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쿠구구궁―
무도회장 전체가 울릴 정도로 거대한 진동이 일었다. 창밖을 보니 그 남자의 말대로 거대한 돌덩이가 굴러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돌덩이처럼 보이는 몬스터겠지만.
아직 멀리 있는 터라 어떤 녀석인지 정보창은 뜨지 않았다.
“몬스터야?”
“응. 오만한 소설가가 개입할 때마다 등장해. 며칠 전에도 집 앞에서 나타났어.”
세빈이의 질문에 빠르게 대답한 후 아이테르의 로브에 손을 얹었다.
사라락―
숄 형태였던 로브가 망토처럼 길게 늘어져 드레스 바로 위까지 내려왔다. 옷장에 있던 망토를 떠올리면서 바꾼 것이니 주변 사람들이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레일리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혀를 찼다.
“일단 이놈들이 다 떠날 때까지 기다려야겠군.”
“응. 다 대피하고 나면 그때…….”
“리지! 제인!”
탁!
그때 누군가 나와 알렌의 팔을 낚아채듯 잡았다. 그 탓에 갑작스럽게 중심이 뒤로 쏠려 휘청거렸지만, 금방 균형을 잡고 고개를 돌렸다.
“엄마?!”
혼비백산이 된 베넷 부인이었다.
그는 나와 알렌을 팔을 꽉 잡은 채로 무도회장 출구를 향해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얼른 안 피하고 뭐 하니! 오, 다아시 씨, 빙리 씨도 얼른 가시죠. 이렇게 헤어지는 건 너무 아쉬운데, 나중에 저희 저택에 오시면 근사한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토록 할게요.”
“잠깐……!”
‘이 인간 힘이 왜 이렇게 세?!’
베넷 부인이 세빈이와 레일리에게 생긋 웃어 보이곤 무도회장을 빠르게 벗어났다. 베넷 부인의 손에 이끌려 나와 알렌도 덩달아 출구 쪽으로 나오게 됐다.
몬스터는 세 마리.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둘. 호수에서 튀어나왔던 놈 정도의 수준이라면 세빈이와 레일리 둘이서 거뜬히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소설 속. 갑자기 누군가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을 보거나 전투에 휘말려 목숨이라도 잃게 되면 엔딩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만약을 대비해 적어도 한 사람은 여기 남아 있는 게 좋을 텐데…….
끼익―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오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마차들과 말이 이리저리 엉켜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다. 베넷 부인도 우왕좌왕하며 온몸으로 당혹스러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 틈에 벗어나야겠어.’
툭―
혼란을 틈 타 알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알렌 씨, 라파엘라 좀 데려와 주세요.”
“라파엘라 씨를요?”
“지금 안 부르면 베넷 부인이 눈치챌 거예요. 빨리!”
베넷 부인이 자신의 마차를 찾느라 정신없는 동안 알렌이 균열 속으로 사라졌다.
타닥―
그리고 정확히 3초 후, 알렌과 함께 얼빠진 얼굴의 라파엘라가 나타났다. 그는 잠들기 직전이었는지 수수한 파자마 차림을 하고 있었다.
“자매님, 이게 대체…….”
“라파엘라, 빨리 나로 변신해.”
“네, 네?”
“대답할 시간 없어. 빨리!”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라파엘라’가 동요한다.]
사아아―
[발언 결과 : 수용]
내 외침에 그의 형체가 녹아내리더니 이내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지기 시작했다. 거울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똑같은 생김새에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신가요, 자매님?!”
“자세한 건 알렌 씨가 얘기해 줄 거야. 알렌 씨, 저택에 들어가고 베넷 부인 잠들고 나면 저 데리러 와요.”
“아, 알겠어요……!”
타닥!
아이테르의 로브 모자를 뒤집어쓴 후 몸을 돌려 다시 무도회장 안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다 빠져나갔는지 무도회장까지 가는 길은 내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쾅!
무도회장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무기를 꺼낸 세빈이와 레일리. 그리고 그들의 맞은편에 있는 거대한 검은 구체들이 보였다.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지루함]
[어둠 속성]
[그날 저녁 남은 시간 동안은 방을 왔다 갔다 하면서 가끔 자기 일행에게만 말을 걸었다.]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오만]
[불 속성]
[그럭저럭 봐줄 만은 하군. 그렇지만 내 구미가 동할 만큼 예쁘지는 않아.]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호기심]
[대지 속성]
[그러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그의 이목구비에 특별히 뛰어난 데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자마자, 그의 얼굴이 남달리 지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 앞에서 봤던 몬스터처럼 이 녀석들에게도 필기체로 쓴 정보창이 떠올랐다. 사실상 이름과 속성을 제외하고는 도움 되는 정보는 없었지만.
“용케도 돌아왔군.”
“라파엘라를 대신 보냈거든.”
“하, 가끔 보면 나보다 네가 더 그 녀석을 잘 다루는 것 같아.”
레일리가 나를 향해 입꼬리를 씩 올려 웃더니 끼고 있던 반지를 천천히 뺐다.
