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40화 (140/366)
  • 140화

    【오만과 참견】

    ―지, 리―…리…니…….

    뭐지? 웬 여자애 목소리가 들리는데…….

    “리지 언니!”

    “헉……!”

    누군가의 외침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니 처음 보는 백인 여자 아이들이 있었다.

    “얼른 내려와. 아침 먹어야지!”

    “오늘따라 이상하네. 어디 아픈 거 아냐?”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뭐라 수군대곤 방을 떠났다. 그들이 떠난 후 난 방 안을 천천히 살폈다.

    나무로 된 낮은 천장과 바닥. 그리고 꽃무늬 천을 사용한 가구가 놓인 예스러운 집이었다. 흑백 영화에 나올 법한 그런 집.

    ‘일단 생각하자.’

    레일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창조자의 파편이 파괴되면서 그를 집어삼켰다. 그를 구하기 위해 같이 몸을 던지니 오만한 소설가가 뭘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여기가 창조자의 파편 속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일단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부터 알아내야겠다.

    스르륵―

    “응?”

    침대에서 내려오려 하자 내 다리 위로 새하얀 천이 함께 딸려 나왔다. 그 천을 손으로 잡아 올리니 천 밑으로 내 맨 다리가 바로 드러났다.

    바스락―

    완전히 일어서고 나서야 나는 내가 새하얀 실크 원피스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걸 입은 채 전투라도 했다간 순식간에 못 볼 꼴을 보여줄 만큼 하늘거리는 원피스였다.

    주위를 둘러보자 방 한구석에 놓인 전신 거울이 보였다. 그쪽으로 천천히 발을 옮겨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뭐냐, 이게…….”

    거울 안에 비친 나는 서양 귀족이 입을 법한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다. 내 얼굴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라 얼굴 밑으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의 몸 같았다.

    ‘아이테르의 로브는 어떻게 된 거지?’

    허겁지겁 침대 쪽으로 다시 달려가자 이불 안에 새하얀 천이 구겨져 있었다.

    사라락―

    로브를 끄집어내자 그것은 영롱한 빛을 내며 내 손안으로 들어왔다.

    ‘다행이다. 꼼짝없이 잃어버린 줄 알았어.’

    치지직―

    안도의 한숨을 내쉴 무렵 눈앞에 검푸른 글자가 떴다. 일반적인 상태창과 달리 글자 주변이 엄청나게 화려하게 장식된 것이었다. 지금 보니 글씨체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이야기 시작]

    [전개 달성률 : 0%]

    [*원작의 엔딩을 볼 시 오만한 소설가와 만날 수 있습니다*]

    이야기, 전개, 원작, 엔딩…….

    “책 속으로 들어온 건가……?”

    미식가의 파편은 제한 시간 내에 악몽에서 탈출한 후 괴식가를 해치우는 것이 소멸 조건이었다.

    비슷하게 생각해 보면 여기는 소설가의 파편 내부이자 어떤 소설 속이다. 아마 원작의 엔딩을 보면 소설가를 만날 수 있는 것 같고.

    일단 이 소설이 어떤 건지부터 알아내야겠네.

    스윽―

    그때 종이에 펜을 휘갈겨 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난생처음 보는 문장이 유려한 필기체로 쓰여져 나타났다.

    “…이게 책 제목일 리는 없겠지?”

    “리지! 안 내려오니? 너 어디 아픈 거야?”

    “아, 아니에요! 곧 갈게요!”

    나는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에 대답한 후 옷장부터 열었다.

    “하아아…….”

    ‘뭔 놈의 있는 옷들이 죄다 드레스냐.’

    옛날 배경의 서양 소설인 건지 외출복처럼 보이는 옷도 전부 드레스 형태였다. 그 외엔 숄과 망토. 그리고 리본 달린 모자뿐이다.

    익숙하지 않은 생김새의 옷들 중, 그래도 그나마 제일 무난하고 편해 보이는 녹색 드레스를 꺼내 갈아입었다. 그런 뒤 아이테르의 로브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 소설 속에서 전투가 벌어질지는 미지수지만 일단 입고 있는 편이 훨씬 안전하겠지.

    파아앗―

    옷장에 걸린 숄을 떠올리며 로브의 형태를 바꾸었다. 그 후 어깨에 숄을 대충 걸쳐 꽉 묶은 후 방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계단 아래에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와 식기들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그래서 그 총각의 연 수입이 4천… 아니, 5천 파운드라고 하더라고요?”

    “그렇소?”

    “그렇소? 로 끝날 말이 아니죠, 여보! 어떻게든 그 총각을 우리 애들 중 하나와 결혼을 시켜야 할 거 아니에요!”

