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42화 (142/366)

142화

세 사람의 등장에 무도회장은 잠깐 정적에 빠졌다. 하지만 금방 오케스트라가 다시 연주를 시작해 적막했던 분위기가 사람들의 말소리로 금방 풀어졌다.

돌아온 무도회장의 활력에도 나는 세빈이와 레일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다른 남자 귀족들과 비슷한 정장을 입었지만 이 무도회장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길, 길드장님이 다아시인 거죠?”

“그런 것 같아요.”

알렌도 눈으로 레일리를 좇으며 말을 얹었다.

‘차라리 레일리가 다아시라 다행이다.’

같이 던전에 끌려온 이들 중 그 누구도 다아시 역할을 맡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극 중 인물과 사랑에 빠진 연기를 해야 했는데 말이지.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제인! 리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니!”

그때 베넷 부인이 나타나 나와 알렌의 팔을 거세게 잡았다.

“베넷…이 아니라 엄마……!”

“지금 빨리, 빨~리 가야 한다고!”

베넷 부인이 끌고 간 곳은 무도회장 끝에 있는 낮은 단상이었다. 그곳엔 리지의 동생들과 이웃처럼 왕래하며 지낸다고 했던 루카스 경이 있었다.

“오호호~ 좀 늦었죠?”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우리의 맞은편엔 세빈이와 레일리. 그리고 빙리의 여동생이 있었다.

“자, 그러니까… 빙리 씨, 빙리 양. 그리고 다아시 씨? 여기가 저희 딸들이에요. 큰딸인 제인, 여긴 엘리자베스, 메리, 캐서린. 그리고 리디아예요.”

베넷 부인은 조금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모두가 베넷 부인의 소개에 맞춰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동안 나는 세빈이를 바라보았다.

세빈이는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옆에 있던 레일리도 똑같이 인사했다.

난 알렌을 처음 보자마자 크게 동요했는데, 세빈이는 역시 침착하…….

우드득―

‘응?’

어디선가 나무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눈동자만 살짝 굴리자 세빈이의 그림자가 눈에 띄게 끓고 있는 게 보였다. 넘쳐흐른 그림자가 결국 단상의 나무판자 하나를 뚫어버린 것이었다.

도르륵 눈동자를 굴려 다시 세빈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세빈이의 검은 눈동자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세빈이는 당장이라도 내 쪽으로 튀어올 것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엘리자베스 양.”

그때였다. 레일리가 나를 불렀다. 난데없는 부름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단상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도 함께 레일리를 향했다.

“저와 한 곡 추시죠.”

“…네?”

“그래, 리지! 어, 어, 얼른 가서 다아시 씨와 한 곡 추고 오렴. 아니 한 곡이 뭐니? 열 곡도 더 추렴!”

듣는 사람이 더 부끄러워지는 베넷 부인의 언동에 귀를 막고 싶었지만, 나는 애써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대신했다.

착―

레일리가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춤을 추는 사람들 쪽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러곤 레일리는 내 허리에 손을 얹고 음악에 맞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띠링―

[전개 달성률 : 12%]

드디어 역사적인 첫 만남이 성사돼서인가, 달성률이 상승했다.

“하아…….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는군.”

레일리가 주위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말을 뱉었다.

“몸은 좀 괜찮아?”

“멀쩡하다. 너도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군.”

그의 말이 사실인 듯 레일리의 상태는 던전으로 이동되기 전 집무실에 막 들어갔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창조자 놈의 파편이라길래 범상치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래도 너랑 내가 리지랑 다아시인 게 어디야.”

“그 점은 동의한다. 진짜로 리지와 온갖 사건을 다 겪어야 하는 줄 알고 등골이 서늘해졌으니.”

또각―

레일리의 발걸음을 겨우 쫓아가는 식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과 어울렸다. 다른 사람이 보면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다행히 내 춤 솜씨를 비웃는 사람은 없는 듯 했다.

따라가기만으로도 바쁜 나에 비해 레일리는 익숙해 보였다. 그가 가볍게 돌 때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우아하게 흔들렸다.

“왕실에서 이런 것도 배워?”

“엄청 어릴 때 배우긴 했지. 앞으로 출 일도 없는데 왜 배우는 건지 몰라서 금방 관뒀지만.”

