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45화 (145/366)

145화

확실히 빙리가 여는 무도회는 규모 자체가 달랐다. 장소도 지난번에 했던 곳보다 3배 정도 더 큰 곳이었고, 초대받은 손님들도 그 장소를 전부 다 채울 만큼 많았다.

“위컴 씨 진짜 안 오셨나?”

“속상해…….”

리디아와 키티의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최민 헌터는 원작대로 무도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이곳에서 다아시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그를 혐오하는 태도를 대놓고 보였다고 하는데……. 굳이 레일리에게 그럴 필요까진 없겠지.

툭―

그때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라파… 콜린스 씨.”

“좋은 밤입니다, 엘리자베스 양.”

라파엘라였다. 신부복 대신 무도회용 정장을 입은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주위의 눈치를 슬쩍 보니 귀족들이 그의 차림을 비웃는 듯 저마다 수군거리고 있었다.

속은 좀 검을지 몰라도 인상 하나는 좋은데 말이지.

일단 사람들의 눈을 피해 댄스 홀 쪽으로 발을 돌렸다. 라파엘라도 나를 쫓아 댄스 홀로 들어왔다.

“좀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매님.”

“빨리 말해.”

“이 무도회에서도 몬스터가 나타날 거예요.”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뜨자 그가 말을 덧붙였다.

“무도회장에 들어오자마자 상태창이 떴거든요.”

“난 못 봤는데?”

“저한테만 떴나 보네요.”

라파엘라에게만 뜬 상태창이라. 콜린스와 관련된 몬스터가 나올 확률이 높겠는데.

라파엘라는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입을 열었다.

“콜린스의 열등감이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뭐 이런 문장이었어요.”

“어떤 형태로든 여기로 몬스터가 또 오겠군.”

“다른 분들한테도 전해주세요. 제가 길드장님과 세빈 자매님이랑 춤을 출 순 없으니까요~”

“알았어. 또 뭐 나타나면 말해줘.”

라파엘라가 고개를 숙이곤 내게서 천천히 멀어졌다.

이 무도회에서 지난번과 같은 해프닝이 벌어지면 못해도 수십 명이 죽는다. 원작에 없던 사건으로 큰 희생이 나오면 어떤 방향으로든 엔딩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등장하자마자 해치우는 수밖에.’

또각―

나도 댄스홀의 벽을 따라 걸으며 이곳에 초대된 사람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화려한 옷을 입은 귀족들이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댄스홀의 중앙에선 사람들이 파트너를 바꿔가며 한창 춤을 추었고, 옆 홀에 마련된 음식을 먹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빙리 씨의 초대인데 당연히 와야죠. 아하하!”

이 파티의 주최인 빙리, 세빈이는 자신이 초대한 모든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가 공허해진 걸 보니 아무래도 피곤한 모양이었다.

‘아, 눈 마주쳤다.’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던 세빈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큰 눈이 순식간에 반달 모양으로 접혀 예쁜 웃음을 지었다.

말없이 주먹을 들어 응원하자 세빈이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툭.

“아, 죄송합니다.”

세빈이를 보고 있다가 앞에서 오던 사람과 부딪혔다. 나는 곧바로 사과를 하고 내게 부딪힌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나와 비슷한 체구의 남자가 인상을 쓰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못 볼 거라도 봤다는 얼굴을 하곤 그대로 나를 지나쳐 가버렸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눈을 크게 뜨고 날 보고 있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이 놀랍긴 했나 보다.

나는 그들을 향해 어깨를 한번 으쓱인 후 다시 홀의 구석 쪽으로 걸어갔다.

“여기 있었군.”

“깜짝이야!”

그때 레일리가 뒤쪽에서 불쑥 나타났다. 주위 귀족들의 시선이 느껴져 우선 레일리에게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하자, 그도 고개를 숙였다.

“저와 한 곡 추시죠, 엘리자베스 양.”

“네.”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댄스홀 중앙으로 나왔다.

[전개 달성률: 72%]

그러자 달성률도 상승했다.

잠시 연주를 멈춘 오케스트라가 악기를 재정비하더니 춤을 추러 나온 사람들을 흘끔 본 후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레일리, 아까 무도회장으로 들어올 때 상태창 봤어?”

