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캉, 캉!
성 입구는 여전히 레일리와 토마스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길어진 전투에 두 사람 모두 엉망진창이었지만 상대적으로 레일리보다 토마스가 훨씬 지쳐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길드장님이 부탁이 있다고 하셔서요.”
“레일리가요?”
나는 다시 성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레일리는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나를 흘끔 본 후 다시 토마스와의 전투에 집중했다.
그는 아더의 방패로는 불의 고리들을 막고 메이스로는 토마스의 단검을 튕겨냈다. 그동안 땅은 끊임없이 꿈틀대며 토마스의 균형을 흔들어 놓았다.
‘토마스가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네.’
“이대로 가면 언젠가 길드장님이 이길 거예요.”
“그렇죠.”
“그럼 저희의 왕관 수는 241개. 큰 이변이 있지 않는 이상 저희가 1위예요.”
“그래서 레일리가 저한테 부탁한 게 뭐예요?”
알레는 랭킹을 슬쩍 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아우레올라 영지에 가서 모네의 정원 길드장이 말한 게 사실인지 확인해 주세요.”
리애나가 했던 말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근데 유일하게 어떤 집만 헌터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더라고.”
거주 지구에 있는 집에 아우레올라의 왕일지도 모르는 헌터가 갇혀 있다. 레일리는 그걸 먼저 해결할 셈이었다.
“만약 사실이라면요?”
“왕관을 부수라고 하셨어요.”
“…네?”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해치우고 싶었던 아우레올라인데, 그 역할을 나에게 넘겨준다는 건 생각했던 그림이 아니었다.
알렌은 다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픽 웃었다.
“뭐 때문에 그러시는지 알아요. 하지만 길드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그렇게나 복수하고 싶어 했는데…….”
“그만큼 지이 씨를 신뢰한다는 뜻이겠죠.”
그는 여전히 서툰 발음으로 내 이름까지 넣어가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 지금은 그의 말을 따르자.’
아무리 창조자의 시나리오에 의존했다곤 하지만, 나보다 레일리가 길드전 경험이 풍부할 테니까. 전략에 관한 건 그가 더 잘 알 것이다.
어쩌면 아우레올라의 작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정면 승부를 할 기분이 아닐 수도 있지.
“알겠어요. 빨리 다녀올게요.”
“다치지 마세요!”
나는 알렌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그대로 공중으로 뛰어 올라 성곽을 넘었다.
휘이잉―
허공을 달리니 바람 소리가 귀를 마구 때렸다.
모네의 정원 영지 입구를 기준으로 직진하면 불꽃 길드의 영지. 그리고 그 너머의 거주 지구로만 구성된 영지가 아우레올라의 것이라고, 리애나가 말했다.
난 고개를 돌려 한바탕 흙으로 난리가 난 모네의 정원 길드 영지를 확인했다. 그곳을 등지고 앞으로 달리자 얼마 안 있어 불꽃이 그려진 깃발이 보였다. 길드원 전부가 노블레스 영지 쪽으로 간 건지 성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후우, 후…….”
어느 정도 숨이 찰 정도로 달리자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는 동시에 회색 벽돌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풀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삭막한 거주 지구와 성.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 달린 트럼프 카드 깃발.
‘여기가 아우레올라 영지군.’
치지직―
그때 위쪽에서 노이즈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현재 랭킹 부분에 변화가 생겼다.
[Current Ranking]
1. NOBLESS(172) : 117(-)
2. Aurèola(7) : 109(▲17)
3. Le jardin de Monet(117) : 76(▼1) [END]
‘언제 저렇게 올라온 거야?!’
여러 팀으로 나눠서 길드를 공략한 건지 아우레올라의 순위가 노블레스의 바로 밑으로 추격해 왔다.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현재 랭킹을 쭉 읽어갔다.
