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키티, 어떤 거 살 거야?”
“몰라~ 가서 제~일 예쁜 걸 달라고 해야지!”
키티와 리디아가 상점가를 발랄하게 뛰어다니며 콧노래를 불렀다. 둘 다 철 없는 성격이라고 알렌에게 듣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정신이 없었다.
‘얼마큼 왔는지나 보자……’
상태창을 보는 감각으로 지금의 전개 달성률을 띄웠다.
[전개 달성률 : 51%]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이제야 전체 이야기의 절반 정도라니.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긴 한숨이 샜다.
“읏취.”
“괜찮아요?”
“아우… 아직 감기 기운이 살짝 있네요.”
알렌은 숄을 더욱 단단히 여민 후 키티와 리디아의 뒤를 쫓아갔다.
‘이 사람도 꽤 고생했지.’
무도회장에서 몬스터를 처리한 후 원작대로 세빈이가 알렌을 식사에 초대했다. 알렌이 세빈이의 저택에 가는 날은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우르릉거렸지만, 베넷 부인은 어떻게든 자신의 큰 딸을 그 저택에 오래 머무르게 만들기 위해서 마차 대신 말을 태워 보냈다.
그 결과, 알렌은 비를 맞아 감기에 걸려 꼬박 며칠을 세빈이의 저택에서 지내야만 했다.
“이제 또 무슨 사건이 남았어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며 알렌에게 물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다음 내용을 떠올리는 듯했다.
사락―
“앗.”
바람 때문에 망토 형태의 아이테르의 로브가 펄럭거리자 주머니에 넣어뒀던 손수건이 앞으로 날아갔다.
손수건은 사람들 사이를 날아가다 이내 흙바닥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바스락―
내가 줍기도 전에 검은 반 장갑을 낀 손이 손수건을 먼저 잡았다. 대신 주워준 사람을 확인하려 허리를 다시 편 순간.
[전개 달성률 : 60%]
“어, 어……!”
상태창 너머의 검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소설 속 시간으로 일주일도 더 넘게 한 번도 본 적 없던 바로 그 눈이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나는 입을 벌린 채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고, 목에 겨우 힘을 줘 천천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최민 헌…….”
“위컴 씨!”
“위컴 장교님~”
그때 키티와 리디아가 불쑥 나타나 나와 최민 헌터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철부지들은 최민 헌터를 올려다보며 완전히 사랑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위컴?”
“위컴 씨가 내 손수건도 주워주셨어!”
“위컴 장교님! 어쩜 그렇게 젠틀하세요?”
‘장교?’
지금 보니 그는 붉은색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약간 난처한 얼굴이었던 그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리디아와 키티를 향해 살짝 허리를 숙였다.
“리본 가게에 가신다고 하셨죠?”
“네, 네에……!”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다정하셔라~”
키티와 리디아가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최민 헌터의 옆에 딱 붙어 섰다. 두 철부지들 사이에 낀 최민 헌터는 고개만 살짝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나중에 설명할게요.’
그는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하곤 몸을 돌려 리본 가게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세에상에…….”
내 옆에 있던 알렌이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저 사람도 힘든 역할 받았네요.”
“위컴……? 이름이 위컴 맞죠? 무슨 역할이길래 그래요?”
“저도 자세한 건 생각 안 나는데…….”
알렌이 손가락으로 점점 멀어지고 있는 리디아를 가리켰다.
“리디아 데리고 야반도주해요.”
“네?!”
큰 목소리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알렌의 팔을 잡아끌어 도망치듯 리본 가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오니 리디아와 키티가 리본과 모자를 이리저리 써보며 최민 헌터를 향해 재잘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위컴 씨! 어떤 것이 더 예뻐요?”
“이 모자도 봐주세요! 어떤 걸로 할까요?”
“둘 다 예쁘네요.”
최민 헌터는 상냥한 태도로 자매들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키티와 리디아가 최민 헌터와 함께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낼 동안, 나와 알렌은 가게 구석으로 조용히 발을 옮겼다.
“사실 말이 야반도주지 거의 납치에 가까웠어요. 1년에 몇 파운드씩 주면 리디아와 결혼해 주겠다고 했거든요.”
“던전이 열린 게 차라리 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네요…….”
“그쵸.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19세기의 상황은 일단 차치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원작의 전개. 즉, 최민 헌터가 리디아와 정을 쌓아서 그를 데리고 도망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돈을 요구하는 파렴치한 행동까지 시켜야 한다.