퉁명스럽게 대답한 레일리의 입가에 갑자기 은근한 미소가 걸렸다.

“그냥 동생의 연습 상대가 될 정도로만 배웠다.”

“그렇구나.”

“그 녀석은 완벽주의자라서 무엇 하나 대충 하는 법이 없었거든.”

동생 이야기를 하는 레일리는 내가 지금껏 봐온 신경질적이고 오만한 얼굴과 달랐다. 짜증난다는 식으로 말하곤 있었지만, 그를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진 눈은 숨길 수 없었다.

“근데 알렌이 제인 역할을 맡은 게 사실인가?”

“응.”

“아까 웃음 참느라 혼났군. 혹시 라파엘라도 만났나?”

“아, 응. 콜린스 역할이라서 우리 집에 자주 올 것 같아.”

“콜, 린스… 쿨럭.”

레일리가 터진 웃음을 기침으로 무마하며 다시 부드럽게 사람들 틈을 파고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오케스트라에 제일 가까운 쪽에 알렌과 세빈이가 춤을 추고 있었다.

“지금 여기선 네가 세빈이랑 친구인 상황인 거지?”

“우습게도 그렇게 됐군.”

레일리가 세빈이가 있는 곳을 흘끔 보곤 말을 덧붙였다.

“원작 스토리를 무시하고 널 찾으러 가려고 하길래 겨우 막았다.”

“하여간 강세빈…….”

레일리가 팔을 위로 들어 날 빙그르르 돌렸다. 다시 그의 손을 잡은 후 천천히 스텝을 따라갔다.

“알렌에게 이 소설에 대해 얼마나 자세하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빙리는 제인과 이어져야 한다. 그게 올바른 엔딩이다.”

“알고 있어. 그래서 네가 내게 먼저 춤을 청한 거잖아.”

레일리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자신의 의도를 알아챈 것이 의외였나 보다.

“그럼 아직까지 정체가 안 밝혀진 건 그 붉은 머리뿐이군.”

“아…….”

최민 헌터의 행방만 묘연한 상황이다. 아직 도입부이다 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다른 사람들을 다 만난 상황에서 그만 없으니까 영 찝찝했다.

“뭐, 변방의 엑스트라일 수도 있고. 그 녀석만 다른 곳으로 떨어지진 않았겠지. 지의, 넌 별일 없었나?”

“아, 맞다. 여기 소설 속이긴 하지만 몬스터도 있어.”

“몬스터?”

레일리는 가볍게 몸을 돌려 오케스트라가 있는 쪽으로 날 천천히 이끌었다.

“라파엘라랑 집 앞 호수에서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소설가가 나타나서 몬스터를 두고 가더라고.”

“정신 잃기 직전에 얼핏 봤던 상태창 내용과 딱 들어맞는군. 등급은?”

“체감상 B급.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어.”

오케스트라가 아까보다 느린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위의 사람들이 파트너에게 인사를 한 후 옆으로 살짝 물러나 다른 사람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자, 그러면 상대를 좀 바꿔볼까?”

레일리가 남자 귀족처럼 인사를 하곤 옆으로 자신의 옆에 있던 사람과 자리를 바꿨다.

“어……!”

그러자 내 앞으로 부드럽게 웃고 있는 세빈이가 다가왔다.

“웃지 마요, 길드장님…….”

“미인 역할이, 자할, 어울리는군.”

슬쩍 옆을 보니 부끄러워서 죽으려 하는 알렌과 웃음을 참느라 목소리까지 덜덜 떨리는 레일리가 있었다.

사락―

“무사해서 다행이야.”

세빈이가 날 끌어당기며 춤을 추는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너 오만과 편견 읽었어?”

“아니. 그래서 처음 일어났을 땐 많이 혼란스러웠지.”

세빈이는 픽 웃곤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나도 세빈이를 따라 빙그르르 돌았다.

“저 사람이 대충 알려줘서 내용 파악은 했어.”

“너나 나나 주변에서 알려줄 인간이 있어서 다행이네.”

세빈이와 발을 맞추며 고개를 쭉 빼 레일리와 알렌을 바라보았다. 저기도 한창 정보를 교환하는 중인지 입이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게 보였다.

“지의야.”

“응?”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일단 이야기부터 진행시켜야지. 그래도 레일리가 다아시 역할이라서 생각보다 빨리 끝날 수도 있…….”

