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저 인간이 콜린스 역할이라고?!’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한 걸 겨우 참고 무릎을 살짝 굽힌 후 다시 폈다. 나의 19세기 인사에 라파엘라도 짧게 묵례를 했다.
그는 항상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답지 않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그의 입꼬리는 1초에도 수십 번씩 떨리고 있었다.
겨우 진정한 그가 베넷 부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베넷 부인. 혹시 엘리자베스 양과 잠깐 산책을 해도 되겠습니까?”
“아유, 되고말고요. 리지, 어서 콜린스 씨에게 가거라.”
“네, 네…….”
라파엘라가 문 쪽으로 손을 뻗으며 내게 먼저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난 뒤를 돌아 알렌을 한 번 본 후 마당으로 나왔다.
쿵―
“하아아아…….”
문이 닫히자마자 라파엘라는 기다렸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윌리엄 콜린스는 고리타분하고 무례한 남자예요. 그래서 아까 좀 차갑게 대한 거랍니다. 이해해 주세요, 자매님.”
“그 캐릭터를 잘 아나 보네?”
“하하, 『오만과 편견』을 안 읽은 영국인이 있기나 할까요?”
“찾아보면 한 명쯤은 있겠지.”
시답잖은 대화를 하며 길을 따라 한참 걷자 호수를 낀 커다란 초원이 나타났다. 라파엘라는 베넷가의 허름한 저택을 슬쩍 본 후 기지개를 켰다.
“그나저나… 이 던전은 정말로 기묘하네요. 자매님 나라에 있었던 그 던전도 이런 모습이었나요?”
“그 던전은 우리의 과거를 보여줬어. 이렇게 소설 안으로 들어오는 건 전혀 예상도 못 했네.”
띠링―
[전개 달성률 : 2%]
그때였다. 0%였던 전개 달성률이 갑자기 2% 상승했다. 라파엘라의 눈앞에도 똑같은 상태창이 뜬 것인지 그 또한 눈을 크게 뜬 채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다른 곳에서 이야기가 전개된 걸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마 저와 자매님이 대화를 나눠서 그런 것 같아요.”
“왜? 둘이 뭔 사이였길래?”
“콜린스와 엘리자베스가 무슨 사이라서가 아니라, 제가 제인을 먼저 만나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라파엘라가 베넷가 저택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원래 콜린스는 제인에게 청혼하려 했거든요. 그땐 이미 빙리와 제인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던 중이라서 베넷 부인 선에서 이미 거절된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네가 제인과 만났으면 베넷 부인이 너와 걔의 결혼을 추진했을 거라 원작 엔딩과 멀어질 수도 있다, 이 말이지?”
“역시 자매님은 이해가 빠르시네요.”
라파엘라는 박수까지 치며 나를 추켜세웠다.
“알렌이 제인 역을 맡을 줄은 몰랐지만요.”
그가 알렌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낮게 쿡쿡대며 웃었다.
“아, 그 빙리라는 캐릭터는 누구야? 아까 식사하면서 베넷 부인이 얘기하던데.”
“남자 주인공 다아시의 단짝이에요. 다정하고 위트 있는 미남이고 마지막엔 제인과 결혼하죠.”
그래서 그렇게 베넷 부인이 호들갑을 떨었던 거구나. 19세기 유럽이다 보니 베넷 부인은 자신의 딸들을 좋은 집안과 결혼시키고 싶어서 안달 난 듯 보였다.
“아무튼 원작 내용과 동일하게 흘러가게 하기 위해선 지의 자매님께서 이번 주에 있을 무도회에서 다아시를 만나야 합니다.”
“리지는 다아시를 처음엔 싫어했다고 하는데, 그 무도회에서 내가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어?”
“어차피 온갖 무례는 다아시가 해줄 거니까 자매님께선 그저 그의 언동을 몇 번 비꼬아서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우스운 조언이네.
그리 생각하며 나는 라파엘라의 말을 기억에 새기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역할 받았는지 몰라?”
“유감스럽게도 알 수 없었어요.”
딱―
라파엘라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아, 빙리에 대한 소문은 좀 들었네요.”
“뭐, 연 4천 파운드 버는 거?”
“아니요. 원작에 나온 소문 말고 다른 소문이요.”
라파엘라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리자 그는 베넷 저택 눈치를 본 후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너무 잘생겨서 눈을 마주치면 몸이 잠깐 굳을 정도다, 라는 소문이요.”
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천천히 머리를 굴렸다.
‘몸이 굳을 정도라…….’
“세빈이 같은데.”
“세빈 자매님 같죠?”