“언니들은 안 사?”
“빙리 씨가 여는 파티가 있잖아! 설마 똑같은 차림으로 가려고?”
“응. 집에 있는 거 아무거나 입게.”
“세상에…….”
키티는 내 대답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눈을 굴리더니 가게 주인에게 자신이 고른 리본을 꺼내 달라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런 키티의 옆엔 최민 헌터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최민 헌터가 이 소설 내용을 알면 좋을 텐데 말이지.’
그런 고민 속에 키티와 리디아의 쇼핑이 끝났고, 우리는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게를 나섰다.
* * *
‘집까지 데려다주네.’
상점가에서 헤어질 줄 알았으나 최민 헌터는 동생들의 짐을 든 채 저택 앞까지 함께했다.
울퉁불퉁한 비탈길을 지나 마당에 다다르자 리디아와 키티가 아쉬운 듯 울상을 지으며 최민 헌터를 돌아보았다.
“다시 볼 수 있겠죠, 위컴 씨?”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그닥―
최민 헌터가 그리 대답을 할 때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발굽 소리를 따라 길 쪽으로 고개를 쭉 빼 보니, 말을 탄 레일리와 세빈이가 베넷가의 저택으로 오고 있는 게 보였다.
“빙리 씨?”
알렌이 평소답지 않게 큰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리디아와 키티의 주의를 끌어보려는 의도인가 보다.
“빙리 씨라고?”
“아, 다아시 씨도 있네!”
자매들은 알렌의 말에 착실히 반응했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자 그들은 아예 길 쪽으로 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리디아 양, 캐서린 양.”
“아~ 너무 반가워요! 빙리 씨!”
“다아시 씨도 안녕하세요~”
세빈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매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동안 레일리는 뚱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빙리 씨, 빙리 씨! 위컴 씨도 이번 무도회에 초대해 주시면 안 될까요?”
“맞아요! 위컴 씨와 함께 가고 싶어요!”
리디아가 최민 헌터의 팔을 잡고 세빈이 쪽으로 살짝 잡아끌며 물었다. 하지만 세빈이는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대답을 미루었다.
“돌아가지.”
‘어라?’
레일리가 그대로 말을 돌려 비탈길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세빈이는 점점 멀어져 가는 레일리를 보더니 이내 리디아를 향해 싱긋 웃었다.
“리디아 양의 손님이라면 괜찮습니다. 그럼 무도회에서 뵙죠.”
“고마워요, 빙리 씨!”
“잘 가요 빙리 씨~”
분명 다른 목적 때문에 온 것 같았는데…….
레일리와 세빈이는 너무나도 시시하게 자리를 떠버렸다.
짝―
내가 의문을 갖거나 말거나, 키티와 리디아는 손뼉을 치며 꺄르륵 웃었다.
“잘됐네요, 위컴 씨!”
“무도회에 오실 거죠?”
“아, 음…….”
리디아의 질문에 최민 헌터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최민 헌터는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한 후 천천히 길 쪽으로 나왔다.
“엘리자베스 양.”
“…네?”
그러더니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최민 헌터는 리디아와 키티의 눈치를 한 번 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몸을 돌려 알렌에게 살짝 눈짓을 하자 그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리디아와 키티의 어깨를 감싸며 저택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끌었다.
나와 최민 헌터는 흙길을 지나 라파엘라와 이야기를 나눴던 호수 쪽으로 말없이 걸었다. 며칠 전 온 비 때문에 땅이 여전히 물렁거렸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호수 앞 큰 나무 밑에 도착하고 나서야 최민 헌터가 입을 열었다.
“최민 헌터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가끔 몬스터도 소환되다 보니까, 솔직히 많이 걱정했거든요.”
“몬스터도 나왔습니까?”
“네.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좀 까다로워지더라고요.”
그는 내 말을 듣고 살짝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여기가 소설 속이라는 사실은 알고 계신 것 같군요.”
“네. 알렌 씨가 설명해 줬……. 어, 『오만과 편견』 읽으셨어요?”
“영화를 몇 번 봤을 뿐입니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셨던 작품이라.”
그래서 키티와 리디아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한 거구나. 설명하는 수고를 덜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설명을 들어야 할 판이네.