“상태창? 못 봤다.”

역시 레일리에게도 뜨지 않았군.

“라파엘라만 본 상태창이 있어. 여기서 아마 몬스터가 나올 거래.”

“그 녀석한테만 뜬 거면 콜린스와 관련된 몬스터겠군.”

내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는 대답과 함께 레일리가 팔을 위로 올려 내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 붉은 머리한테 여기가 『오만과 편견』 안이라는 사실은 전했나?”

“이미 알고 있더라고. 영화를 봤대.”

“이 무도회 다음, 네가 가드너 부부와 내 영지로 놀러왔을 때 그가 리디아를 데리고 도망쳐야 한다. 그것도 알고 있나?”

“응.”

레일리의 입술이 만족스럽다는 듯 씩 올라갔다.

오케스트라가 차분하면서도 밝은 곡을 연주했다. 춤추는 사람들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여기가 그놈의 파편 속이라는 것도 잊겠군.”

“그러니까.”

“너희 나라에서 바꿔치기 된 그 S급 게이트, 그것도 녀석의 파편이었나?”

‘예리하네.’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거긴 어떤 곳이었지?”

“사람들의 악몽을 보여줬어. 제한 시간 내로 탈출하지 못하면 보스 몬스터에게 잡아먹히는 형태였고.”

“끔찍하군.”

소설가의 파편이 클리어하기 성가신 건 틀림없지만 적어도 정신적인 면에선 미식가의 파편보다 나았다.

“지의, 전부터 묻고 싶은 게 있다.”

“뭔데?”

“넌 내가 창조자의 사도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쿵―

심장이 내려앉는 감각에 살짝 스텝이 꼬여 휘청거리자 레일리가 내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버텼다.

“그냥 알게 됐어. 너무 자세하게 묻지는 마.”

“…내가 비록 창조자의 사도라는 걸 우리 길드원에게는 숨겼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동료들에게는 솔직한 사람이야.”

샹들리에의 반짝임을 담은 황금색 눈이 나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리고 지의, 넌 내 동료이니 네게도 솔직하게 말하겠다.”

“…….”

“난 지금 두렵다.”

그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아니 어쩌면 한 번도 나온 적 없을지도 모르는 날것의 감정이 튀어나왔다.

“창조자와 나는 계약했다. 하지만 이 파편을 해결하고 나오면 내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부순 셈이 되지.”

“그렇지…….”

“그걸로 정말 계약 관계가 끝나는 건가?”

흥겨웠던 연주의 템포가 어느새 느린 음악으로 바뀌었다. 레일리는 아까보다 느린 움직임으로 나를 이끌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쩌면 여전히 그 자식이 내 목줄을 쥐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자꾸 들더군.”

레일리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힘이 약해졌다고 해도 절대자는 절대자다. 길가에 핀 꽃을 꺾는 것만큼 내 목숨을 쉽게 가져갈 수도 있겠지.” “…….”

“이제야 내가 뭘 위해 궁 밖으로 나왔는지 깨달았다.”

탁―

레일리가 우뚝 멈춰 서서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난 여기서 죽을 수 없어.”

황금보다도 밝게 빛나는 눈과 시선이 맞닿았다.

‘레일리는 정말로 강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두려움을 고백하는 사람이야말로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곧 이 사람이라면 무거운 진실도 받아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변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입을 열었다.

“너를 죽인 적이 있어.”

“…뭐?”

“아니, 사실 너를 포함한 모든 사도들을 죽인 적이 있어.”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목소리를 한껏 낮춘 후 레일리의 어깨에 얹었던 손에 힘을 주어 춤을 추는 사람들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도록 당겼다.

“하지만 결과는 전이랑 똑같았어.”

“너 설마…….”

“이게 네 질문에 대답이 됐으면 좋겠네.”

내가 웃자 레일리의 얼굴은 굳어갔다. 내 말의 뜻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창조자와 너 사이의 계약은 내가 책임지고 끊어줄게. 그건 걱정하지 마.”

“…그래서 네가 창조자 놈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던 거였군.”

