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휘이잉―
민은 최대한 불꽃을 내지 않으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정말 넓군.’
고개를 밑으로 내리자 가지치기를 깔끔하게 한 가로수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었다. 아까 공터에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정원 하나가 광화문 광장보다 넓은 것 같았다.
화르륵―
다시 가속하며 본부 건물을 향해 날아갔다. 세빈의 설명에 따르면 지의가 있는 곳은 오른쪽 가장 안쪽 방이었다. 발코니에 작은 간이 의자가 놓여 있어 찾기 쉬울 거라고 설명했었다.
“아.”
그리고 그의 설명대로, 민은 지의가 있는 곳을 쉽게 알아냈다.
후욱―
그가 발코니를 향해 더욱 빠르게 하강했다.
“웬 뜨거운 바람이 부네…….”
야외에 있던 정원사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미 민이 발코니에 도착한 이후였기에 그는 아무런 소득 없이 다시 나무 모양을 잡는 데 열중했다.
타닥―
민은 발코니에 착지하자마자 유리문 너머로 지의의 모습을 살폈다. 침대에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그는 잠들었다기보단 기절한 것에 더 가까워 보였다.
민이 조심스럽게 발코니 문을 밀자 꽃향기와 섬유 유연제 냄새가 섞인 포근한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아직 안 일어난 건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어느새 도착한 세빈도 지의를 내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스킬을 걸었나.’
세빈은 지의의 몸을 천천히 살폈다. 특별한 외상도, 지의의 몸을 묶어 놓은 흔적도 없었다. 아무리 봐도 그는 깊게 잠든 수준이었다.
민이 지의의 몸 위로 자신의 가죽점퍼를 덮은 후 그대로 안아 올렸다. 세빈은 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다 이내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일단 지의 데리고 나가주세요. 전 찾을 게 좀 있어서.”
“알겠습니다.”
세빈은 무아(無我)를 시전하며 자신의 존재를 지웠고 민도 그에 맞춰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후우웅―
민은 허공을 유유히 가르며 이따금씩 지의를 내려다보았다. 이 정도로 움직이는데도 잠에서 깨지 않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우으…….”
“신지의 헌터……!”
그때 지의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그는 잠깐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천천히 눈을 떠 주위를 살폈다.
“어……?”
“정신이 좀 드십니까?”
지의는 눈을 깜박거리며 민을 바라보았다. 왜 이 사람이 이곳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눈빛이었다.
‘다행이다.’
민은 안도감에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어 지의의 몸을 끌어당긴 후 빠른 속도로 노블레스 길드의 부지를 벗어났다.
타닥―
“신지의 헌터!”
민이 미준의 옆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환하게 웃으며 지의 쪽으로 달려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이 어느새 평소처럼 풀어져 있었다.
“아.”
민은 지의를 내려주려다 그가 맨발인 걸 보고 다시 안아들었다. 지의는 그런 민을 향해 멋쩍게 웃어 보인 후 미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빈이만 온 게 아니었군요.”
“그럼. 아무리 강세빈 헌터여도 납치 사건을 혼자 해결하긴 힘드니까.”
미준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또각―
뒤이어 도착한 세빈도 지의를 향해 빠르게 발을 옮겼다.
“지의야.”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세빈을 보자마자 지의는 몸을 살짝 뒤로 빼 민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세빈은 서운한 티를 내는 대신 그런 지의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친 곳이 없어서 다행이야.”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세빈은 민의 얼굴을 슬쩍 본 후 허리를 쭉 폈다.
‘뭔가 분위기가 다른데.’
세빈의 행동을 지켜보던 미준이 눈썹을 움찔거렸다. 차분하다 못해 차가울 정도의 세빈을 무너트리는 건 언제나 지의였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 지의를 보자마자 몸 여기저기를 살피면서 걱정을 쏟아낼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제 눈앞의 세빈은 평소처럼 차분했다.
‘철이 든 건가? 그게 아니라면…….’
“앗."
그때 세빈이 지의의 발에 손을 댔다. 지의가 화들짝 놀라 다리를 움츠렸지만 세빈은 그의 발목을 잡은 채로 중얼거렸다.
“너무 급하게 나와서 신발도 제대로 못 신었네.”
“깜짝 놀랐잖아…….”
“하하, 미안.”
세빈이 인벤토리에서 단정하게 생긴 검은 구두를 꺼내 지의를 향해 들어 보였다.
“괜찮아. 내가 아까 방에서 챙겨왔거든.”
그는 지의의 발에 구두를 신겼다.
툭―
구두는 지의의 발보다 몇 센치미터 더 커, 그의 발가락 끝에 살짝 걸친 모양새가 됐다.
