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30화 (130/366)
  • 130화

    파지직―

    균열이 생기자마자 그 안에서 라파엘라와 알렌이 나왔다.

    “하~ 힘들었네요.”

    “만났어? 편지는 전해줬어?”

    “확실하게 전해드렸습니다, 자매님~”

    ‘다행이다…….’

    혹시라도 엇갈리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세빈이에게 내 편지가 잘 전달된 모양이다.

    “목숨이 날아갈 뻔한 경험을 했다고요~ 그냥 발코니에 둬도 상관없지 않았나요?”

    “편지가 제대로 전달이 됐는지 안 됐는지를 모르잖아.”

    라파엘라가 한숨을 쉬며 투덜거리는 동안 그의 모습을 살폈다. 까만 사제복에 붙은 흙먼지와 살짝 구겨진 머플러를 보니 전투가 잠깐 있던 것 같다.

    ‘쟤도 나한테 저주 걸었으니까 그걸로 퉁치지 뭐.’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금방 잊어버렸다.

    라파엘라의 불평을 뒤로 한 채 노블레스 길드의 캠프 내부를 둘러보았다.

    사실 말이 캠프지 2층짜리 단독 주택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 시설들은 주최 측인 그리스 헌터 협회가 준비해 놓은 것이라고 들었다.

    “길드장님! 길드전 참여 인원 전원, 캠프에 도착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아, 그리고 수잔한테 한 시까지 나한테 오라고 전해.”

    “네! 알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들어간 여자 길드원이 레일리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한 후 건물 밖으로 나갔다.

    “야, 애송이. 잠깐 따라와라.”

    레일리가 내 어깨를 툭 친 후 문 쪽으로 손짓했다.

    나는 모자와 마스크를 쓴 후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노블레스의 캠프와 비슷하게 생긴 저택들이 바닷가를 따라 줄지어 서있었다. 각 캠프엔 국기가 걸린 채 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펄럭거렸다.

    “이번 길드전은 프랑스 놈들이 많이 나왔군.”

    레일리가 캠프들을 눈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같은 국기를 단 캠프가 보통 한두 개 정도 보였지만 프랑스 국기를 단 캠프는 네 개나 있었다.

    “그나저나, 왜 나오라고 한 거야?”

    “각 길드가 어떤 놈들인지 빠르게 알려주기 위해서지.”

    레일리가 날 비웃듯 한 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저 싸가지에 점점 적응되는 게 신기하네.’

    이제 애송이라고 하든 날 깔보는 듯한 말투를 쓰든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소형 길드들은 어차피 자기들끼리 싸우다 지쳐서 주변 놈들한테 뺏길 게 분명하다. 그러니 직접적으로 우리와 맞붙을 놈들만 빠르게 설명하지.”

    “좋아.”

    레일리가 노블레스 캠프의 바로 옆 캠프를 가리켰다. 꼭대기에 프랑스 국기와 함께 꽃으로 장식된 사슴 그림 깃발이 걸려 있었다.

    “유럽 랭킹 4위 길드, 모네의 정원이다. 프랑스 내에선 제1 길드로 인정받는 대형 길드지.”

    “길드장은?”

    “대지 속성 S급 놈이다. 공격계 스킬이고 꽃을 마음대로 피울 수 있지. 터트릴 수도 있고.”

    ‘공격계 S급이라, 긴장할 필요가 있겠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레일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

    “녀석의 꽃은 은밀하게 피어나. 순식간에 영지가 녀석의 꽃밭이 될 수 있으니, 인접한 영지로 배치받을 경우 저놈들부터 제거한다.”

    “알겠어. 그다음은?”

    “바로 옆에 있는 녀석들이다. 유럽 랭킹 7위이자 프랑스의 제2 길드, 달빛.”

    레일리는 한참 동안 참여 길드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창조자의 시나리오에 마냥 의존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놀라울 정도로 유럽에 있는 모든 길드들을 꿰고 있었다.

    ‘자기 실력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리고 우리가 무조건 때려눕혀야 하는 놈들.”

    그때 레일리가 해안선 끝자락에 있는 캠프를 가리켰다. 이탈리아 국기와 함께 트럼프 카드 세 장이 그려진 깃발이 걸려 있었다.

    “이탈리아의 신생 길드 아우레올라.”

    “지금 유럽 랭킹 1위인 거지?”

    “맞다. 우리처럼 첫 랭킹전에서 1위를 탈환한 녀석들이지.”

    고개를 슬쩍 들어 레일리를 보니 황금색 눈동자가 아우레올라 길드의 캠프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마침 나오는군.”

    레일리의 시선을 따라 아우레올라의 캠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캠프에서 검은색 머리의 어린 남자 아이와 멀리서 봐도 근육질의 몸을 가진 여자가 나오고 있었다.

    “길드장인 피에트로 리나와 부길드장 로미나 베네데티다.”