“그게 아니고.”

허리를 잡은 세빈이의 손이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차분하다 못해 완전히 가라앉은 세빈이의 태도에 나도 덩달아 입을 다물게 됐다.

“정말로 온 세상 사람들을 다 구하려는 거야?”

“…….”

“난 네 행동을 막을 수도 없고, 막을 권리도 없어.”

세빈이가 홀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그러니까 그냥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어.”

“세빈아…….”

“어떤 이유를 들어도 다 믿을 테니까.”

고풍스러운 음악이 흐르는 화려한 무도회장에서 세빈이는 그 누구보다도 외롭고 괴로워 보였다.

‘지금도 내가 죽는 모습을 보고 있을까?’

입 밖으로 얘기를 꺼낸 적은 없지만 분명 세빈이한테도 ‘구원자의 죽음을 목격한 자의 인과율’이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또각―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시선을 받기 전에 내가 세빈이를 잡아끌어 움직였다. 내가 가는 대로 세빈이가 다리를 움직였다. 발을 들 때마다 시커먼 그림자가 끈적하게 눌어붙었다.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줘서 다행인가.’

세빈이는 이제 자신의 불안을 자연스럽게 내게 보였다. 썩어 문드러져 가는 속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입을 열었다.

“앞으로 세 번 정도, 비슷한 일이 있을 거야.”

“…응.”

“네가 이해하지 못할 행동도 많이 할 거고.”

세빈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움직임에 맞춰 움직였다.

“하지만 절대로 너나 내 동료들을 두고 사라질 생각은 없어.”

“…이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어.”

“악몽에서 내가 말한 거 잊었어?”

드레스 자락을 밟을까 봐 고개를 내려 바닥을 보던 나는 고개를 들어 세빈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틀렸다는 걸 증명할 거라니까.”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세빈이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곧 눈동자를 굴려 날 보았다.

[발언 결과 : 안심]

“…알겠어.”

허리를 잡은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대신, 어딜 꼭 가야 한다면 나한텐 알려줘.”

“응.”

“다른 사람 말고, 꼭 나한테만.”

어린애 같은 투정을 부리곤 세빈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얏.”

내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자 세빈이가 엄살을 부렸다.

어느새 음악은 아까보다 훨씬 활기찬 곡으로 바뀌었다. 세빈이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도 아까보다 훨씬 걷혀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납치당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어머님께서 연락해 주셨어.”

“엄마가?!”

“쉬잇.”

나는 텁, 빠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네가 나랑 제주도로 여행 간 줄 아시더라고.”

“뜬금없네…….”

“지의 네가 굳이 내 핑계를 대면서 어디 갈 애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직감적으로 알았지.”

“그럼 내가 있는 곳이 영국이라는 건 어떻게…….”

쾅!

그때 갑자기 누군가 무도회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문소리가 워낙 크게 나 홀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멈춰 무도회장은 무거운 적막 속으로 빠졌다.

“사, 산사태입니다……! 엄청나게 커다란 바위가 굴러오고 있어요!”

“뭐라고?!”

“어머머……!”

‘산사태?’

콰과광!!

“으아악!”

“꺄아악!!”

그의 말을 제대로 곱씹기도 전에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사람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출구 쪽으로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있을 거라고 못 들었는데……!’

퍽―

도망가는 사람들에 치여 몸이 휘청거렸지만, 우선 소설의 내용을 아는 레일리를 찾는 게 먼저였다.

그를 찾기 위해 다급히 고개를 돌리자 뛰어가는 사람들 틈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레일리와 알렌이 보였다.

“세빈아!”

“알았어.”

탁―

나는 세빈이의 손을 꽉 잡은 채로 인파를 헤집어 레일리가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왔나.”

“지금 이 장면, 원작엔 없던 거지?”

“그렇다. 이 주변에 산이 어디 있다고 산사태가 갑자기 생기겠냐.”

레일리가 어이없다는 듯 이 아수라장을 눈으로 죽 훑었다.

원작에 없는 산사태, 갑자기 굴러오는 커다란 바위…….

답은 하나뿐이었다.

스으윽―

[다아시는 춤이라면 질색하는 남자였다.]

[차라리 이곳이 전부 묻혀버렸으면 좋겠군.]

오만한 소설가가 또다시 작품에 개입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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