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먼지가 걷힌 자리엔 몬스터의 흔적도 없었다.
“이, 이게…….”
넋이 나간 채로 말을 더듬는 라파엘라와 몬스터가 남긴 아이템만 바라보는 레일리가 있을 뿐이었다.
라파엘라가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본 그곳엔 레일리 말마따나 운 좋게 SS급으로 각성한 애송이라고 생각했던 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의 신이라도 된 듯 고고하게.
그는 자신과 눈을 맞춘 채 천천히 성호를 긋고 있었다.
“하, 하하…….”
간파당했다. 자신이 은밀하게 건 저주조차 지의 앞에선 의미가 없었다.
라파엘라는 허무함에 웃음을 터트렸지만 미간은 한껏 구겨져 있었다.
타닥―
지의가 지면에 착지했다. 그리고 레일리의 바로 앞에 섰다.
“날 테스트하겠다고 했지.”
“…….”
“어때? 통과했어?”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치욕]
레일리는 아랫입술을 꽉 물고 지의를 노려보았다.
“난 네가 창조자한테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몰라.”
“…신지의.”
“그리고 어쩌면 내가 네 소원을 이뤄주지 못할 수도 있어.”
[발언력 상승]
텁.
지의가 레일리의 점퍼 깃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너도 증명하고 싶지 않아?”
“뭘 말이지?”
“네가 신의 힘 없이도 강한 인간이라는 걸.”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지의의 눈앞에 상태창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역시 자존심을 건드리는 게 제일 반응이 좋네.’
상대가 절대자라고 해도 레일리는 누군가에게 명령받는 걸 절대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걸, 지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의의 예상대로 레일리는 확실하게 동요했다.
“넌 그깟 시나리오 없이도 충분히 강한 인간이야.”
“…….”
“망할 절대자한테 한 방 먹이자고, 레일리.”
[발언 결과 : 강한 기대]
[연계 패시브 스킬 발동]
[‘말이 씨가 된다’]
[‘망할 절대자한테 한 방 먹이자고’의 씨앗을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에게 심겠습니까?]
‘네.’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에게 ‘망할 절대자한테 한 방 먹이자고’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두근, 두근―
레일리는 자신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있음을 느꼈다.
인간들 위에 서고 싶어서 절대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신에게 받은 힘으로 영국의 모든 길드를 흡수했다. 흡수된 길드들이 자신의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모습은, 언제나 그를 즐겁게 했다.
‘절대자까지 내 발 아래에 두면 얼마나 즐거울까.’
절대자와의 계약을 할 때, 속 시커먼 그 도마뱀을 발밑에 둘 수도 있다는 설렘에 눈앞이 빙글 돌 정도였다.
레일리는 자신의 옷깃을 잡은 지의의 손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우습게도 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다.
“좋다.”
레일리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지의가 손에 힘을 풀었다.
턱.
하지만 곧바로 레일리가 손목을 잡는 바람에 지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무슨 작정인진 모르겠지만 아주 재밌는 일이 되겠어.”
“창조자 파편 부수는 거 잊지 마.”
“정말로 네가 창조자의 힘 없이 내 바람을 이뤄준다면, 그깟 파편쯤은 기꺼이 부숴주겠다.”
레일리가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재밌다는 듯 씩 웃었다.
“인간한테 진 절대자의 힘 따위 필요 없으니까 말이다.”
* * *
같은 시각, 런던 C호텔 스위트룸 내.
“영국은 이래서 싫다니까. 날씨가 아주 성가셔.”
커다란 창문에 빗방울이 거세게 부딪쳤다. 잿빛 건물들이 빗물에 젖어 더욱 우울하게 느껴졌다.
미준은 혀를 차며 다시 거실 쪽으로 발을 옮겼다. 아직 세빈과 민은 소파에 앉은 채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우리가 확인해 봐야 할 건 딱 두 가지야.”
달그락.
미준이 테이블 위의 웰컴 드링크를 들고 그들의 앞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현재 노블레스 본부에 신지의 헌터가 있는지. 그리고 왜 데려갔는지.”
그의 손가락이 다 접히자 세빈이 입을 열었다.
“일단 본부로 먼저 가죠. 제 스킬 써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지의 찾는 건 금방이니까.”
“아무런 정보도 없이 갈 거야? 노블레스에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최민 헌터의 추측이잖아.”
미준은 인벤토리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두 사람을 향해 내밀었다.
