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52화 (152/366)
  • 152화

    【위선과 선】

    타닥―

    소설가의 업을 완전히 파괴해 버린 후에야 나와 레일리도 다시 레일리의 집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윽…….”

    머리가 핑 돌아 그대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섬유 유연제 향이 훅 끼쳤다.

    두통이 조금 사그라들 때쯤 눈을 뜨자 다들 어딘가에 기댄 채 숨을 돌리고 있는 게 보였다.

    ‘얼마나 지난 거지?’

    미식가의 파편에선 하루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있었을 뿐인데 밖의 시간은 몇 주가 흘렀었다. 이번 소설가의 파편 안에서 적어도 3주 정도는 보냈을 텐데……. 만약 미식가의 파편 때와 같은 시간 개념이라면, 던전 밖 시간으로 환산하면 몇 달은 지났을 거다.

    우웅―

    불길한 예감과 함께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렸다.

    “하아… 여보세요.”

    핸드폰의 주인은 세빈이였다.

    세빈이는 내가 앉은 소파의 등받이를 팔로 지탱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신지의 헌터랑 접촉했어? 무사한 거 맞지?

    하미준 헌터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평소 그의 목소리 톤보다 살짝 격양되어 있는 듯했다.

    세빈이에게 입 모양으로 하미준 헌터냐고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빈이는 마른세수를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일찍도 물어 보시네요. 지의랑 만났고, 무사합니다.”

    ―공식 발표 뜨자마자 연락한 거니까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 길드전 종료된 지 아직 두 시간 밖에 안 지났잖아.

    “두… 시간이요?”

    하미준 헌터와 세빈이의 말이 귀에 꽂히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집무실의 공기가 순간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내 레일리가 손가락을 튕기며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Dec/2/3:57AM]

    하미준 헌터의 말을 증명하듯, 레일리의 핸드폰은 우리가 알스 섬 던전 밖으로 나왔을 때에서 고작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다행이다.’

    실종 사실이 알려졌으면 그걸 수습하느라 정신없을 뻔했는데. 다행히 던전 밖은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협회에서는 다른 말 없었어요? 저랑 최민 헌터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의랑은 한동안 연락이 안 됐을 텐데.”

    ―아직 모르는 것 같아. 아, 대신 미래가 좀 찾더라.

    ‘미래 씨가?’

    세빈이의 팔을 두드려 전화를 바꿔 달라는 신호를 보내자 금세 세빈이가 내게 핸드폰을 건넸다.

    “네, 하미준 헌터. 저예요.”

    ―신지의 헌터! 무사한 거지? 우리 사랑스러운 엔젤이 납치됐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

    “미래 씨가 저 찾았다고요?”

    ―아, 맞아 그렇지.

    하미준 헌터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신지의 헌터가 데려온 그 쌍둥이들이 제대로 한 건 한 모양이야.

    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내가 되묻기 전에 하미준 헌터가 먼저 말을 이었다.

    ―미래한테 슬쩍 떠보니까 걔네들이랑 했던 연구가 거의 성공했다고 봐도 되는 수준이라고 하더라고.

    “와, 와…….”

    ―비자 때문에 다음 주 중으로 귀국할 예정이래. 대신 미래가 윈디 길드에 공동 연구 제안서를 보내 아예 정식 연구원으로 채용할 셈인가 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모든 시간선에서 전부 성공한 실험이긴 했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랐다. 아자디바르 남매는 갓 성인이 된 나이였고, 길드 내에서 어린아이 취급을 받으며 제대로 된 연구를 진행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가능성을 믿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내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전신을 훑었다.

    ―신지의 헌터? 듣고 있어?

    “아, 네. 듣고 있어요.”

    ―아무튼 미래한테는 내가 대충 둘러댔어. 돌아와서 연락하면 될 거야.

    “고마워요, 하미준 헌터.”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말에 각성자 ‘하미준’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흐뭇함]

    낮게 웃는 하미준 헌터의 음성이 귀에 꽂혔다.

    ―별말씀을. 강세빈 헌터랑 최민 헌터 손 꼭 잡고 잘 와.

    “애기도 아니고……. 일단 알겠어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전화를 끊은 후 세빈이에게 다시 핸드폰을 건넸다.

