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39화 (139/366)
  • 139화

    “이제야 왔네.”

    세빈이가 중얼거렸다.

    집무실 내부는 어두컴컴했지만 그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난 고개를 살짝 돌려 최민 헌터를 바라보았다.

    ‘최민 헌터까지 여기 있을 줄이야…….’

    그는 나를 빤히 응시하다 레일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자매님들 오랜만이네요!”

    그때 라파엘라가 집무실의 불을 켜며 반가운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그제야 두 사람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세빈이는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은 채 레일리 무리를 천천히 훑고 있었고, 최민 헌터도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었다.

    잠깐, 자매님‘들’이라고?

    순간 라파엘라의 말에 이상함을 느껴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너, 왜 나한테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고 말 안 했어?”

    “네? 그야, 안 물어보셨으니까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라파엘라는 안경을 슥 올리며 세빈이 쪽을 흘긋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으음? 근데 미준 자매님은 어디 계시죠?”

    “하미준 헌터까지 왔었어?!”

    “지의야, 일단 이쪽으로 와 줘.”

    세빈이는 라파엘라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날 안심시키려 하는 건지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녀석과 10년을 얼굴을 마주 보고 살아온 나로선 저 웃음이 억지웃음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세빈아.”

    “응?”

    “우선 그림자부터 집어넣고 얘기하자.”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역시 여차하면 이들을 공격할 생각이었나 보다.

    눈만 굴려 바닥을 슬쩍 보니 우리 쪽으로 쭉 몸을 늘린 세빈이의 그림자가 다시 원래의 크기로 돌아가고 있었다.

    [발언 결과 : 수용]

    “알겠어.”

    세빈이는 내 말을 순순히 들어주며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이렇게 당당한 침입자는 또 처음 보는군.”

    끼익―

    레일리가 머리를 거칠게 털며 집무실 한가운데 있는 1인용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는 세빈이와 최민 헌터를 마주 본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설마 싸우러 온 건가?”

    “상황에 따라선 그렇게 될 수도 있겠죠.”

    “이런. 동료의 친구를 때려눕히는 취미는 없는데.”

    레일리 입에서 나온 동료라는 말에 세빈이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세빈이가 시선만 옮겨 나를 바라보았다. 새카만 눈동자가 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쿵―

    “윽…….”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세빈이의 정신계 스킬 때문에 몸이 살짝 굳었다 다시 풀렸다.

    ‘분위기가 과열되기 전에 말이나 돌려야겠군.’

    나는 테이블 쪽으로 성큼 다가가 세빈이의 바로 옆에 있던 2인용 소파에 앉았다.

    “다들 괜히 시비 걸지 말고 일단 앉아요. 앉아서 얘기하자고요.”

    “맞아요. 다들 너무 날 서 있습니다, 자매님들~”

    라파엘라도 천천히 다가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세빈이는 내 옆자리에 앉았고, 최민 헌터는 내 오른편에 섰다. 멀리서 분위기만 살피던 알렌도 어디선가 의자 하나를 꺼내 털썩 앉았다.

    당장이라도 무언가 벌어질 것 같았던 분위기가 아주 약간 소강되는 듯했다.

    ‘이제 상황을 좀 정리해 볼까.’

    레일리에게 납치당한 후 세빈이, 최민 헌터. 그리고 하미준 헌터가 날 구조하기 위해 영국으로 왔다. 대충 시간을 계산해 보면 아마 내가 헝가리 던전을 돌고 있을 쯤 도착했을 터.

    그리고 내가 길드전에 참가하는 동안 하미준 헌터는 귀국한 뒤, 최민 헌터와 세빈이만 남아서 나를 기다렸을 것이다.

    “신지의 헌터를 왜 납치하신 겁니까.”

    최민 헌터의 말에 정적이 깨졌다. 레일리는 입을 다문 채 대답을 미루고 있었다.

    세빈이와 최민 헌터가 궁금해하는 건 노블레스가 나를 납치한 이유다. 그리고 내가 알고 싶은 건 나의 납치 사실을 어찌 그렇게 빨리 알았으며, 위치는 또 어떻게 알아냈느냐다.