쿵―
레일리의 오른손에 커다란 메이스가 들렸다. 그의 옆에 있던 세빈이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다치지 말고, 조심해.”
“알겠어.”
세빈이가 새카만 검을 드는 동안 나도 자아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로 구체들을 노려보았다.
드르륵―
명백한 공격 태세에 ‘다아시의 지루함’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우리 쪽으로 천천히 굴러온 구체가 갑자기 높이 튀어 올랐다.
쿵! 쿵! 쿵!
“큿……!”
녀석이 농구공 마냥 무도회장 안을 통통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 탓에 바닥이 울려 제대로 서있기 힘들어졌고, 그대로 중심을 잃었다.
퍼버벙!
그러자 ‘다아시의 오만’이 뿜어낸 검은 불꽃이 나를 노렸다.
타닥!
나는 낮말을 듣는 새로 도약해 허공에 제대로 착지했다. 이제 ‘다아시의 지루함’의 제자리 뛰기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정신 사납다!”
중심을 잃었던 레일리가 아더의 방패를 바닥에 깔아 공격을 되돌린 후 바로 뛰어올랐다.
쩌엉!
그러곤 메이스로 ‘다아시의 지루함’을 내리쳤다.
레일리의 공격에 공간 전체를 울릴 만큼 강한 타격음과 함께 검은 구체에 금이 갔다.
카드득―
녀석의 거대한 그림자에서 시커먼 손 수십 개가 튀어나왔다. 손들은 녀석의 움직임을 봉쇄한 채 그대로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지의야!”
탕!
세빈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서 날아간 새하얀 탄환은 그림자 손에 의해 제자리에서 부르르 떨기만 할 뿐인 검은 구체에 정확히 박혔다.
파스스―
역시 몬스터의 수준은 낮았다.
합동 공격 한 번에 ‘다아시의 지루함’이 가루가 되어 대리석 바닥에 쌓였다.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지루함’이 소멸]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오만’의 공격력이 상승]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오만’의 방어력이 상승]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호기심’의 공격력이 상승]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호기심’의 방어력이 상승]
“뭐?”
예상치도 못한 상태창이 등장했다.
‘자신을 희생해서 아군을 강화하는 형태인가.’
미식가의 파편 안에 있던 ‘해골 수프’와 ‘트라우마 파우더’랑 비슷한 관계인 것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곤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퍼버벙!
‘다아시의 오만’이 또다시 검은 폭발을 일으켰다. 아까보다 더욱 정교해진 공격 탓에 나는 허공을 쉴 새 없이 달릴 수밖에 없었다.
“강세빈! 레일리! 이 틈에 공격해!”
“알겠다!”
쾅!!
레일리의 메이스와 세빈이의 검이 동시에 ‘다아시의 오만’을 향했다. ‘다아시의 지루함’의 희생 덕분에 확실히 표면이 단단해졌는지, 녀석의 몸체는 살짝 찌그러지고 긁힌 자국만 남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공격을 전부 쏟아부었다. ‘다아시의 오만’은 멍청하게도 한 번 타기팅한 나를 계속해서 쫓을 뿐, 직접적으로 공격을 하고 있는 세빈이와 레일리는 상대도 안 하고 있었다.
쨍그랑!
그리고 결국 세빈이의 영이 검은 구체에 생긴 조그만 틈을 파고들었다.
열쇠를 돌리는 것처럼 세빈이가 검 손잡이를 돌려서 빼자 검은 액체가 바닥 위로 후두두 떨어졌다. ‘다아시의 오만’은 끈적하게 녹아내리더니 금방 딱딱하게 굳었다.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오만’이 소멸]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호기심’의 공격력이 상승]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호기심’의 방어력이 상승]
“저 녀석은 강화가 두 번이나 된 셈이군.”
아더의 방패를 잠시 거둔 레일리가 코트 소매로 이마를 슥 닦았다. 그는 아까보다 더욱 방패를 키워 한 손에 든 후 고개를 들어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또 나를 놀라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지의.”
“지의야, 무리하지 마.”
레일리와 비슷한 타이밍에 세빈이가 내게 말을 건 바람에 전혀 다른 두 개의 말이 나를 향했다. 그 모습이 퍽 우스워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끼기긱―
잠깐의 여유도 참을 수 없었는지 ‘다아시의 호기심’이 갑자기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드득―
녀석의 동그란 몸체에서 다부진 팔 수십 개가 튀어나왔다. 그 후 흰 가로 줄이 생기더니 곧 위아래로 열렸다. 그리고 그것은 거대한 눈동자가 되었다.
“으…….”
징그러워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녀석에게 시선을 단단히 고정했다. 거대한 눈이 무도회장 이곳저곳을 훑다 이내 나를 정확히 응시했다.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호기심’은 ‘엘리자베스 베넷’을 향합니다.]
‘이런……!’
콰아앙!!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수십 개의 팔이 바닥을 쳐내자 ‘다아시의 호기심’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탕! 탕!