    창조자의 파편과 사도들의 업 파괴. 그리고 배리어 연구까지.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남은 사도는 셋, 그중 두 명은 현재 위치까지 충분히 파악 가능한 상태다.

    지옥도가 열린 시점은 내가 각성한 해의 다음 해 겨울이다. 즉, 지금 내겐 1년 정도의 시간이 더 남은 셈이다.

    지금 속도대로만 갈 수 있다면 1년 안에 충분히 모든 파편을 파괴할 수 있다.

    ‘사도와 동료가 될 수 있단 걸 이번 기회를 통해 알게 됐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레일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새까맣게 잊고 있었군.”

    “뭐가? 우왓.”

    탁―

    레일리가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던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아 곧장 확인했다.

    “내 핸드폰……!”

    레일리가 던져 준 것은 내 개인용 핸드폰이었다. 액정이 약간 깨진 걸 제외하곤 멀쩡했다.

    ‘어, 근데 잠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레일리를 다시 쳐다보았다.

    “이거 인벤토리에 어떻게 넣었어?”

    인벤토리는 던전에서 얻은 물건이나 던전 부산물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는 물건만 담을 수 있다. 그래서 보통 헌터들은 업무용 핸드폰 말고도 개인용 핸드폰에도 극소량의 부산물을 주입해 인벤토리에 보관한다.

    부산물 연구소에 요청하면 하루 이틀 내에 작업이 완료된다고 하는데. 이번엔 그럴 시간이 없어서 그냥 들고 다녔다.

    ‘설마…….’

    “너 데려오자마자 우리 쪽에서 손 좀 봤다.”

    “허…….”

    “설마 평생 저걸 그냥 들고 다닐 생각이었나?”

    레일리가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말을 말자…….’

    언젠가 해야 할 작업이기도 했으니까. 대신 해줬다고 생각하는 게 내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내 연락처도 추가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곧장 연락하도록.”

    레일리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핸드폰 화면을 두드렸다. 하지만 배터리가 나갔는지 반응이 없었다. 결국 한숨을 길게 쉰 후 핸드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지의야, 이제 돌아가자.”

    세빈이가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올려놓자, 어느새 최민 헌터까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레일리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지의는 너희랑 같이 못 돌아갈 것 같은데.”

    “…마음 같아선 당신들의 만행을 전부 알리고 싶지만 지의가 원하지 않을 거라서 참는 겁니다. 자극하지 마시죠.”

    “저희 길드장님의 말은 그게 아니에요~”

    삭막해진 분위기가 라파엘라의 나른한 목소리에 순식간에 풀어졌다. 세빈이의 시선이 레일리에서 라파엘라 쪽으로 옮겨갔다.

    “지금 지의 자매님은 여권이 없잖아요~ 애초에 이 나라에 입국했다는 기록이 없으니까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어려울 거고요.”

    “너희는 너희대로 귀국해라. 지의는 알렌이 안전하게 데려다줄 테니까.”

    내 손등에 얹힌 세빈이의 손이 살짝 떨렸다.

    ‘자기 상식 밖이니까 그렇겠지.’

    세빈이는 내가 여기로 납치된 것부터 분노했을 텐데, 돌아갈 때까지 노블레스의 뜻대로 굴러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텁―

    세빈이와 최민 헌터의 팔을 잡아 당겼다. 두 사람은 순순히 내 쪽으로 끌려와 주었다.

    나는 내 모습이 비칠 정도로 새카만 눈동자와 불꽃이 담긴 듯한 검붉은 눈동자를 차례로 보며 입을 열었다.

    “둘 다 내 걱정 말고 귀국해요. 난 오늘 중으로 알렌 통해서 집에 들어갈 테니까, 알았죠?”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수긍]

    둘 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도 나보다 큰 사람들이 왠지 모르게 귀엽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밖으로 웃음이 샜다.

    “레일리.”

    “왜 그러지?”

    “대신 귀국 비행기 표값은 네가 내.”

    “푸훕. 쿨럭, 켁…….”

    내 말이 끝나자마자 라파엘라가 웃음을 토해냈다. 사레들린 것처럼 무마해 보려 한 것 같지만, 나 때문에 웃은 거란 걸 오히려 더 광고하는 꼴이 되었다.

    “날 납치한 건 그걸로 퉁쳐 줄게.”

    “아하하!!”

