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53화 (153/366)
  • 153화

    “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직원에게서 업무용 핸드폰을 다시 지급받은 후 협회 건물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꽤 차가워진 공기가 피부에 닿아 로브의 지퍼를 위로 쭉 올려 목까지 가렸다.

    ‘라파엘라가 부수지만 않았어도…….’

    속이 살짝 끓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든 결과만 놓고 보면 다 잘 풀렸으니까.

    길드전이 끝난 후 노블레스는 다시 유럽 길드 1위를 차지했다. 유럽에 존재하는 던전의 절반에 해당하는 양의 소유권을 얻었고, 흡수한 소형 길드 중 하나를 연구 중심 길드로 개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네 거짓말 덕에 내가 던전의 이상 현상을 연구하는 인간이 되어버렸으니까 말이야.’

    …라는 원망 섞인 말을 듣긴 했지만.

    끼이익―

    아자디바르 남매가 묵고 있는 L 호텔의 로비로 들어갔다. 프론트는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라운지에서 밥 먹고 있다고 들었는데…….’

    라운지 쪽으로 몸을 돌려 내부를 슬쩍 훑어보자 창가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자디바르 남매와 미래 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발견한 나는 인벤토리에서 자동 통역기를 꺼내 귀에 꽂은 후 라운지 입구로 발을 들였다.

    “신지의 헌터님 맞으시죠?”

    “아, 네.”

    “안미래 님의 테이블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미리 이야기를 해놓았는지 단정한 정장 차림의 직원이 다가와 나를 미래 씨가 있는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어, 왔냐.”

    “신지의 헌터님!”

    “신지의 헌터님~!”

    아자디바르 남매는 햄버거를 썰다 말고 동시에 나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나도 남매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미래 씨의 옆자리에 앉아 직원이 건네주는 메뉴 태블릿을 받았다.

    “헌터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어요!”

    “맞아요! 그, 왜, 저희가 액체형 배리어의 재료를 몬스터 고기로 했었잖아요! 그게 세상에……!”

    “얘기는 이따가 하고 밥이나 처먹어. 너희들 며칠 동안 포도당 꽂고 연구한 거 다 안다.”

    “윽.”

    잔뜩 신난 얼굴로 대화를 시작하려던 남매의 말을 미래 씨가 쳐냈다.

    “밥도 안 먹고 연구만 한 거예요?!”

    “진짜 마지막 단계였거든요…….”

    무하가 머쓱한 듯 웃으며 테이블 중앙에 있던 스테이크를 잘라서 자기 접시에 올려놓았다.

    ‘지금 보니 음식이 엄청 많네.’

    남매의 앞에 수제 햄버거가 한 접시씩 놓인 것도 모자라 클럽 샌드위치, 파스타, 스테이크 같은 온갖 메인 메뉴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됐던 거냐?”

    “좀 일이 있었어요. 업무용 핸드폰도 고장 났었고.”

    “작정하고 부수지 않는 이상 고장 날 일이 거의 없는데. 희한하네.”

    누군가 작정하고 부순 거라고 말할 수 없어서 그냥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태블릿으로 딸기 주스를 주문한 후 직원에게 건넸다.

    “쟤가 잠깐 얘기했던 것처럼 재료와 배합 방식을 바꿨어. 그랬더니 제작 기간이 거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더라.”

    “고생하셨겠네요.”

    “그래도 재밌었어요!”

    미나가 파스타를 먹다 말고 대화에 참여했다.

    “한 번도 이런 최첨단 장비들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맞아요! 물질 하나 추출하려면 하루 종일 그것만 붙잡고 있어야 했는데. 그걸 추출기가 대신 해주니까 엄청 편했어요!”

    미나보다 차분한 성격의 무하까지 연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예약하면 사용할 수는 있다고 하지만, 저희 같은 말단에 어린 길드원들은 항상 꼴찌로 밀려났어요.”

    “뭐, 우습게도 그게 이놈들의 강점이 됐지.”

    미래 씨가 그렇게 말하곤 감자튀김을 케첩에 찍어 입에 넣었다.

    “장비로 돌리면 세 시간이면 끝날 일을 이 녀석들은 사흘씩 붙잡으면서 연구를 해왔으니 말야. 이 녀석들 인내심이 보통이 아니야.”