라파엘라와 말이 겹쳤다.
어차피 여기 사람들 눈에 우리는 원작의 외형대로 보이기 때문에, 잘생겼다는 표현은 그냥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눈을 마주치면 몸이 굳는다는 얘기는 100퍼센트 세빈이의 스킬, ‘공포’ 때문일 것이다.
나와 시선이 맞닿자 라파엘라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지의 자매님 편지 전달해 주다가 세빈 자매님 만났을 때도 순간적으로 몸이 마비돼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아무튼 빙리는 세빈이일 확률이 높네. 정보 고마워.”
“별말씀을요.”
이어지는 그의 투덜거림을 가볍게 무시한 후 나는 다시 베넷 저택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일단 돌아가자. 특별한 정보 있으면 바로 알려줘.”
“네, 자매…….”
끼기기긱―
그때 소름끼치는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들자 새파란 하늘에 깃털 펜을 든 커다란 손이 나타난 것이 보였다.
“뭐야, 저게……”
갑작스레 나타난 거대한 손은 시원시원하게 하늘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엘리자베스는 생각했다.]
[생명의 위협까지 이겨낸 후 쟁취한 사랑이야 말로,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소설에 저런 문장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죠~”
라파엘라가 중얼거리며 손을 노려보았다.
그때, 쓰고자 하는 문장을 다 쓴 손은 갑자기 호수로 향했다.
풍덩―
높게 튀어 오른 물이 다시 호수 안으로 빠지면서 예쁜 무지개를 만들어 냈다.
“라파엘라, 무기 꺼낼 수 있지?”
“물론이죠, 자매님.”
나는 ‘자아’를 꺼내 한 손에 쥔 후 호수에 빠진 손을 숨죽인 채 바라보았다.
촤아악!
손이 호수에서 빠져나온 순간, 손가락 틈에 껴있는 검은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손은 거대한 먼지 같은 그것을 초원 위에 내려놓은 후 다시 하늘로 사라졌다.
다시 녀석을 향해 ‘자아’를 조준할 때쯤 녀석의 위에 필기체로 쓴 정보창이 떴다.
[오만한 소설가의 개입―소나기]
[물 속성]
[제인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심하게 쏟아졌다.]
“소설가가 말한 대로네.”
“소설가요?”
“여기에 우릴 끌어들인 놈. 엔딩은 원작대로 가야 하지만, 험난한 과정을 좋아한다는 식으로 얘기했었거든.”
“아, 듣고 보니 그런 상태창을 본 기억이 있네요.”
쿵―
라파엘라가 십자가를 꺼내 땅에 박아 넣었다.
“저 몬스터가 베넷 저택으로 올라가면 안 되니까 빠르게 정리하죠~”
“오케이.”
쾅―!
내가 대답하자마자 검은 먼지가 공중으로 튀어 올라 우리 쪽으로 빠르게 떨어졌다. 나는 공중으로 도약한 후 곧바로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다. 자아에 명중당한 ‘소나기’의 몸에 두 개의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자매님~ 머리 조심~”
“뭐?!”
라파엘라의 경고와 동시에 머리 위로 시커먼 먹구름이 꼈다.
파바박!!
곧장 실드를 펼쳤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대못 같은 비에 몸이 뚫릴 뻔했다.
실드를 한 손에 든 채로 먹구름 밑에서 벗어났지만 그것은 집요하게 나를 쫓았다.
‘성가시네……!’
우우웅―
방아쇠를 길게 당겨 공기를 진동시키자 빽빽했던 먹구름이 서서히 얇게 퍼지기 시작했다.
후웅―
그런 뒤 구원자의 무기 창고에서 배트를 꺼내 먹구름을 마구잡이로 흐트러뜨려 놓았다. 그러고 나서야 먹구름이 완전히 사라졌다.
“자매님 도와주시죠~”
라파엘라의 말에 아래로 고개를 내렸다. 그의 십자가가 ‘소나기’의 움직임을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
타앙!
나는 망설임 없이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새하얀 소리 탄환이 ‘소나기’의 몸에 닿자마자 끈적하게 녹아내려 호수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곤 이내 힘없이 풍덩 빠졌다.
[전개 달성률 : 3%]
녀석을 해치워서일까, 달성률이 아주 조금 올랐다.
“생각보다 시시했네요.”
라파엘라가 십자가를 다시 목걸이로 돌리며 말을 얹었다. 그의 말대로 몬스터의 수준은 B급에도 못 미치는 느낌이었다.
공격도 단순하고 방어력도 낮았다. 아직 소설의 도입부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오만한 소설가가 말한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라파엘라는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베넷 저택과 호수를 번갈아 보았다.