“으음…….”
세빈이 구두가 걸쳐진 지의의 발을 내려다 보다 이내 싱긋 웃으며 다시 그의 발목을 쥐었다.
쾅―!!
“큿……!”
“강세빈 헌터!”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세빈의 그림자가 지의의 발목을 잡아 비틀며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민이 세빈의 돌발 행동에 대응하려 지의 쪽으로 팔을 뻗은 순간, 시커먼 손들이 그의 앞을 막았다.
“커, 커헉……!”
지의는 제 목을 조르는 그림자 손을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세빈의 그림자는 더욱 강하게 조여왔다.
푹―
세빈이 지의의 목 바로 옆에 영(影)을 꽂아 넣으며 허리를 숙여 그와 눈을 맞췄다.
“강세빈 헌터,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민이 세빈을 향해 소리쳤다. 세빈은 여전히 지의와 위협적으로 눈을 맞춘 채로 입을 열었다.
“지의가 약속한 시간까지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어떻게든 저에게 흔적을 남겼을 거예요.”
“세빈, 아……!”
“지의는 약속을 자기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애니까.”
세빈이 천천히 허리를 폈다. 밤하늘 같은 눈동자는 마치 빛이 들어갈 틈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하나 더. 최민 헌터가 나간 이후에 방을 좀 둘러봤거든요.”
“…….”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지의 신발은 없고 침대 밑에 저 구두만 있더라고요.”
그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손이 지의의 발끝에 걸려 있던 구두를 집어 들었다.
“S급 어둠 속성 신발, ‘제자의 배반’.”
“어둠 속성이라고?”
미준이 의아해 하며 바닥에 처박힌 지의를 바라보았다. 그는 저항을 포기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사이즈도 안 맞고 속성도 안 맞는 아이템을 왜 굳이 침대 밑에 뒀을까요?”
“푸흐…….”
그때 지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처음엔 바람 빠진 것 같은 웃음소리를 내다 이내 박장대소로 바뀌었다.
“하, 하하……. 이거 원.”
콰드득―
지의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자 커다란 십자가가 튀어나와 자신의 몸에 얽힌 그림자 손을 순식간에 뜯어냈다.
쾅!
그는 뒤로 한 바퀴 굴러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그런 뒤 바닥에 나뒹구는 자신의 구두에 발을 끼워 넣은 후 십자가를 들어 크게 휘둘렀다. 그의 주위에 있던 민과 세빈이 한 걸음 물러나자 그제야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들켰네요~”
끼기긱!
세빈의 검과 십자가가 맞부딪혔다. 검날과 쇳덩이가 서로 긁혀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지의의 얼굴을 한 그것은 낮게 욕을 뱉더니 십자가를 들어올려 세빈의 공격을 흘렸다.
“눈 하나 깜짝 안 하시네요, 소꿉친구라면서?”
“안에 있는 내용물이 다른 사람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쾅!!
세빈이 칼 손잡이 끝으로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큭……!”
사아아―
바람에 모래가 쓸려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지의의 모습이 녹아내렸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곱슬거리는 금발로, 수수한 티셔츠는 어느새 신부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라파엘라가 그들의 앞에 등장한 것이다.
“라파엘라?!”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이네요~ 미준 자매님.”
미준이 경악했다. 자신이 만들어 준 무기 ‘죄(SIN)’가 라파엘라의 손에 당당히 들려 있었다.
‘잊을 리가 있나. 무기 만들면서 토할 뻔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각성자의 내면과 욕망을 담아 무기를 만들기 때문에 미준에게도 그들의 감정이 일부 전해진다.
지의의 무기를 만들 땐 행복했던 감정이 흘러들어왔던 반면, 세빈의 무기를 제작할 땐 견딜 수 없는 고독과 불안한 감정이 느껴졌었다.
그리고 라파엘라의 경우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적나라한 욕망과 충동을 느낄 수 있었다.
미준은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라파엘라를 바라보며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쿵―
“항복~”
그때 라파엘라가 무기를 바닥에 꽂아 넣은 후 양손을 높이 들었다. 난데없는 항복 선언에 세빈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지의는 어디 있지?”
“지의 자매님은 길드전 하러 덴마크에 갔죠.”
그가 대답하자마자 민이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구원자의 위치 : 덴마크 알스 섬]
[구원자의 상태 : 평온]
민은 세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세빈이 입술을 잘근거리며 라파엘라를 노려보았다.
“일단 진정하시죠, 자매님들. 저도 지의 자매님께 부탁 받아서 여기 있는 거랍니다?”