    “어, 저희 칭찬해 주신 거 맞죠?”

    “멍청할 정도로 참을성이 좋다는 얘기다, 머저리들아. 밥이나 먹어.”

    “네에~”

    두 사람이 마저 식사를 하는 동안 내가 주문한 딸기 주스가 나왔다. 한 모금 마시니 상큼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나랑 무하를 연구원으로 채용하신다고 했죠? 윈디 길드랑도 얘기해 본 거예요?”

    “어. 그쪽 길드장이랑 얘기 끝났고 일단은 파견직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이 녀석들 계약이 내년 6월까지라고 해서.”

    미래 씨가 샌드위치와 함께 나온 올리브를 질겅거렸다.

    “윈디 놈들도 나쁜 놈은 아니더라.”

    “왜요?”

    “진짜 독한 새끼들 같았으면 파견직은 무슨, 얘네들 강제로 귀국시키고 곧장 윈디 이름으로 발표시켰을 테니까.”

    하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액체 배리어 개발은 미래 씨와의 공동 연구이긴 하지만 초기 아이디어와 큰 틀은 미나와 무하의 것이다. 만약 윈디 길드가 미래 씨가 말한 대로 행동했으면 비난은 피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미래 씨가 정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기엔 약간 애매해졌을 것이다.

    식사를 얼추 끝낸 미나와 무하가 탄산음료로 입가심을 하고 있었다.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초롱초롱한 네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했다.

    “그럼 한국엔 다시 언제 올 거예요?”

    “비자 받는 대로 바로 오려고 했는데, 소장님은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아요.”

    미나는 그렇게 말하곤 미래 씨를 빤히 쳐다보았다.

    달그락―

    미래 씨가 마시던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연구는 결국 아이디어 싸움이고 시간 싸움이야. 누가 더 빨리 좋은 아이디어를 적절한 근거와 함께 발표하느냐가 관건이지.”

    “헉, 소장님 설마…….”

    탱그랑―

    방울 토마토를 향해 뻗었던 무하의 포크가 그릇 위로 떨어지는 동시에, 미나는 입을 쩍 벌린 채 미래 씨를 바라보았다. 생기 있는 이 공간에서 이 남매의 시간만 멈춘 것처럼 그 모습 그대로 굳었다.

    “바, 바, 발표요?”

    “언제, 어, 언제 그런 걸 하셨어요?”

    “국제 부산물 학회가 2주 후에 열린다길래 오랜만에 신청했다. 내 이름도 같이 올리긴 했는데 발표자는 늬들로 해놨고.”

    남매가 동시에 입을 틀어막았다. 안 그래도 큰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더 커졌다.

    “아니, 그, 근데 저희는 학회 회원도 아닌데 어떻게 발표를…….”

    “몰라. 물어봤더니 해준다는데? 오히려 비행기 표값까지 준다고 하더라.”

    ‘미래 씨가 엄청난 거물이란 걸 가끔 까먹는단 말이지…….’

    학계에서 이 인간의 위치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잊고 있었다.

    나는 잔뜩 놀란 아자디바르 남매를 진정시킨 후 다시 미래 씨에게 물어보았다.

    “어디서 하는 거예요?”

    “텍사스 오스틴. 장거리 비행할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X 같네.”

    ‘텍사스라고……?’

    묘한 기시감이 들어 곧바로 인벤토리를 열었다. 눈으로 한참 훑고 나서야 내가 찾던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사락―

    [Guild Bullet]

    [Joshua Chester]

    [Master]

    사도 ‘가면’이자 불릿 길드의 길드장, 조슈아의 명함이었다.

    그의 지문이 찍힌 명함의 가장 밑엔 길드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208 Barton Springs Rd, Austin, TX]

    역시 내 기억이 맞았다. 명함에 적힌 불릿 길드의 본부 위치는 텍사스였다.

    ‘학회를 핑계 삼아 따라가서 조슈아를 만나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저, 저, 발표라곤 고등학생 때 문학 시간에 시 읽어 본 게 전부인데 괜찮을까요?”

    “괜찮고 자시고 간에 일단 해야지. 평생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을 셈이었냐?”

    “물론 그건 아니지만…….”

    무하의 불안 섞인 말에 미래 씨가 빠르게 쏘아붙였다. 걱정이 가득한 남매를 향해 말을 건넸다.