“만약 저 몬스터가 무도회나 다른 인물과 함께 있을 때 나타나면 좀 큰일이겠는데요.”
“아.”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제대로 짚었다. 특히 주요 인물이 몬스터에 의해 죽어버리면 그건 정말로 대재앙이다.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나는 자아를 다시 귀로 돌려놓았다.
“슬슬 돌아가죠. 자매님이랑 너무 오래 있으면 베넷 부인이 리지와 콜린스의 결혼을 미친 듯이 추진할 수도 있어요.”
“그건 막아야지.”
라파엘라와 함께 다시 베넷 저택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돌아가는 동안 그는 앞으로 벌어질 이야기들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동안 들은 그의 말을 정리하자면 ‘아직 갈 길이 멀다.’였다.
제일 급한 것은 이번 무도회에서 다아시를 만나 그의 무례함을 겪고, 내가 그를 혐오한다는 걸 자매들에게 보여주는 일이다.
그 후엔 열심히 오해를 쌓다 다아시의 청혼을 한 번 거절한 후, 그가 이런저런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걸 보며 청혼을 다시 받아주면 된다고 한다.
“연애는 많이 해보셨나요?”
“아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소설 속에서라도 잔뜩 즐기다 가세요~”
얜 어쩜 이렇게 태평할까.
나는 속없는 미소를 짓는 라파엘라를 뒤로 한 채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 * *
“장교들도 올까?”
“키티, 내 리본 어때? 괜찮아?”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 키티와 리디아의 수다는 끊이지 않았다. 메리는 그들의 대화에 끼지 않은 채 구석에서 시집만 읽을 뿐이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알렌을 바라보았다. 밤새 옷을 전부 뜯어 고치더니, 정말로 모든 드레스를 알렌의 사이즈에 맞게 만들었다. 길드전 회의 중 그렸던 그림을 볼 때도 느낀 거지만 손재주가 엄청 좋은 것 같네.
덜컹―
한참 움직이던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나는 제복을 입은 남자의 손을 빌려 마차에서 내린 후 저택 입구를 향해 성큼 성큼 걸어갔다. 제일 마지막에 마차에서 내린 알렌도 부지런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베넷 씨의 딸들이군.”
“소문대로 장녀가 엄청 아름답네.”
“꼭 요정 같아.”
그의 등장에 주변이 술렁였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웃음을 참은 채로 시선을 슬쩍 올렸다. 내 시선에 귀 끝까지 붉게 물든 알렌이 비쳤다.
“드레스 때문에 불편해 죽겠어요.”
“저도요. 그래도 지이 씨는 사이즈가 맞아서 다행이네요. 저는 이틀 내내 다른 천을 떼어다 이어 붙이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는데.”
알렌의 목소리에서 그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용케 사이즈를 늘렸네요. 바느질 배웠어요?”
“좀 사적인 얘기긴 하지만, 사실 길드 들어오기 전까지는 파리에 있는 패션 스쿨을 다녔거든요.”
“진짜요?”
그는 멋쩍은 듯 씩 웃었다.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어서 각성 사실을 숨겼어요. 등교할 때만 고유 스킬을 썼는데, 그걸 하필 길드장님한테 딱 들킨 거죠.”
“저런…….”
“뭐, 미련은 없어요. 벌이는 여기가 더 좋으니까.”
알렌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보이곤 무도회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넓은 홀에 사람들이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연주의 틈엔 사람들의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도 껴있었다.
‘아직 다아시랑 세빈이는 안 왔나?’
다아시와 빙리는 이 무도회에서 리지와 처음 만난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 그 어디에서도 다아시처럼 보이는 사람과 빙리로 추정되는 세빈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끼이익―
춤이 한 차례 끝나자 가장 끝에 있던 문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들의 등장에 즐겁게 웃던 사람들도 어느새 숨을 죽이고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왔나 보군.’
중요한 인물답게 등장도 범상치 않았다.
나는 문이 있는 방향으로 상체를 쭉 빼 이 정적을 만든 주인공들을 확인했다.
“어……!”
내 시선의 끝에 세 명의 여자가 보였다.
하나는 빙리의 여동생처럼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였고, 그 옆엔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건 채 주위에게 눈인사를 하는 세빈이가 있었다.
“저 끝에 계신 분이 다아시 씨지?”
“세상에, 빙리 씨보다 더 멋진 것 같은데?”
“연 수입이 1만 파운드래……!”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빙리의 친구이자,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피츠윌리엄 다아시.
아니,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