“알렌한테 대충 들어 보니까 그 최민 헌터가 맡은 역할이 엄청…….”
“몰상식한 인물이죠.”
최민 헌터가 굉장히 정제된 언어로 자신의 역할을 정의했다.
“아까 노블레스의 길드장이 저를 보고 피한 것도 영화에서 본 장면 같군요.”
“서로 아는 설정이에요?”
“네. 어렸을 때 함께 자랐습니다.”
그가 손을 말아 쥐어 턱 밑에 대곤 생각에 잠긴 듯 천천히 입을 뗐다.
“하지만 돈을 목적으로 다아시의 여동생에게 접근하여 구애했고, 다아시가 제지하자 곧장 그의 여동생을 버려 큰 상처를 줬죠.”
생각보다 더 쓰레기인 설정이라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다아시와 엘리자베스가 그 길드장과 신지의 헌터라서 다행입니다. 무도회 이후로 달성률이 빠르게 오를 겁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시간이 너무 지체돼서 지금쯤 저희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신지의 헌터.”
그때 최민 헌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그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가라앉아 보였다.
“이상 현상에 대한 정보는 핑계고, 사도 계약을 파기하기 위해 길드전에 참여하신 겁니까?”
날카로운 시선이 꽂히자 난 부정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각성하면서 창조자가 자기 사도들한테 준 힘이 약해졌어요.”
“힘이……?”
“레일리는 일종의 예언서 비슷한 걸 받았는데 제가 각성한 이후로 그 예언이 하나도 안 맞았대요.”
나는 누가 듣고 있지 않을까 싶어 저택 방향을 한 번 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처음엔 절 죽이려고 데려온 것 같은데, 뭐 어떻게 잘 풀렸네요. 지금은 완전 동료예요.”
“잘 풀리다니…….”
“아무튼 레일리가 갖고 있던 창조자의 파편을 제가 파괴해서 던전을 해결할 생각이었는데, 파편이 스스로 깨져버리는 바람에 이렇게 됐네요.”
나는 씩 웃어 보인 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축축한 물 냄새가 폐부에 스미는 듯했다.
‘아, 그러고 보니 물어볼 게 있었는데.’
세빈이한테 물어보려 했다가 몬스터가 나타나는 바람에 까먹었던 사실이 생각났다.
“근데 제가 노블레스에 납치된 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강한 당황]
최민 헌터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사실을 숨기고 있나 본데.
포기하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자 검붉은 눈동자가 도로록 굴러 호수를 향했다.
“사실…….”
“네.”
“신지의 헌터의 위치와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
그는 필사적으로 내 시선을 피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사명의 달성 보상으로 받았습니다.”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전주 던전에서 탈수 상태로 쓰러졌을 때도, 그리고 내가 납치당하자마자 영국으로 바로 온 것도. 전부 최민 헌터가 내 위치와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쾌하신 거 압니다.”
난데없는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최민 헌터는 눈까지 질끈 감고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항상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닙니다. 신지의 헌터의 신변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을 때만 자동적으로 상태창이 뜨기 때문에 그때를 제외하곤…….”
“아, 알겠어요! 괜찮아요! 하나도 안 불쾌해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나는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은 최민 헌터의 양팔을 잡았다. 그런 뒤 고개를 들이밀어 그와 억지로 눈을 맞췄다. 그러자 최민 헌터의 눈동자가 당황한 듯 흔들렸다.
“최민 헌터는 그걸로 절 구했어요. 불쾌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습니까?”
“네. 그러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발언 결과 : 안심]
그제야 최민 헌터가 마음이 좀 놓였는지 한껏 경직되었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일단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져요. 무도회 다녀오고 나서 정보를 공유하는 걸로 하죠.”
“좋습니다.”
우리는 다시 초원을 가로질러 집 쪽으로 걸어갔다.
“언제 리디아를 도망칠 거예요?”
“무도회 직후,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영지에 갈 때입니다. 이야기의 후반부입니다.”
그럼 무도회에서 레일리와 이야기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더 빠르게 달성률을 끌어올릴 방법을 생각하면 되겠군.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할 때쯤 앞마당에 다다랐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엘리자베스 양.”
최민 헌터는 부드럽게 말을 건넨 후 고개를 숙였다.
‘말투 때문에 그런가, 진짜로 군인 같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위컴 씨.”
나도 무릎을 살짝 접어 인사한 후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