    기묘한 내용의 대화를 들으며 계단 밑으로 내려가자 꽤나 넓은 방 한가운데 한창 식사 중인 대가족이 있었다.

    “어서 와라, 리지. 너답지 않게 늦잠을 다 자는구나.”

    “네, 네…….”

    가장 끝 쪽에 앉은 중년 남성이 나를 보며 말하곤 다시 구운 당근을 베어 먹었다.

    나는 대충 빈자리에 앉은 후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눈으로 천천히 훑었다.

    중년 부부는 아무래도 이 ‘리지’라고 하는 사람의 부모인 것 같고, 내 주위에 앉은 어린 여자들은 역시 자매…….

    쿠당탕!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깜짝이야! 리지!”

    “언니, 왜 그래?”

    “하우……. 평소에 안 그러던 애가 왜 갑자기 소란이니? 넌 이 어미가 신경 쇠약 있는 거 뻔히 알면서…….”

    “하하하! 내가 당신의 그 신경 쇠약과 20년째 살고 있지.”

    “여보!”

    때아닌 소란에 주위 사람들이 내게 한마디씩 던졌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 옆에 앉은 인물의 정체 때문에 주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알렌이잖아……!’

    나와 비슷한 차림을 한 알렌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에 힘을 준 채 내게 무언가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그는 이내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리지, 식사 후에 잠깐 얘기 좀 할까?”

    “오 그래. 좋은 생각이다, 제인. 네 동생 상태가 오늘 영 안 좋아 보이는구나.”

    나는 쓰러진 의자를 다시 일으켜 세운 후 자리에 앉았다. 잠깐의 정적 후에 다시 테이블은 자매들과 그들의 엄마의 목소리로 시끄러워졌다.

    “어떻게 된 거예요……!”

    “조금 이따가 말씀드릴게요.”

    알렌은 짧게 한마디 하곤 수프를 떠먹었다.

    우득―

    ‘옷이 힘겨워 보이는데, 괜찮나……?’

    드레스의 원래 주인과 알렌의 체격 차이가 심한 건지.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박음질한 천이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당신이 빙리 씨를 만나 보셔야 한다고요!”

    “이거 원, 절차가 꼬였군. 조금 더 일찍 말하지 그랬소. 그러면 내가 오늘 아침에 그를 만나보지도 않았을 텐데.”

    “지금 연락을 취해도 안 늦었어요! 그… 네? 오늘 아침이요?”

    남자의 말에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 제 아내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남자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만났소. 이번 사교 모임에도 참석하겠다고 말하더군.”

    “진심이세요, 아빠?!”

    “신난다!”

    “여보!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

    그의 말에 식사 자리는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자매들은 무도회에서 뭘 하고, 누구를 만나고 싶은 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의 씨, 올라가죠.”

    “네…….”

    나는 알렌의 손에 이끌려 그 공간을 조심스럽게 빠져나와 다시 2층 방으로 올라갔다.

    쿵―

    알렌은 문까지 걸어 잠근 후 내가 앉은 침대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알렌 씨까지 들어온 거예요?”

    “하아……. 그 정체불명의 게이트가 갑자기 크기를 키우는 바람에 집무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여기로 떨어졌어요.”

    “전부요?”

    내 말에 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세빈이랑 최민 헌터도 이곳으로 떨어진 거잖아?!’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

    안 그래도 헌터 협회가 지금쯤이면 내게 파견 요청을 했을 수도 있는데……. 실종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분명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여기서 최대한 빠르게 나가 보는 수밖에.’

    알렌은 한숨을 길게 쉬더니 입을 열었다.

    “살다 살다 『오만과 편견』 속으로 들어올 줄이야.”

    “네?”

    “네?!”

    지의의 반응에 오히려 알렌이 되물었다.

    “호, 혹시 모르세요?”

    “네? 아, 소설이라는 건 아는데…….”

    “설마 안 읽어보신 거예요?!”

    알렌이 눈을 크게 뜨며 펄쩍 뛰었다.

    우득―

    그리고 또다시 그가 입은 드레스 어딘가가 뜯어졌다.

    알렌은 자신의 등을 한 번 살피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딱 붙인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외국 소설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만과 편견』은……!”

    “영국에선 필독서였는지 몰라도 저는 콩쥐팥쥐, 해님달님, 심청전 보고 자랐거든요.”

    “콩… 네?”

    알렌을 진정시킨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설명 좀 해봐요. 전 지금 제 역할이 뭔지도 모르겠거든요.”

    “네……. 최대한 간단하게 얘기해 볼게요.”