[Current Ranking]
1. NOBLESS(172) : 117(-)
2. Aurèola(7) : 109(▲17)
3. Le jardin de Monet(117) : 76(▼1) [END]
4. Eintracht(98) : 70(▼1) [EN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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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Flourish(42) : 19(-) [END]
“이런…….”
노블레스, 아우레올라. 그리고 우리와 싸우고 있는 불꽃 길드를 제외한 모든 길드가 전멸이었다.
만약 레일리가 토마스를 해치운다 치면 남은 건 아우레올라와 노블레스 둘뿐이다.
노블레스가 아우레올라를 잡으면 1위가 확정되는 것이고, 그 반대라면 역전으로 아우레올라가 승리한다.
휘이잉―
아우레올라의 영지를 향해 빠르게 달렸다. 여기까지 와서 모두 물거품이 되도록 둘 수 없다.
‘레일리의 믿음에 보답해야 해.’
주거 지역으로 들어오자 똑같이 생긴 벽돌집들이 길을 따라 가지런히 서있었다. 가끔 광장처럼 보이는 공간과 시장 같은 구역도 있었지만, 집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는 곳곳을 눈으로 빠르게 훑으며 사람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벌레 하나 없을 것 같은 삭막한 거주 지역의 한가운데, 드디어 사람이 보였다.
서너 명 정도의 무리가 빨간 지붕 벽돌집 주위를 서성거리며 무어라 떠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며 오른쪽 눈을 감았다.
‘A급 세 명과 B급 한 명…….’
소리 파동 공격을 쓰면 순식간에 제압할 순 있을 것이다. 하나, 내 고유의 공격인 터라 정체를 들킬 가능성이 있다. 물론 소리 파동 공격 말고 탄환으로 공격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한 명이 탄환에 맞는 순간 다른 헌터들이 즉각 대응을 할 게 뻔했다.
철컥―
잠시간의 생각 끝에 나는 아우레올라의 성 깃발을 향해 자아를 조준했다.
‘일단 시선부터 분산 시키자.’
타앙!!
커다란 총성과 함께 소리 탄환이 빠르게 깃발을 향해 날아갔다. 새하얀 궤적을 남기며 날아간 탄환은 정확히 깃발을 관통했다.
“뭐, 뭐야 저게!”
“우리 깃발이……! 컥!”
“프랭ㅋ…….”
집 주위에 있던 헌터들이 우왕좌왕하며 성을 바라보는 틈을 타 그들에게도 작은 탄환을 빠르게 발포했다.
털썩―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지키는 모든 헌터들이 머리를 싸매고 쓰러지더니 이내 완전히 기절해 버렸다.
“후우…….”
나는 집 앞에 조용히 착지한 후 숨어 있는 길드원이 있는지 살피기 위해 주변 골목들도 꼼꼼히 살폈다. 다행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치지직―
어느새 익숙해진 노이즈가 들려왔다. 나는 시선을 돌려 현재 랭킹을 바라보았다.
[Current Ranking]
1. NOBLESS(172) : 241(-)
2. Aurèola(7) : 109(-)
3. Le jardin de Monet(117) : 76(-) [END]
4. Eintracht(98) : 70(-) [END]
‘해치웠구나!’
불꽃 길드의 왕관 수가 노블레스 쪽으로 넘어왔다.
그렇다면 남은 건 단 하나.
이 집 안에 갇힌 불쌍한 하급 헌터의 왕관을 부수는 일뿐.
달칵―
문고리를 돌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우리 집 거실만 한 사이즈의 작은 공간에 웬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나를 아직 못 본 건지 열린 문만 빤히 바라봤다. 그러곤 문이 열린 걸 의아하게 생각하다 이내 다시 의자에 앉았다.
탱그랑―
그가 팔걸이에 손을 올리자 무언가 금속 같은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벽에 딱 붙은 채로 눈만 굴려 그의 손을 보니, 그의 가운데 손가락에 왕관이 반지처럼 끼워져 있었다.
‘조금 허무한 마무리네.’
