 모습은 확실히 로봇 같긴 했다.

    “리즈한테 말한 것만으로 50퍼센트가 한 번에 오르길래 의외로 쉽게 완료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달성도 상승 조건이라도 생긴 거야?”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조슈아 체스터’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놀라움]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나를 봤다.

    “맞아. 내 업을 파괴해야 달성도가 올라간다고 했어.”

    “흐음.”

    “대체 업이라는 게 뭔지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있어야지…….”

    그가 툴툴거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보상을 알 수 없는 사명과 그 사명의 달성도를 올리기 위한 조건인 업. 둘 사이의 인과 관계는 모르겠지만, 해결해야 하는 순서는 분명했다.

    ‘창조자의 파편을 파괴해서 그를 자유롭게 한 후에 벤자민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

    파편부터 해결해야 하는 것이 좀 갑작스럽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조슈아.”

    “왜.”

    “벤자민에게 진실을 말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 아니면 끝까지 모른 척하고 LA 출신 길드장으로 사는 것. 둘 중에 하나 골라.”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조슈아 체스터’가 동요한다.]

    조슈아가 눈을 크게 떴다. 난 그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실상 내 질문은 창조자와의 연을 끊겠냐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숨은 뜻을 조슈아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아니. 난 둘 다 고르겠어.”

    “…….”

    “난 스스로의 힘으로 LA 출신의 잘난 길드장인 것처럼 연기할 거고 벤자민에게도 용서를 구할 거야.”

    [발언 결과 : 다짐]

    “그래야 끝까지 벤자민을 지킬 수 있으니까.”

    “…일단 창조자의 파편은 부수겠다는 거지?”

    “그래.”

    텁―

    그가 내 손을 잡아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일방적인 악수이자, 임시 동맹의 약속이었다.

    딩동―

    그의 행동에 어이없어하기도 잠시. 갑자기 집무실에서 전자 알림 음이 울려 퍼졌다.

    ―리즈 무캄 님으로부터의 전화입니다. 연결하시겠습니까?

    조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전화를 연결했다.

    ―리즈 무캄 님과 연결합니다.

    ―네, 길드장님. 접니다.

    “무슨 일이에요?”

    조슈아가 연기 톤으로 대답하자 집무실 어딘가에 있을 스피커에서 리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따로 약속을 만든 기억은 없는데……. 누구죠?”

    ―그게…….

    잠깐의 침묵 후 리즈가 말을 덧붙였다.

    ―한국의 하미준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