    “길드장 운동선수 출신이야? 엄청 다부지네.”

    “아, 그쪽은 부길드장.”

    “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레일리는 예상했다는 듯 나를 향해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

    ‘그럼 저 초등학생 같은 애가 길드장이라는 거야?’

    눈을 크게 뜨고 아우레올라 캠프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옆에 있는 여자 때문에 더 작아 보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길드장은 잘 쳐봐야 민아섭 헌터 정도의 몸집이었다.

    “저 꼬맹이가 길드장인 피에트로다. 어둠 속성의 S급 헌터라고만 알려져 있고 고유 스킬은 등록을 안 해놨다지.”

    “DF랭킹은?”

    “없어. 딱 등급이랑 속성만 공개했거든.”

    아무리 유럽이 각성 신고제라고 해도 아이템 등록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유 스킬을 공개하는 것이 헌터들 사이에서의 암묵적인 룰이다. 비난을 받아가면서까지 자신의 스킬을 숨길 이유가 있던 건가?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일단 레일리의 설명을 잠자코 들었다.

    “나는 저 자식의 고유 스킬이 정신계라고 생각한다.”

    “왜?”

    “지난 길드전에서 저 자식과 말을 한 마디라도 나눈 놈들은 전부 졌거든.”

    “…직접 싸우는 건 못 봤어?”

    “못 봤어. 몸 쓰는 건 전부 옆에 있는 저 근육 돼지한테 시키더군.”

    피에트로는 캠프 앞 나무 의자에 앉아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그의 뒤엔 로미나가 팔짱을 낀 채로 서있었다. 근육 때문에 팔 부분 소매가 당장이라도 찢어질 것만 같았다.

    “저 부길드장은 어떤 사람이야?”

    “단순하고 무식한 놈이다. 모든 것을 다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고유 스킬은?”

    “물 속성의 S급 공격계 스킬이다. 마구잡이로 폭포를 쏟아내는 스킬이긴 한데 저 녀석은 스킬보다 자기 몸에 더 의존하니, 원…….”

    레일리는 어이없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의존할 만한 몸이긴 하네…….’

    로미나는 골격 자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느낌이었다.

    “투포환 국가 대표 출신이고 세계 기록 보유자야.”

    “아~”

    “각성 이후엔 신체 능력이 더욱 향상하다 보니 저런 무지막지한 신체가 됐지.”

    기본적으로 신체가 발달한 사람이구나. 궁금증이 조금은 해결되었다.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우리는 작전대로 대형 길드 위주로 공략한 후 마지막에 아우레올라를 친다.”

    “좋아.”

    “길드전을 치르기 전,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레일리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독설을 쏟아내던 입술이 말을 고르는 듯 굳게 다물려 있었다.

    “난 네 말대로 창조자 놈의 힘이 필요 없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너의 거래를 받아들였다.”

    “그렇지.”

    “그럼 넌?”

    싸아아―

    파도가 모래사장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내 귀를 두 번 두드리기도 전에 레일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무엇을 위해 내게서 창조자의 파편을 받아가려는 거지?”

    “…….”

    “창조자는 이게 있어야 세상의 종말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넌 이걸 부수려 하지.”

    레일리가 내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근본적인 질문이다. 비록 그가 내게 신뢰를 보이며 거래에 응하긴 했지만, 세상을 지키는 부적을 부수겠다는 사람이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는 나를 믿는 게 아니다. 내 힘을 믿는 것이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상쾌한 공기가 폐부에 가득 들어차자 복잡한 머릿속이 한결 정리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레일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길드전에서 이기면 전부 알려줄게. 창조자의 목적과 그 파편의 정체도.”

    “이상한 동기 부여군.”

    레일리가 몸을 돌려 먼저 노블레스의 캠프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좋다.”

    “…….”

    “진실을 전부 토해낼 준비나 하라고.”

    역시 그는 자극에 쉽게 반응했다.

    레일리는 한껏 고양된 얼굴로 캠프의 문을 열었다.

    * * *

    이틀 후, 길드전 당일.

    “주최에서 알려드립니다~ 영국의 노블레스 길드, 영국의 노블레스 길드 여러분들은 지금 바로 게이트 앞으로 모여주시길 바랍니다.”

    해안가에 있던 커다란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캠프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리들은 그 소리에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부지런히 걸어갔다.

    간부진과 함께 다니면 눈에 띌 것이라 나는 수잔의 은신 스킬의 도움을 받은 후 일반 길드원 틈에 섞였다.

    인기척과 인지도를 대폭 낮추는 스킬이라더니. 정말로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띄는 모양이었다. 게이트까지 가는데 벌써 뒷사람한테 다섯 번이나 치였다.

    “길드장님이~ 아 여기 계시는군요.”

    “총 41명이다.”

    “어디보자……. 네, 맞네요.”