그의 손보다 조금 높은 곳을 조준해서 방아쇠를 당기면, 아마 공기 진동에 왕관은 쉽게 파괴될 것이다.
난 자아를 든 손만 살짝 들어 그의 손보다 조금 높게 조준했다.
탕!
가벼운 파열음이 들리는 동시에 탄환이 벽을 향해 날아갔다.
쨍그랑!
탄환이 왕관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결국 산산조각을 냈다.
“뭐야?!”
그제야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우수수 떨어지는 왕관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날 인식하기 전에 천천히 집 밖으로 나와 랭킹을 올려다봤다.
[Current Ranking]
1. NOBLESS(172) : 241(-)
2. Aurèola(7) : 109(-)
3. Le jardin de Monet(117) : 76(-) [END]
“……뭐?”
248개여야 할 노블레스의 왕관 수가 여전히 241개였다. 게다가 아우레올라의 왕관 수 옆에 떠야 할 [END] 표시는 온데간데없었다.
뭔가 대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콰그작―
“커헉……!”
“묘~하게 시선이 느껴져서 기분 탓인가 했는데. 역시 은신 스킬이었군요?”
갈비뼈가 뒤틀리는 고통이 느껴지기도 전에 몸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분명 주먹으로 맞은 걸 텐데 거대한 돌덩이로 맞은 느낌이다.
“아하하, 작전대로 될 줄이야. 역시 무식한 노블레스 놈들 때려잡는 데 우리 길드장님이 최고라니까?”
“…….”
“어라, 기절했어요? 재미없네…….”
바닥에 엎드린 채로 숨을 참자 그는 내가 의식을 잃은 줄 아는 건지 콧노래를 부르며 내게서 멀어졌다.
‘스틱스 강 발동.’
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동시에 부서진 것 같은 갈비뼈가 순식간에 붙어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는 여전히 나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통화를 걸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뒷모습을 왼쪽 눈으로 살폈다.
[각성자 피에르 지오반니]
[대지 속성]
[고유 스킬 A등급]
[A급 공격계 스킬 ‘벽돌(Mattóne)’ : 신체의 일부를 벽돌처럼 단단하게 만든다. 오랫동안 유지할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귀속 무기 : A급 너클 ‘사자의 발톱(Griffie di leone)’]
[무기 비문 : 부숴라! 할퀴어라!]
[업 해당 사항 없음]
[사명 해당 사항 없음]
[*구원 해당 사항 없음*]
A급 공격계, 왕관 수가 7개로 계산될 수 없는 등급의 스킬이었다.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미끼였어.’
일부러 상급 헌터를 가둬 놓고 그 집을 호위하는 척을 한 것이다. 아마 진짜 왕은 이 집이 아닌 다른 집에 숨어 있거나, 아예 성 안에 방치되어 있겠지.
아우레올라가 뿌려 놓은 미끼를 보기 좋게 물었다.
“네, 로미나 님. 네.”
그는 부길드장인 로미나와 통화를 하느라 정신없었다.
“아, 곧 그놈들 영지라고요? 빠르기도 하셔라. 알겠어요! 저도 곧 가겠습니당~”
예상한 대로 아우레올라는 노블레스 영지로 향하고 있었다.
노블레스는 불꽃과의 전투로 조금 지친 상태일 것이다. 특히나 토마스를 혼자서 상대한 레일리의 피로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빨리 노블레스 영지로 복귀해 레일리를 보호해야 한다. 만약 레일리가 쓰러지고 그가 왕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 그들은 닥치는 대로 노블레스의 모든 헌터들을 공격할 것이다.
피에르가 내게서 완전히 관심을 끈 순간.
탕!
“우욱……!”
소리 탄환이 그의 몸을 관통했다.
쿵―
그가 머리를 입을 틀어막은 채 기절하고 나서야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야 해.’
나는 낮말을 듣는 새로 도약해 노블레스 영지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제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기를 기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