    “미래 씨 앞에서도 발표 잘했잖아요. 미나랑 무하라면 더 큰 장소에서도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신지의 헌터님…….”

    “헌터님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웬 어리광이냐. 나이도 몇 살 차이 안 나면서."

    ‘미나, 나이스!’

    미나의 말 덕분에 내가 이야기를 꺼내기 쉬워졌다.

    나는 딸기 주스로 목을 축인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래 씨, 혹시 저도 학회에 같이 갈 수 있을까요?”

    “뭐라고?”

    미래 씨가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나를 쳐다보았다. 의외라는 눈치였다.

    “너, 갑자기 공부하려는 건 아니지?”

    “에이, 그냥 미나랑 무하 응원하러 가고 싶어서요. 그리고 만날 사람도 있고.”

    “텍사스에?”

    “네. 길드장 하나를 소개받았거든요.”

    “허, 참…….”

    미래 씨가 헛웃음을 터트린 후 다시 맥주를 마셨다.

    “내가 줄 수 있는 초청장이 있긴 해. 정 오고 싶으면 그거라도 쓰지, 뭐.”

    “정말요?! 진짜로 신지의 헌터님 오시는 거예요?”

    “너~무 좋아!”

    미나와 무하가 싱글벙글 웃으며 학회에 가서 하고 싶은 일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미래 씨가 남매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는 동안 나는 인벤토리 속 조슈아의 명함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어떤 업을 짊어지게 된 건지 궁금하네.’

    * * *

    “왜 자꾸 그딴 실수를 반복하는 거냐고!”

    불릿 길드 본부, 잔뜩 날이 선 조슈아의 목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졌다. 로비를 오가던 길드원들과 안내 데스크에 있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의 길드장에게로 꽂혔다.

    크게 뜬 눈과 파르르 떨리는 주먹에서,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조슈아의 앞엔 갓 던전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모습의 헌터들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패턴 확인하라고 내가 몇 번을 얘기했는데 그걸 또 까먹고 그냥 잡…….”

    빠르게 말을 쏟아내던 조슈아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동안 로비는 정적에 빠졌다.

    “죄송해요. 밀라 씨, 채프먼 씨.”

    “네? 아니요, 뭐… 저희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이 다 있는 앞에서 소리를 지른 건 제 잘못입니다.”

    소리를 언제 질렀냐는 듯 조슈아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헌터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헌터들은 손사래를 치며 상황을 정리했다.

    다시 고개를 든 조슈아가 인벤토리에서 카드를 꺼내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오늘도 고생하셨고 식사는 이 카드로 결제하세요. 보고서랑 같이 반납해 주시면 됩니다.”

    “오, 감사합니다. 길드장님.”

    “네,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조슈아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처음 보는 사람의 호감을 살 정도로 예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터벅―

    그는 몸을 돌려 자신의 집무실과 바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요즘 왜 이렇게 화를 많이 내신대?”

    “낸들 아냐. 저럴 때마다 진짜 다른 사람 같아서 무서워 죽겠어.”

    로비에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슈아의 귀에 하나둘씩 꽂혔다.

    “근데 방금 완전 남부 억양이었네.”

    “그러니까. LA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나?”

    1층의 카페테리아 주위에 있던 길드원들이 속닥거렸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조슈아에게도 선명하게 들렸다.

    “알고 보니까 그동안 연기했던 거 아냐?”

    쿵―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조슈아를 짓눌렀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지만 그는 애써 그 말을 무시하며 로비를 계속해서 가로질렀다.

    ‘이게 다 그 SS급이 나타난 이후부터야.’

    지의가 각성한 이후부터 그의 완벽했던 ‘가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완벽한 연기로 감췄던 자신의 콤플렉스와 강박적이고 예민한 성격을 이젠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다.

    까득―

    꽉 문 이가 서로 맞부딪혀 갈렸다. 조슈아는 누가 제 모습을 볼까 싶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빠르게 몸을 틀었다.

    ―올라갑니다.

    닫힘 버튼을 누르자마자 안내 음성과 함께 조슈아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가장 꼭대기 층으로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수를 써야만 해…….”

    그는 엘리베이터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울 안의 그에게 알라바마의 빈민가를 배회하던 어린 날의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