[Jeff Parker]
[팔로잉 : 512]
[팔로워 : 4,729]
[NOBLESS PROUDDD]
미준의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것은 SNS 프로필이었다. 강아지를 안은 남자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민이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노블레스 길드원입니까?”
“응. 2년 전인가? 나한테 대차게 까였던 친구지.”
“하미준 헌터가 거절했다니 의외네요.”
“나를 사랑했다면 고백을 받아줬겠지만, 얘는 나를 통해 유명해지고 싶은 애였거든.”
미준은 목을 고르곤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얘한테 연락해서 데이트 신청을 해볼까 해. 이 귀염둥이는 입이 하~도 가벼워서 나한테 다 말해줄 걸?”
“하미준 헌터다운 방법이네요.”
“그래도 쓸모 있지 않아?”
미준이 키득거리며 농담을 하듯 이야기 하자 세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든 지의만 찾을 수 있다면…….’
손가락으로 구겨진 미간을 꾹꾹 눌렀다.
“제프는 말단이긴 하지만 발이 넓어서 길드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물론, 유럽의 다른 길드까지 꿰고 있는 애야.”
“오늘 당장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 그건 물어봐야 알겠지.”
미준은 화면을 두드려 메시지를 보냈다.
우웅, 우웅, 우웅―
그로부터 정확히 5초 후, 답장이 도착했다. 보고 싶었다는 말과 동시에 온갖 하트 이모티콘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긍정적이다 못해, 열광적인 반응에 민과 세빈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미준과 눈을 마주쳤다. 미준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핸드폰을 흔들었다.
“어쩌면 오늘 중으로 끝낼 수도 있겠네.”
* * *
미준과 제프의 만남은 순식간에 성사되었다.
미준이 여행차 영국에 들렀다는 답장을 보내자마자 제프는 점심 약속을 제안했다. 장소는 C호텔 앞의 레스토랑.
미준은 평소처럼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화려한 무늬의 셔츠를 걸쳤다. 근처 꽃집에 들러 작은 꽃다발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미준이 손목시계와 횡단보도 쪽을 번갈아 보며 제프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 어귀에서 흰색의 실크 셔츠를 입은 제프가 나타났다.
그는 성큼성큼 횡단보도를 건넌 후 미준을 발견했다.
“미준~!”
제프가 히죽 웃으며 공중으로 도약했다. 푸른빛이 도는 바람이 그를 감싸며 그대로 나뭇잎처럼 가볍게 날아갔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제프의 비행을 신기한 듯 쳐다봤지만 사람들의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탁―
그는 팔랑팔랑 날아가 미준의 바로 앞에 가볍게 착지했다. 미준은 젠틀한 미소를 입가에 띠우며 그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하하. 용케 꽃을 알아보고 나비가 날아오셨네.”
“이거 나 주려고 사온 거야? 너무 로맨틱하다, 미준~”
제프가 핸드폰 카메라로 꽃다발을 찍은 후 미준의 얼굴 쪽으로 손을 뻗으며 투덜거렸다.
“모처럼인데 선글라스는 좀 벗어주면 안 돼? 난 네 눈을 보고 싶은데…….”
“협회 몰래 온 거라서 말야. 혹시라도 들키면 곤란해져.”
미준이 제프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우리 달링도 나랑 만난 건 비밀로 해주겠어?”
“하아~ 오늘은 게시물 좀 올리나 하나 했더니……. 그래도 미준이 그렇게 얘기하는데 어쩔 수 없지.”
“고마워.”
미준은 싱긋 웃고 제프를 데리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테라스 자리 가장 안쪽에 앉았고 점심 코스와 와인을 주문한 후 의자 등받이에 완전히 몸을 기댔다.
‘이제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좀 끌어내 볼까.’
제프가 꽃다발과 함께 사진 찍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며 미준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일은 좀 어때? 나랑 처음 만났을 땐 노블레스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었잖아.”
“그치. 지금은 좀 적응됐어. 길드전 전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만 빼면.”
제프가 툴툴거리며 핸드폰 화면을 두드렸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꽃다발 사진의 색감이 휙휙 바뀌었다.
종업원이 미준과 제프 앞에 와인 잔을 올려놓은 후 화이트 와인을 조심스럽게 따랐다. 두 사람이 테이스팅을 마친 후 고개를 끄덕이자 종업원이 마저 와인을 따라주었다.
“길드전 5일 후에 시작이지?”
“응. 아마 이런저런 준비 기간 생각하면 모레쯤에 출국할 거야.”