    레일리가 집무실이 떠나가라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곤 만면에 미소를 띤 채로 입을 열었다.

    “벌금 한번 깜찍하군. 좋다, 그렇게 하지.”

    “퍼스트 클래스로.”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공항 셔틀부터 체크인까지 전부 해주지. 지금 묵고 있는 호텔만 알려주도록.”

    세빈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호텔 이름을 알려주었다. 레일리가 호텔명을 메모지에 대충 휘갈겨 쓴 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 가지 더.”

    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최민 헌터가 레일리를 향해 말을 걸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꽂히자 그가 말을 덧붙였다.

    “지금 저희 눈앞에서 신지의 헌터를 집으로 돌려놓으세요.”

    “오.”

    이번에도 라파엘라가 가장 빠르게 반응했다. 웜홀의 주인인 알렌도 화들짝 놀라며 최민 헌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네.’

    세빈이와 마찬가지로 최민 헌터도 노블레스 길드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알겠다. 지의, 놓고 간 물건은 없나?”

    “없어.”

    “그래. 알렌?”

    “네, 네…….”

    알렌은 최민 헌터의 눈치를 살살 본 후 허공을 향해 팔을 뻗었다.

    치지직―

    검은 균열이 생기는 동시에 알렌이 먼저 발을 들였다.

    “그… 못 믿으시겠으면 한번 확인해 보실래요? 지이 씨 집인지 아닌지.”

    알렌의 말에 세빈이와 최민 헌터가 동시에 걸어가 균열 안으로 상체를 쑥 집어넣었다. 그러곤 금방 빠져나왔다.

    “맞습니까?”

    “네, 지의 집 맞아요.”

    최민 헌터에게 대답한 세빈이가 이번엔 나를 쳐다보았다. 인상이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럼 먼저 가 있어, 지의야.”

    “알겠어. 너도 귀국하면 연락해. 최민 헌터도요.”

    “알겠습니다.”

    터벅―

    균열 쪽으로 나아가기 전, 나는 레일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하길 기다리는 듯했다.

    “몸조심해.”

    “너야말로.”

    짝―

    나는 레일리와 하이파이브를 한 후 알렌과 함께 웜홀 속으로 발을 들였다.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도 잠시, 나와 알렌은 금방 우리 집에 도착했다.

    “여러모로 신세 많이 졌어요, 지이 씨.”

    “괜찮아요. 덕분에 레일리랑 동료가 됐으니까요.”

    “나중에 시간 되시면 놀러오세요. 그땐 유럽 여행 시켜드릴 테니까.”

    알렌이 해맑게 웃었다. 그의 미소를 보며 나도 같이 웃어주었다.

    “그럼 전 가볼게…….”

    “아! 알렌 씨 잠깐만요.”

    “네?”

    하마터면 중요한 걸 잊을 뻔했네.

    세빈이의 눈이 있어 레일리에게 차마 전하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알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레일리한테 칼리의 창에 대해서 조사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칼리의 창이요?”

    “네. 인도, 네팔 쪽에서 발견되는 현상인데 레일리가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알렌이 ‘칼리의 창’을 입으로 되뇌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하나 더요.”

    “어떤 거죠?”

    “비스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를 찾아달라고 해주세요.”

    “뭐 다른 특징 같은 건 없나요? 이름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누굴 찾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

    “아쉽지만 이름이랑 성별밖에 몰라요.”

    비스는 다른 사도들과 다르게 알려진 정보가 많이 없었다.

    우연히 녀석에 대한 정보를 접해 그를 살해하려 했을 때도 전투의 마지막까지 그가 비스가 맞는지 아닌지 헷갈렸다. 그만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녀석이기 때문에 레일리의 힘이 필요했다. 내가 다른 사도들과 만나는 동안 그가 아주 작은 단서라도 물어오면 일이 쉬워지니까.

    “알겠어요. 길드장님께 전할게요.”

    “고마워요, 알렌 씨.”

    “천만에요.”

    그는 싱긋 웃은 후 웜홀 안으로 몸을 던졌다.

    검은 균열이 사라지는 동시에 우리 집은 엄청나게 고요해졌다.

    ‘일단 씻을까.’

    나는 그 고요함을 즐기며 욕실로 발을 옮겼다. 이 평화로움이 언제까지나 이어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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