드레스 자락을 한 손에 잡은 채로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다. 재빠르게 날아간 탄환이 녀석의 몸에 박혀 그대로 구멍을 냈다.
쿠웅―
녀석의 몸이 바닥에 떨어지기 무섭게 시커먼 그림자가 팔들을 움켜쥐었다.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호기심’이 ‘엘리자베스 베넷’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갑니다.]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호기심’의 공격력이 상승]
까드득―
거대한 팔이 그림자 손을 뜯어냈다. 그에 세빈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림자를 먼저 거둔 후 검으로 빠르게 녀석을 찌르고 뒤로 빠졌다.
콰과광―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십 개의 팔이 무도회장 바닥을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세빈이와 레일리 쪽으로 집어던졌다.
쿵!
다행히 아더의 방패에 막혀 동일한 힘의 공격이 ‘다아시의 호기심’을 향했다. 공격을 그대로 반사당한 녀석은 잠시 주춤하더니 다시 나를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지금까지의 패턴은 단순하다. 몬스터의 이름부터 ‘다아시의 호기심’인 것처럼, 녀석은 엘리자베스 역할인 나를 우선 공격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공격은 적당히 방어하는 선에서만 끝난다.
그걸 역으로 생각하면 내가 공격했을 때 녀석이 방어하기보단 나를 먼저 타격하는 것을 목표로 할 거란 얘기다.
휘이잉―
낮말을 듣는 새를 해제하자 내 몸이 무도회장의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다아시의 호기심’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호기심’이 ‘엘리자베스 베넷’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갑니다.]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호기심’의 공격력이 상승]
녀석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나를 찢으려는 수십 개의 팔들이 더욱 요동치기 시작했다.
드레스 끝의 레이스가 녀석의 팔에 잡히기 직전.
‘제3 형태, 박격포.’
끼리리릭―
나는 자아를 박격포로 바꿔 던져버리고 다시 위로 도약했다.
퍼버버버벙!!
발밑에서 벌어지는 폭발에 드레스와 아이테르의 로브가 이리저리 펄럭거렸다. 먼지바람이 자욱하게 깔려 녀석이 어떻게 됐는지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다아시의 호기심’이 소멸]
[전개 달성률 : 20%]
‘이제 5분의 1 정도 온 건가…….’
라파엘라가 말한 것처럼 갈 길이 멀었다.
눈앞에 뜬 상태창이 사라지고 나서야 먼지가 가라앉았다. 바닥이 보이고 나서야 난 조심스럽게 무도회장의 바닥에 착지했다.
또각―
“원작에 있지도 않은 몬스터를 잡아서 달성률을 올리다니. 어이가 없군.”
“누구 하나가 죽으면 장르가 바뀌니 안 잡을 순 없지.”
세빈이가 레일리의 말에 대답하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 짧게 숨을 뱉었다.
세빈이는 영을 다시 팔에 채우고 내 옆으로 슥 다가왔다.
“네가 만난 몬스터도 이 정도였어?”
“아니. 그것보다는 강한 것 같아.”
“흐음.”
세빈이가 ‘다아시의 호기심’의 잔해를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더 강한 몬스터가 나올 수도 있겠네.”
세빈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몬스터까지는 대충 해결되었지만, 뒤로 갈수록 어떤 녀석이 나타날지 모른다. 더욱 교묘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몬스터가 등장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치지직―
“어어어……?”
그때였다. 내 옆에 검은 균열이 생기더니 그 틈으로 알렌이 상체를 쑥 내밀었다.
“다행히 무사하시네요!”
“그럼 어디 다쳤을 줄 알았나?”
“그럴 리가요. 길드장님 솜씨를 믿고 있었죠.”
그가 싱긋 웃으면서 웜홀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라파엘라는요?”
“베넷 부인 잠들고 나서 제가 다시 데려다드렸어요.”
“하, 그 녀석 얼굴 봐줄 만했을 텐데. 아쉽군.”
레일리가 묘하게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
쿵쿵쿵―
이번엔 출구 방향에서 큰 소리가 났다. 모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 바닥 파편에 가로막힌 뒷문을 열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보였다.
“다아시 님! 안에 계십니까!”
“빙리 님! 젠장, 돌덩이가 앞에 있는 것 같군……!”
세빈이와 레일리의 하인들이었다.
아수라장 속에서 제 주인을 놓쳐 안달이 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지이 씨, 일단 돌아가요.”
“그래야겠네요.”
치지직―
알렌이 다시 웜홀을 열 동안 나는 몸을 돌려 레일리와 세빈이에게 말했다.
“둘 다 몸조심하고 있어. 빨리 스토리 진행시키고 소설가랑 싸워야 하니까.”
“네게 걱정을 다 듣는군. 나는 알아서 잘하니 네 안전이나 신경 쓰도록.”
“응, 알겠어. 지의 너도 조심해.”
표현은 다르지만 레일리와 세빈이 모두 내게 다정한 걱정을 건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웃어 보인 후 알렌을 따라 웜홀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