    ‘일단 노블레스가 날 납치한 이유부터 설명하는 게 좋겠어.’

    나는 최민 헌터와 세빈이를 슬쩍 본 후 숨을 들이마셨다.

    “길드전 때문이야.”

    창조자와 녀석의 파편을 언급하지 않고 납득시킬 수 있는 이유는 길드전뿐이다.

    내 대답에 세빈이의 눈이 허공을 바라보다 이내 내 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고작?”

    세빈이의 입 밖으로 그의 본심이 샜다. 최민 헌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숨을 길게 내쉴 뿐이었다.

    레일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라도 좀 거들라는 뜻으로 눈에 부릅 힘을 주자 레일리가 어이없다는 듯 눈알을 굴렸다.

    “맞다. 고작 길드전 때문에 내가 저 녀석을 납치했지.”

    “왜 하필 신지의 헌터였습니까?”

    “얘가 적합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전술까지 너희한테 일일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전술이길래 납치까지 했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의 태도는 내가 지금까지 봐 온 최민 헌터의 모습 중 가장 날이 서있었다.

    최민 헌터와 레일리 사이에 팽팽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길드전에 참여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지의다. 그것만큼은 확실히 해두지.”

    레일리가 말을 덧붙였다.

    그에 세빈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왜 길드전에 참여한 거야?”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듯 세빈이는 내게 묻고서도 몇 번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질적인 보상을 핑계로 대면 납득하지 않을 거야.’

    조금 더 큰 이유가 필요하다. 누가 들어도 반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유.

    “…레일리가 갖고 있는 정보를 얻으려고.”

    “정보?”

    “응. 쟤가 그동안 던전의 이상 현상을 연구했거든.”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당황]

    “아, 음. 그렇지.”

    그는 잠깐 혼란스러운 듯 눈을 크게 떴으나,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꽂히기 전에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최근 너희 나라에서 이미 소멸됐던 S급 게이트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기선 그걸로 세 시간짜리 특집 방송을 하더군.”

    “영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 하지만 경계하고 있는 상황이다. 유럽은 다른 대륙에 비해 S급 게이트가 많이 나타나고 사라졌으니 말이야.”

    ‘레일리, 나이스.’

    길드전 때도 정보 수집 능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가평에서 벌어진 일까지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내가 이야기하기 편한 방향으로 분위기를 틀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레일리에게 들었다는 식으로 파편에 관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겠는걸.

    최민 헌터의 질문에 대답한 레일리가 내 쪽으로 시선을 넘겼다. 자기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젠 내가 알아서 하라는 눈치다. 그에게 나는 살짝 웃어 보인 후 입을 열었다.

    “레일리가 길드전 때문에 날 납치한 건 맞지만 최종 선택은 나에게 맡겼어. 그리고 내가 레일리의 정보를 조건으로 길드전에 참여하기로 한 거야.”

    “아, 그리고 이건 대외비다. 우리 길드 내에서도 아는 녀석들은 손에 꼽으니 주의해 줬으면 좋겠군.”

    이 정도면 밑밥은 깔았다. 세빈이와 최민 헌터 모두 말의 씨앗이 개화한 상태니 적당히 흔들어 주면 쉽게 납득할 것이다.

    ‘정 안 되면 수긍의 탄환이라도 쓰는 수밖에.’

    그때 세빈이가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굳은살이 박여 딱딱한 손바닥이 느껴졌다.

    “이러다 정말 온 세상 사람들 다 구하겠네.”

    세빈이는 자포자기한 것처럼 바닥 쪽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닌데…….’

    왜 그랬냐고 반발할 줄 알았는데, 세빈이는 누그러진 태도로 낮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괜찮아. 지의 네가 하는 일이라면 존중해야지.”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이러면 탄환까지 쓸 생각을 한 내가 너무 나쁜 사람인 것 같잖아.’

    그 손 위로 다시 내 손을 덮자 세빈이가 고개를 들었다.

    “악몽 안에서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응.”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신뢰]

    세빈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사라지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잔뜩 풀이 죽은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계속 말할게.”

