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현재 체력 : 533,145]
“오!”
“줄었어요!”
변화된 녀석의 체력에 알렌과 라파엘라가 동시에 감탄했다.
쿠구궁―
소설가는 자신의 몸을 옭아맨 그림자들을 뜯어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던 중 큰 부상에 휘청거리다 책장에 몸을 부딪혔고, 책 수십 권이 녀석의 위로 떨어져 책 더미에 깔렸다.
[마왕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지만 다시 일어나 영웅들을 노려보았다.]
[“이 쥐새끼 같은 것들이……!”]
쾅!!
소설가가 책 더미를 치우고 벌떡 일어났다. 레일리가 날려버렸던 잉크병 머리는 이미 멀쩡히 돌아온 상태였고, 세빈이와 최민 헌터가 만든 상처도 깔끔하게 치료되어 있었다.
“겉모습만 회복된 거겠죠?”
“아마 그럴 거예요! 체력 수치가 0이 될 때까지 소설이 시키는 대로 공격해 주세요!”
알렌에게 대답을 한 후 소설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녀석이 책장 쪽으로 자신의 손을 쑥 집어넣었다.
[위기감을 느낀 마왕이 성의 방범 장치를 가동시켰다.]
[마왕에게 당한, 무수히 많은 용사들의 무기가 마왕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쿠구궁―
소설가가 책장에서 손을 빼자 사방을 빼곡히 채운 책장에서 수십 권의 책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흐읍……!”
탕!
책을 피하는 동시에 자아의 방아쇠를 당겨 그것을 하나씩 격추시켰다. 다른 헌터들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방어하며 다음 문장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라파엘라! 이쪽으로 와라!”
“네~ 네~”
레일리가 손짓하자 라파엘라가 책장에서 그가 서있는 곳으로 뛰어내렸다.
‘옳은 판단이네.’
책장에서 계속해서 책이 튀어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그 말인즉, 라파엘라가 서있던 곳도 마냥 안전지대가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차라리 피할 곳이라도 있는 레일리의 땅 위가 훨씬 안전할 것이다.
[바람의 저격수가 마왕의 등 뒤로 나타나 빠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마왕의 어깨에 구멍이 뚫렸다.]
그때, 다음 내용이 등장했다.
나는 바람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알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미 웜홀로 녀석의 등 뒤로 이동한 후였다.
타앙!
알렌이 장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초록빛 탄환이 소설가의 어깨에 박혀 작은 구멍을 냈다.
[현재 체력 : 530,924]
위협적인 공격은 아니었지만 확실하게 대미지가 들어가고 있었다.
소설가는 한 손으로 구멍 난 어깨를 움켜쥐다 다시 양손을 책으로 가져와 독서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콰드득―
검은 그림자가 소설가의 오른쪽 손목을 부러트리더니 이내 세빈이가 나타나 오른손을 완전히 베어버렸다.
[현재 체력 : 530,924]
‘글자가 사라지면 공격이 통하지 않는군.’
난 입가로 자아를 가져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문장이 사라지면 공격이 안 먹히는 것 같아요! 소설이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기 전에 빠르게 공격합시다!”
“알겠다!”
“알겠어!”
쾅―
레일리와 세빈이가 동시에 대답했다.
레일리가 아더의 방패로 날아오는 책을 튕겨내며 다음 문장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동안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책들을 부수고 있었다.
[“다들 비켜!”]
[빛의 구원자가 소리를 지르며 마왕을 향해 달렸다.]
‘빛인 걸 보니 아무래도 나인 것 같네.’
다른 사람들은 기사, 암살자라고 하면서 나 혼자 구원자라는 점이 묘하게 부끄러웠다.
“역할이 멋지네요, 자매님~”
“시끄러워…….”
라파엘라의 조롱 섞인 말에 적당히 대꾸해 준 후 소설가를 향해 달려갔다.
[그는 대검을 양손으로 들어 마왕의 몸을 베었다.]
‘대검이 있으려나……?’
구원자의 창고를 열어 눈으로 무기들을 빠르게 훑었다. 소설가와 제법 가까워지고 나서야 그나마 꽤 커 보이는 검이 시야에 들어왔다.
스릉―
“윽…….”
창보다도 더 무거워 양손으로 드는 것부터 일이었다. 떨어질 것 같은 팔에 힘을 준 후 그대로 낮말을 듣는 새를 해제해 소설가 쪽으로 빠르게 하강했다.