레일리는 창백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표정을 정리하곤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비장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우스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한 말 믿을 수 있겠어?”

“우문이다.”

[발언 결과 : 강한 신뢰]

“난 너와 함께 길드전에서 승리한 그 순간부터, 널 의심할 생각이 없었거든.”

두근―

가슴이 울렁거렸다. 무슨 대답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젖은 솜이라도 밀어 넣은 것처럼 먹먹해서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조율자 말마따나 인간은 정말로 비합리적이야.’

소꿉친구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기억을 지우고, 날 죽이기 위해 납치한 사람과 한 달도 안 돼서 동료가 된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멍청한 판단과 비합리적인 선택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런 비합리적인 선택들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넘어지고, 다치고, 몇 번이고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면서도 다시 일어날 힘을 주는 건 나의 비합리적인 선택으로 만나게 된 사람들이다.

“지의, 설마 울고 있나?”

“안 울어.”

“거짓말에 능한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군.”

레일리의 시선을 피할 때쯤 음악도 한 차례 끝났다.

춤을 추던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파트너에게 인사한 후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뿔뿔이 흩어졌다.

“일단 난 라파엘라한테 가볼게. 또 상태창이 떴을 수도 있으니까.”

“알았다. 난 네 소꿉친구 녀석과 알렌에게 그 사실을 전하지.”

레일리와 19세기 인사를 주고받은 후 라파엘라부터 찾아 나섰다.

춤을 끝낸 사람들이 빠져나간 만큼 춤을 추고 싶은 사람들이 썰물처럼 들어오고 있었다.

‘멀리 나가진 않았을 것 같은데.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한 가지 확실한 건 일단 댄스홀에는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쳐 출구 쪽으로 발을 돌렸다.

퍽―

“윽……?”

이번에도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혔다.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할 정도로 큰 충돌이었다.

‘이건 일부러 친 거잖아……!’

내 주위에 사람이 많아서 피할 곳이 없던 것도 아니고, 실수로 부딪힌 정도의 세기도 아니었다.

이건 백 퍼센트, 고의로 나를 친 거다.

“이봐요!”

나를 치고 간 녀석을 향해 소리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과 그 녀석이 나를 돌아보았다.

얼굴을 보니, 레일리와 춤을 추기 전 나를 쳤던 그 자식이었다.

그 자식은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눈으로 나를 흘긋 본 후 그대로 댄스홀 안으로 사라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저 사람 베넷가 차녀 아니야?”

“왜 그러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일단 자리부터 피하자.’

소설 속 내 평판이 이상해지면 엔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금은 참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를 꽉 문 채 다과가 차려진 옆방으로 넘어갔다.

안에 들어오니 가벼운 식사와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만이 보였다. 여기에도 라파엘라의 곱슬거리는 금발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치지지직―

멀쩡하던 자동 통역기가 갑자기 말썽을 부렸다. 자연스럽게 출력하던 한국어에 심한 노이즈가 껴 무슨 소린지 잘 들리지 않았다.

―지원하지 않는 언어입니다.

“뭐?”

자동 통역기는 그 음성을 내보내곤 다시 심한 노이즈를 출력했다.

그 노이즈는 연회장의 구석 쪽으로 갈수록 심해졌다.

노이즈가 심해지는 곳으로 천천히 발을 옮기자 커다란 커튼 앞에 다다랐다. 안 쓰는 물품들을 보관하는 곳인지 커튼 너머로 의자와 테이블이 쌓여 있었다.

―지원하지 않는 언어입니다.

나는 커튼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지원하지 않는 언어입니다.

그때, 누군가의 중얼거림과 자동 통역기의 오류 음성이 번갈아 들렸다.

촤아악―

그리고 커튼이 걷힌 그곳엔…….

“ַיְבָרֶךְ אֱלֹהִים אֶת-יוֹם הַשְּׁבִיעִי, וַיְקַדֵּשׁ אֹתוֹ:  כִּי בוֹ שָׁבַת מִכָּל-מְלַאכְתּו”

배를 움켜쥔 채 쉴 새 없이 복음을 외는 라파엘라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