    게이트 앞에 있던 그리스 헌터 협회 직원이 인원수를 순식간에 세더니 이내 게이트를 안쪽으로 당겨 열어주었다. 고풍스러워 보이는 실내가 게이트 너머로 보였다.

    “들어가라.”

    레일리의 말에 다들 던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여기가 던전이 지정해 준 노블레스 영지…….’

    노블레스 길드의 본부처럼 생긴 집무실이 나를 반겼다.

    슬쩍 창문을 보니 중세 마을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그 너머로는 울창한 숲과 다른 길드의 깃발이 걸린 성이 보였다.

    “그럼, 이번에도 좋은 성적 거두길 기원합니다.”

    쿵―

    직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게이트가 닫혔다.

    “수색팀은 지금 바로 영지 파악해!”

    “보급팀 이쪽으로 오세요!”

    간부들과 나를 제외한 정예 길드원들이 각자의 위치로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수색팀은 곧바로 집무실을 나와 마을과 영지 주변 숲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보급팀은 기력 회복제와 식량들을 테이블 위에 빠르게 세팅했다.

    “이번 영지는 나쁘지 않군. 기후도 온화하고 햇살도 잘 들어.”

    레일리는 창문을 열곤 발코니로 나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나도 그의 옆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Current Ranking]

    [―]

    [Time]

    [1:48:21]

    현재 랭킹과 길드전 시작까지 남은 시간이 하늘에 둥둥 떠있었다.

    “아 씨X, 모네 놈들 옆이네.”

    그때 레일리가 욕을 뱉으며 머리를 거칠게 털었다. 그의 고개가 향한 쪽으로 몸을 쭉 빼자 바로 옆 영지의 성 꼭대기에 모네의 정원 길드 깃발이 걸린 게 보였다.

    치직―

    [117]

    얼마 안 있어 깃발 위로 왕관 개수가 떴다. 모네 길드의 깃발 위 숫자를 확인한 후 레일리를 슬쩍 보자 황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아무래도 길드장한테 줬나 보군.”

    “그러게.”

    주위 영지들을 둘러보는 동안 레일리가 몸을 돌려 집무실 쪽으로 들어갔다.

    “애송이, 우리도 슬슬 왕관을 수령하러 가지.”

    그의 뒤를 따라 복도로 나오자 왼쪽에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대리석으로 된 계단을 한참 올라가자 성 꼭대기의 옥상이 나타났다.

    휘이잉―

    ‘바람 한 번 엄청 부네.’

    날아갈 뻔한 모자를 다시 한번 눌러쓰며 나는 옥상 한가운데 있는 유리 상자 앞에 섰다.

    “여기서 왕관 수령해도 돼? 다른 영지에서도 보일 것 같은데.”

    “그건 걱정 마라. 길드전 시작 전까지 다른 길드 놈들은 이 공간을 볼 수 없거든.”

    레일리는 손가락 끝으로 유리 상자를 두드렸다.

    “여기에 손 올리기나 해.”

    레일리의 잔소리가 더 길어지기 전에 상자 위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키이이잉―

    상자가 진동하더니 자석처럼 내 손을 끌어당겼다.

    [각성자 확인 완료]

    [최적화 언어 설정 완료]

    [왕관 설정 완료]

    [해당 각성자를 NOBLESS의 왕으로 설정합니까?]

    [예] [아니오]

    상자의 왼쪽에 ‘예’가 오른쪽엔 ‘아니오’라는 글자가 떴다. 손바닥을 천천히 왼쪽으로 옮기자 검은색으로 쓰였던 ‘예’가 황금색으로 변했다.

    [해당 각성자를 NOBLESS의 왕으로 설정했습니다]

    [왕관을 출력합니다]

    키이이잉―

    “큿……!”

    뿜어져 나온 빛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 정도 빛이 사그라졌다고 생각했을 무렵에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달그락―

    손바닥에서 무언가 느껴졌다. 그것을 손에 쥔 후 내 앞으로 가져왔다.

    그것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작은 왕관이었다. 왕관엔 여러 색의 보석들이 박혀 있어 햇빛을 받을 때마다 영롱한 빛을 냈다.

    “이런 미친…….”

    그때 레일리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넋이 나간 채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노블레스의 깃발 위에 왕관의 개수가 보였다.

    [172]

    “아.”

    그리고 나도 레일리와 똑같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 공격계 S급이면 왕관 몇 개 정도야?”

    “제일 잘 나온 놈이 130개다.”

    ‘망했다.’

    SS급이고, 게다가 공격계다 보니 높게 나오리라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이건 격차가 심해도 너무 심하잖아!

    속으로 절규하며 노블레스 길드의 깃발위에 당당히 떠있는 ‘172’를 멍하니 응시했다.

    짝―!

    나는 양손으로 뺨을 친 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레일리를 도와 길드전에서 승리하는 것뿐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Time]

    [1:40:13]

    1시간 40분 후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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