콰그작!!
애초에 피할 의지가 없는 녀석이었기에 나와 내가 든 대검이 그대로 소설가의 가슴께를 찍었다. 그러자 온몸의 뼈가 전부 부러질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전신이 강하게 진동했다.
[현재 체력 : 499,326]
대검을 다시 확성기 형태로 되돌린 후 위쪽으로 도약해 녀석과 거리를 두었다. 소설가는 가슴에서 울컥거리며 쏟아지는 검은 잉크를 한 손으로 막았다. 하지만 수습할 수 없는 수준이었던 건지, 결국 녀석은 날아다니던 책을 찢어 종이로 상처를 꾹 눌렀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어둠의 사제가 마왕에게 저주를 걸었다.]
[“너는 사제면서 저주를 걸 수 있다는 점이 참 흥미로워.”]
[그를 바라보던 대지의 기사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우리 성격을 전부 파악하고 있네.’
글자에서 레일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밑을 내려다보니 레일리도 저 문장을 보며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사제의 저주에 마왕의 움직임이 잠시 멎었지만 이내 빠르게 풀곤 영웅들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빛의 구원자가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새로 나타난 문장을 보자마자 정말로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모두 사제를 보호해!”]
“뭐……!”
콰과광!!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허공을 날아다니던 책들이 전부 라파엘라를 향했다.
레일리의 땅이 흙먼지로 뒤덮여 두 사람의 모습이 온 데 간 데 보이지 않았다.
“라파엘라! 레일리!”
우우웅―
자아의 방아쇠를 길게 당겨 공기를 진동시키자 먼지들이 흩어졌다. 그러자 책을 태우고 있는 돔 형태의 불길이 눈에 들어왔다.
최민 헌터의 방공호였다.
후웅―
방공호가 사라지자 아더의 방패로 자신과 라파엘라를 보호하고 있는 레일리의 모습이 보였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라파엘라는 느긋하게 대답하곤 십자가를 들어 방어 태세를 취했다.
[한차례의 공격이 어둠의 사제를 덮쳤다.]
[빛의 구원자의 경고 덕에 그는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영웅이 되려면 역시 빛을 품어야 하는 건가.”]
[어둠의 사제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웬 감정 표현이지?’
묘하게 달라진 글의 온도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는 라파엘라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살짝 내렸다.
“…어?”
늘 웃고 있던 눈이 한껏 날이 서있었다. 옅은 호선을 그리던 입매도 이상하게 비틀려, 그가 상당히 이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음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상대해야겠군.”]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마왕이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쿠구궁―
새로이 따오른 글이 나는 라파엘라에게서 시선을 떼고 소설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녀석의 등에서 팔 한 쌍이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쿵!
이내 녀석의 손 위로 거대한 펜이 떨어졌다. 펜촉이 얼마나 날카롭게 갈렸는지, 날아다니던 책이 펜에 살짝 스치자마자 갈기갈기 찢겨 바닥 위로 떨어졌다.
[마왕의 무기가 허공을 가르자 온몸을 에는 듯한 바람이 일었다.]
콰과과광!!
“큭……!”
빠르게 실드를 펼쳤지만 몸이 계속해서 뒤로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끼기긱―
나는 실드에 금이 가자마자 미련 없이 던져버린 후 바닥 쪽으로 빠르게 내려왔다. 소설가의 거대한 발이 눈 앞에 자리했다.
[밤의 암살자는 마왕의 시야를 가렸다.]
[대지의 기사는 마왕의 다리를 묶었다.]
[빛의 구원자는 마왕의 심장을 공격했다.]
[불의 무도가는 마왕의 어깨를 가격했다.]
[바람의 저격수는 마왕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젠장할, 귀찮게시리……!”
레일리가 성을 내며 바닥 쪽으로 몸을 날리는 동안 난 낮말을 듣는 새로 허공을 다시 뛰어 올라갔다. 이미 다른 헌터들은 공격을 마친 건지 그들을 가리키는 문장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를 가리키는 문장까지 사라지기 전에 공격을 성공시켜야 한다.
소설가의 가슴 높이까지 오르자마자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소설가의 심장을 노린 탄환이 날아갔다.
[현재 체력 : 410,285]
문장이 사라지기 직전 소리 탄환이 정확히 녀석의 심장에 박혔다. 뒤이어 알렌의 총알이 녀석의 이마를 관통했다.