라파엘라는 인벤토리에서 안경을 꺼내 쓴 후 사제복 안에서 잔뜩 구겨진 편지 봉투를 꺼냈다. 모두의 시선이 편지에 쏠렸다.
“어제 지의 자매님께서 제게 부탁을 하시더군요. 자신인 것처럼 위장해서 자신의 소꿉친구를 만나 달라는 부탁을 말이에요.”
‘소꿉친구가 저런 미친놈일 줄은 몰랐지만.’
라파엘라는 뒷말을 삼키며 편지를 세빈에게 내밀었다. 세빈은 그림자 손으로 그것을 받은 후 봉투를 바로 뜯어 편지를 확인했다.
“신지의 헌터 글씨가 맞습니까?”
“…네, 맞아요.”
민의 질문에 세빈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세빈은 편지를 눈으로 빠르게 읽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본론만 말할게.
노블레스 길드에게 납치당했고, 사정이 있어서 길드전에 몰래 참여할 예정이야.
위험한 상황 아니고 내가 직접 하겠다고 한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협회에 알리지도 말아줘. 누가 너한테 나 어디 갔냐고 물어도 모른다고 해.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길드전이 끝날 때까지는 영국에 있어줘.
그리고 만에 하나 내가 위험해지면 날 구하러 와줘. 부탁할게.]
“하아아…….”
마지막 줄을 읽자마자 세빈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다행이다…….’
좀처럼 누군가에게 도와 달라고 하지 않는 지의가 자신을 구하러 와달라고 했다. 지의가 제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것만으로 세빈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보셨죠? 다 지의 자매님이 원하신 거였어요.”
“글쎄. 납치까지 원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아하하. 그건 우리 길드장님의 명령이라 저도 잘 모르겠네요.”
콰지직―
굵은 나무줄기가 라파엘라를 노렸지만 그는 옆으로 뛰어 그것을 가볍게 피했다. 미준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에게서 시선을 뗀 후 지의의 편지를 슥 훑었다.
“도대체 신지의 헌터가 어쩌다 길드전에 참여하게 된 건지 모르겠네.”
“지의한테 직접 듣는 수밖에 없죠. 모종의 협박이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길드전은 지의 자매님이 결정하신 일이라니까요? 길드장님이랑 상의한 일이라고요~”
‘신지의 헌터가 사도와 상의했다고?’
라파엘라의 말에 민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그의 말에 따르면 노블레스가 지의를 길드전에 참가시키기 위해서 납치한 게 아니다. 오히려 길드전 참가 결정은 지의가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지의가 아무런 조건 없이 길드전에 참여할 리는 없을 테니, 그도 노블레스로부터 분명 무언가를 받았을 터다.
쿵―
불현듯 어떤 가정이 머릿속을 스치자 민의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 다시 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창조자의 파편을 대가로 거래한 건가?’
민이 고개를 들어 세빈과 미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도 남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미준은 바로 대답하곤 라파엘라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 이상한 스킬로 신지의 헌터 상태 계속 살펴줘.”
“네.”
파지직―
그때 라파엘라의 옆에 검은 균열이 생겼다. 얼마 안 있어 노란색 꽁지머리의 알렌이 그 안에서 튀어나왔다.
“라파엘라 씨 이제 가시…죠?”
알렌이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국 헌터 세 명과 방금 전까지 전투를 한 것처럼 엉망진창인 라파엘라…….
‘지의 씨를 구조하러 온 거구나!’
그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알렌이 라파엘라의 옷을 잡고 웜홀 쪽으로 쭉 끌어당겼다.
“얼른 가요……. 죽기 전에.”
“안 죽어요, 알렌~ 이미 상황 설명을 다 했거든요.”
라파엘라는 끝까지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며 자신의 무기를 다시 목걸이로 돌려놓았다. 그러고는 살짝 뒤를 돌아 입을 열었다.
“지의 자매님을 무사히 잘 돌려놓을 수 있도록 노력은 해볼게요~”
파지직―
그 말을 끝으로 라파엘라가 웜홀 안쪽으로 발을 들이니 균열은 먼지처럼 사라졌다.
노블레스의 정원 앞은 적막으로 한껏 가라앉았다. 허무한 기분에 누구 하나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아까 말한 대로 두 사람은 여기 남아줘. 난 귀국할게.”
미준이 정적을 깨고 가장 먼저 말했다.
“난데없이 S급이 셋이나 영국에 있으면 아무래도 의심을 살 테니까.”
“그건 그렇죠.”
“신지의 헌터는 협회에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생긴다 싶으면 말해줘.”
민과 세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평선에 걸려 있던 해가 어느새 꽤 높은 곳까지 떴다. 주홍빛의 햇살이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