달그락―
두 사람의 앞에 푸아그라 크래커가 놓였다. 직원은 메뉴에 대해 짧게 설명한 후 다시 사라졌다.
“안 그래도 작년에 1위를 빼앗겨서 길드장님이 엄~청 화냈거든.”
“안 봐도 알 것 같네. 그쪽 길드장 성격 화끈하잖아.”
“화끈 정도겠어? 아주 걸어 다니는 활화산이야. 대지 속성이라는 게 안 믿긴다니까?”
제프는 레일리에 대해 신랄한 평가를 내리며 푸아그라 크래커를 사진을 찍었다.
“우리 달링도 참여했어?”
“그럼! 비록 보급팀에 있었지만 어쨌든 그 현장에 있었지!”
“멋진걸.”
미준이 제프를 향해 박수를 친 후 푸아그라를 살짝 떠먹었다.
‘형편없군.’
인상을 찌푸릴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미준은 포크를 내려놓고 와인으로 입 안을 씻었다. 그러는 동안 제프는 자신이 작년 길드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리고 이탈리아의 아우레올라 길드의 남자 길드장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서 올해는 준비를 대대적으로 하는 중이야. 국내에 있는 제작계 헌터들에게 아이템 주문도 엄청 넣었어.”
“꽤 고생했겠네.”
“말도 마~ 아니 글쎄, 어제는 나한테 손님방 청소를 시켰다니까?”
와인을 향하던 미준의 손이 순간 멈췄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빛냈다.
“손님방?”
“응! 난데없이 길드장님이 나한테 청소를 시키더라? 아주 귀한 손님이 왔다면서.”
‘진짜로 신지의 헌터가 노블레스 길드에 있는 건가?’
미준은 가볍게 말아 쥔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그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어금니를 꾹 깨문 채로 대답했다.
“달링은 청소 담당이 아니라 헌터로 입사한 거잖아. 최악의 직장이네.”
“애초에 손님방이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
“봤어?”
“응?”
제프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미준을 바라보았다. 분명 생글생글 웃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그 손님, 봤냐구~”
미준은 일부러 말 꼬리를 길게 늘이며 제프의 경계심을 낮췄다. 제프는 약간 기가 죽은 얼굴로 미준과 푸아그라를 번갈아 보다 입을 열었다.
“못 봤어……. 애초에 그저께쯤에 도착했고, 지금은 길드장님이랑 같이 외출했거든.”
“…같이 외출도 했구나.”
달그락―
종업원이 애피타이저 접시를 치운 후 메인 요리를 올려주었다. 제프가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할 동안 미준도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조금 전, 제프의 말로 지의가 노블레스 길드에 있는 걸 100% 확신할 수 있었다. 민의 스킬로 지의의 위치를 확인했을 때 헝가리로 나타난 것도 사실이었음이 증명됐다.
남은 건 세빈의 ‘무아’로 건물 내에 잠입해 지의를 데리고 나오는 것뿐.
‘생각보다 쉽게 끝날 수도 있겠어.’
그는 나이프로 대구 살을 자른 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왔다. 부디 이 식사가 영국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가 되길 바라면서.
* * *
쿵―
“답 나왔네요.”
미준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세빈이 말을 건넸다. 도청기를 통해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던 터라, 미준의 설명 없이도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민도 그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 국장님 생각은 어떠신가?”
“일단 길드 건물 안에 지의가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지의가 진짜로 있으면 접선 위치와 시간을 알려주죠.”
“심플하네.”
미준은 넥타이를 풀곤 침대 위로 휙 던졌다.
“강세빈 헌터의 그 은신계 스킬, 은신 상태에선 말도 못하는 거지?”
“못해요. 제 존재를 완전히 지우는 스킬이라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못 줍니다.”
세빈이 턱짓으로 탁자에 있던 메모지를 가리켰다.
“하지만 은신 잠깐 풀고 손에 쪽지 쥐여주는 것 정도는 가능해요.”
“구출 시행일엔 제가 신지의 헌터를 데리고 도주. 강세빈 헌터가 엄호할 겁니다.”
민이 말을 덧붙이자 세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미준 헌터는 저 제프란 사람이랑 계속해서 연락하면서 노블레스 길드의 분위기를 살펴 주세요.”
“오케이.”
“지의와 접선하는 날은 내일. 그리고 구출은 바로 다음 날로 하죠.”
세빈이 주먹을 꽉 쥐었다.
“길드전 전에 지의를 무조건 빼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