쾅―!!
최민 헌터가 소설가의 어깨 위로 운석처럼 떨어지자 녀석의 어깨가 밑으로 훅 빠졌다.
[현재 체력 : 327,683]
공격은 확실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체력이 슬슬 떨어졌지만, 전투의 흐름 자체는 잘 풀리고 있었다.
[영웅들이 서로를 칭찬하는 동안 어둠의 사제는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 찝찝한 문장만 빼고.’
아까부터 저 영웅 소설은 어둠의 사제를 조금씩 소외시키고 있었다. 다른 영웅들에게는 쓰지 않는 감정 표현까지 서술해 가면서 말이다.
[어둠의 사제는 다시 마왕에게 저주를 걸었다.]
“라파엘라.”
“아, 네.”
어느새 자신의 땅 위로 올라온 레일리가 그를 향해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라파엘라가 마왕을 향해 역성호를 그었다.
[현재 체력 : 321,385]
미미한 대미지와 함께 저주가 걸렸다.
소설가가 휘두르는 만년필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어둠의 사제는 왠지 모를 무력감을 느꼈다.]
[“신의 뜻을 받드는 존재가 이런 능력을 갖고 있다니. 이 어찌나 말도 안 되는 일인가.”]
[그의 중얼거림이 마왕의 귀에 들어갔다.]
[마왕은 빙긋 웃으며 어둠의 사제를 향해 악몽의 족쇄를 날렸다.]
키이이잉―
소설가가 책을 읽던 손을 라파엘라에게 뻗자 시커먼 쇠사슬이 그를 향해 날아갔다. 레일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아더의 방패를 높이 들었다. 그러나 쇠사슬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라파엘라를 향해 맹렬히 날아갔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
끼기기긱!!
그때였다. 검은 쇠사슬이 아더의 방패를 그대로 통과해 라파엘라의 목을 휘감았다.
“커헉……!”
“라파엘라!!!”
[“빈틈이로군.”]
[마왕이 무기를 높게 들었다.]
레일리의 날카로운 음성이 귀에 꽂히는 동시에.
콰과과광!!
또다시 거대한 만년필이 이 공간을 찢었다.
쿵!
“커헉……!”
칼바람을 겨우 피했나 싶었더니 곧바로 날아오는 책에 복부를 맞아 나도 모르게 입 안을 씹었다.
비릿한 액체가 입가에 흐르는 게 느껴졌다.
“허억, 헉, 윽…….”
눈앞이 잠시 흐려질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아이테르의 로브 때문일까, 금방 정신이 돌아왔다.
‘그보다 라파엘라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우우웅―
자아로 먼지바람을 밀어낸 후 레일리의 땅 위로 착지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인영이 금방 눈에 들어왔다.
“라파엘라……?”
가장 먼저 보인 건 목에 쇠사슬이 친친 감긴 라파엘라였다.
그는 눈을 뜬 채 몸을 축 늘어트리고 있었다.
“X발…….”
그의 앞엔 레일리가 욕을 뱉으며 쇠사슬을 떼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슬이 닿는 레일리의 손바닥이 새까맣게 타버릴 뿐, 라파엘라의 목을 옭맨 그것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꼴좋구나!”]
[마왕이 소리쳤다.]
[“악몽의 족쇄는 오직 자신만이 끊을 수 있는 법.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 새끼가!”
콰과광!!
레일리가 소리를 지르자 소설가의 발밑에 있던 땅이 격렬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녀석의 턱을 쳐올렸다.
[현재 체력 : 321,385]
당연히 체력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우리를 닮은 영웅들. 그리고 그런 영웅 소설을 좋아하는 소설가.
이리저리 흩어진 정보들이 모여 어떤 그림을 어렴풋이 그려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소설가를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전개 : 엄청난 위기를 겪지만 끝내 영웅이 이기는 해피엔딩]
‘해피엔딩…….’
소설가가 좋아하는 건 영웅이 승리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소설 속 그 영웅들은 지금의 우리들이고.
그렇다면 라파엘라가 쓰러진 것도 스토리에 극적인 효과를 더하는 하나의 장치일지도 모른다.
‘소설가를 위한 연극은 계속돼야 해.’
터벅―
“레일리.”
거칠게 숨을 내쉬며 반쯤 정신이 나간 레일리에게 다가갔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흠칫 어깨를 떨었다.
“레일리.”
“…….”
“날, 한 번만 믿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