    나는 미식가 던전처럼 경계보다 특수한 클리어 조건이 있는 던전이 계속해서 나올 가능성. 그리고 그 던전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나라를 말했다.

    회귀를 통해 알아낸 것과 추측들을 전부 레일리가 조사한 것으로 둔갑하여 전달하자 라파엘라와 알렌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 길드장을 바라보았다.

    “길드장님, 언제 저희 모르게 그런 걸 다 조사하신 거예요?”

    “도대체 날 어떤 사람으로 봤길래 그러지? 맨날 술 퍼마시고 놀고먹는 망나니?”

    “어머~ 그렇게까진 말씀 안 드렸는데.”

    “…….”

    라파엘라의 해맑은 말에 레일리가 인상을 팍 구겼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말을 덧붙였다.

    “영국도 안전하지 않을 거다. 그런 던전이 지금 당장 열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일 테…….”

    그때 갑자기 레일리가 입을 다물었다.

    “레일리?”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한 그는 갑자기 심장 주위를 움켜쥐었다.

    “길드장님!”

    “다, 들… 비켜……!”

    쾅!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파악할 틈도 없었다.

    레일리는 테이블 위로 고꾸라진 채 숨을 헐떡였고, 라파엘라는 바로 치유 스킬을 빠르게 쏟아냈다. 하지만 레일리의 상태는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악화될 뿐이었다.

    치지직―

    그때 묘하게 익숙한. 그리고 엄청 불길한 스파크가 그의 몸 주위에 일었다.

    쿵, 쿵―

    좋지 않은 예감이 전신을 훑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나는 속이 뒤집히는 듯한 감각을 이겨내고 레일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레일……!”

    치지직!

    그때 레일리가 엎드려 있던 테이블이 게이트로 바뀌었다.

    게이트는 밑으로 향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대로 레일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레일리를 집어 삼키려는 것이 창조자의 파편이라는 사실을.

    텁―

    “큿……!”

    “지의야!”

    “신지의 헌터!”

    레일리의 팔을 잡자마자 나는 그대로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누군가 내 다리를 잡는 힘이 느껴졌지만 게이트가 끌어당기는 힘이 더 강해 나의 추락을 막을 순 없었다.

    “레일리! 정신 좀 차려 봐!”

    레일리는 완전히 기절했는지 온몸에 힘이 빠진 상태였다.

    쉬이이익―

    그제야 그의 가슴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게 보였다. 그 틈에선 검은 모래들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 모래들은 텅 빈 이 공간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간 창조자의 파편이 스스로 깨지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설마 창조자가 한 짓인가?’

    자신의 파편이 깨질 것 같으니 미리 레일리를 처리하려고 했을 수도 있어.

    [오만한 소설가가 자신의 서재를 바라봅니다.]

    [그곳엔 그가 좋아하는 아주 오래된 명작들이 꽂혀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눈앞에 글씨가 떴다.

    [그는 그중 한 권을 골라 읽기 시작합니다.]

    [모험 소설을 좋아하는 그가 유일하게 읽은 로맨스입니다.]

    [하지만 그는 어딘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찹니다.]

    [세기의 명작을 비웃을 만큼 그는 오만한 사람이니까요.]

    미식가는 악몽을 보여줬는데, 이 오만한 소설가는 우릴 어떻게 할 셈일까. 나는 불안한 마음을 최대한 숨긴 채 레일리의 팔을 꽉 잡았다.

    [오만한 소설가가 펜을 듭니다.]

    [“과정은 험난한 게 좋겠어. 그래, 예를 들면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들이 있는 거지.”]

    [오만한 소설가의 펜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하지만 엔딩은 행복해야 돼. 원작처럼 말이야.”]

    [오만한 소설가가 책을 덮습니다.]

    [입장한 등장인물 6명]

    [만들어진 시간선에 입장합니다.]

    [전개 달성률 : 0%]

    [*원작의 엔딩을 볼 시 오만한 소설가와 만날 수 있습니다*]

    삐이이이이―

    끔찍한 이명과 함께 나의 의식은 저 멀리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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