    그는 자신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곤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내 역할은 엘리자베스 베넷, 이 소설의 주인공이었다. 리지라는 애칭을 갖고 있고 위로는 언니 한 명, 밑으로는 동생 셋이 있는 베넷 가의 차녀였다. 그리고 알렌의 역할은 내 언니인 제인이라고 했다.

    “제인은 소설 내에선 엄청난 미인이라고 묘사했어요.”

    “…그 설정 지금도 갖고 있는 거죠?”

    “동생들이 제 미모가 부럽다느니 어쨌느니 하는 걸 보니 그런 것 같…….”

    알렌이 말을 뚝 멈추곤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아, 아니에요.”

    “휴우……. 아무튼 여기 사람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진 않는 것 같아요.”

    알렌의 말은 사실이었다. 누가 봐도 동양인인 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는 걸 보니 말이다.

    “남자 주인공은 피츠윌리엄 다아시예요. 돈 많은 미남인데 성격이 좀 안 좋죠.”

    “옛날 드라마 주인공 같네요.”

    “좀 그런 편이죠. 배경이 19세기 영국이다 보니까요.”

    그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곤 말을 이었다.

    “리지는 다아시의 성격 때문에 처음부터 그를 굉장히 싫어해요. 하지만 다아시가 리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성격도 바꾸고 여러 가지 문제도 해결해 주면서 결국 서로 사랑에 빠지죠.”

    “그게 끝이에요?”

    “네. 둘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게 끝이에요.”

    원작의 엔딩이 그렇다면 나도 다아시를 찾아서 그와 온갖 사건을 다 겪고 결혼을 하면 된다는 소린가.

    생각지도 못한 연애 생활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알렌 씨도 그 상태창 보셨죠? 오만한 소설가가 뭐… 이러쿵저러쿵하는 것.”

    “네. 소설가를 만나려면 원작의 엔딩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죠.”

    알렌은 초조한 듯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을 덧붙였다.

    “근데 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데…….”

    “뭔데요?”

    “그 소설가라는 몬스터……? 아무튼 그게 원작 내용을 약간 편집한 것 같아요.”

    레일리와 함께 정신없이 추락하는 와중에 비슷한 상태창을 본 것 같기도 하다. 과정이 험난하고, 목숨이 어쩌구… 했던 것 같은데.

    “뭐, 일단 내용부터 전개하죠. 다른 사람들이 어떤 역할을 받았는지도 조사하고…….”

    “아!”

    갑자기 알렌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제 스킬로 길드장님께 한번 갔다 와볼게요! 그럼 길드장님이 무슨 역할인지 바로 알 수 있으니까요.”

    “아, 그렇겠네요!”

    치지직―

    알렌은 등이 반쯤 뜯어진 원피스 차림으로 검은 균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쿵―

    “응……?”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금방 튕겨져 나왔다.

    “아야야…….”

    바닥에 엎어진 알렌은 주섬주섬 옷 정리를 하며 일어나더니 울상을 지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대상을 못 찾겠다고 하네요…….”

    “여기선 레일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겠네요.”

    알렌은 드레스의 뜯어진 부분을 손으로 가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전 옷부터 뜯어 고칠게요……. 그동안 지의 씨는 최대한 정보를 좀 모아주세요.”

    “네, 네.”

    똑똑―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제인 언니, 리지 언니! 콜린스 씨가 오셨어!”

    “윽.”

    콜린스라는 이름에 알렌은 인상을 찡그리더니 뜯어진 드레스의 일부분을 꽉 잡아 스킬로 겨우 붙여 놓았다.

    “콜린스 씨는 또 누구예요?”

    “소설 내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인물이요. 운 좋게 이 지역 목사가 된 캐릭터예요.”

    “중요한 역할이에요?”

    “풍자의 대상이죠. 재수 없고 못생겼는데 자존심만 드럽게 세거든요. 아, 눈치도 없고요.”

    가차 없는 평가다.

    알렌은 옷을 대충 이어 붙인 후 문고리를 잡았다.

    끼이익―

    문을 열자 작품 속에서 내 동생 역할인 메리, 키티, 리디아가 계단 난간에 매달려 현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키득거리며 콜린스를 비웃는 듯했다.

    도대체 얼마나 엉망진창인 인간이길래 그러는 걸까. 나는 알렌과 함께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아.”

    “제인, 리지……!”

    베넷 부인이 우리를 향해 인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알렌이 치마를 잡고 살짝 무릎을 굽혔고, 그 옆에서 나도 그 모습을 흉내 내자 콜린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니, 정확히는 콜린스의 역할을 받은 라파엘라의 입꼬리가 떨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