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24화 (124/366)

124화

―매, 자― 매님…….

“자매님~”

“윽…….”

몸이 억지로 일으켜졌다. 관절 마디마디가 뻐근해서 입에선 절로 곡소리가 나왔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보니 라파엘라가 나를 이불 밖으로 꺼내고 있었다. 업무용 핸드폰을 그렇게 개박살을 낸 주제에 뻔뻔하기 짝이 없다.

“잘 잤나?”

“아이 씨, 깜짝이야.”

“잘 잤나 보군. 맹랑한 소리 하는 거 보니까.”

침대에서 나오자마자 레일리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는 욕실 문 옆에 기댄 채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오늘 어딜 가는지 잊지 않았겠지?”

레일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헝가리 A급 던전. 그곳에서 나와 레일리의 거래 여부가 결정된다.

끼익―

레일리를 지나쳐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니 멍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내 실력을 증명하지 않으면 레일리는 내 제안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날 죽일 것이다. 물론 나도 곱게 죽어줄 생각은 없지만, 그렇게 된다면 평화적으로 창조자의 파편을 부수는 건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페이즈 스킵이 가능할 정도로 폭발적인 공격을 보여줘야 해.’

양치를 끝낸 후 행거에 걸려 있던 내 옷을 다시 입었다.

점퍼 형태의 아이테르의 로브까지 입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살폈다. 라파엘라의 스킬 때문일까. 푹 자도 피로가 완전히 풀린 모습은 아니었다.

쿵쿵쿵―

그때, 누군가 욕실 문을 세게 두드렸다.

“아직 멀었나?”

“다 됐어.”

‘성질하곤…….’

일부러 문을 세게 열어봤지만 이미 레일리는 욕실 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터라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았다.

“자, 그럼 얼른 가지. 알렌?”

“네~”

언제 왔는지 모를 알렌이 손으로 허공을 그었다.

파지직―

그러자 방 한가운데에 검은 균열이 생겼다.

균열 쪽으로 바람이 불어 몸이 천천히 그쪽을 향했다.

“지이, 지…의 씨?”

알렌이 내 이름을 힘겹게 부르며 손을 뻗었다.

텁.

“윽.”

그의 손을 잡자마자 균열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탁.

롤러코스터에 탄 것처럼 몸이 빙글빙글 돌더니 얼마 안 있어 발이 땅에 닿았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알렌은 다시 균열 안으로 쏙 들어간 후 레일리와 라파엘라를 차례로 내 앞으로 배달해 왔다.

‘이게 웜홀이라는 스킬이군.’

웜홀이란 직접 본 대상 앞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는 스킬인데, 그 대상에 사물도 포함되나 보다. S급 이동계 스킬 중에서도 단연 최상급 스킬이다.

“그럼 이따 다시 데리러 올게요.”

“그래.”

알렌은 균열 사이로 고개만 쏙 뺀 채 손을 흔들며 인사한 후 그대로 사라졌다.

정신없는 이동이 끝나고 나서야 헝가리 A급 게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게이트의 출입구는 녹슨 철문이었다. 눌어붙은 핏자국이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했다.

“바로 들어가지.”

“스캔 직원이 따로 없나요?”

“당연하지. 여긴 노블레스 길드 소유 던전이니까.”

헝가리 던전인데 노블레스 길드의 소유라……. 아무래도 이것도 길드전의 상품으로 받은 듯하다.

“얼른 들어가요~ 우리 지의 자매님의 전투가 너무 궁금하거든요.”

라파엘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한 손으로 게이트를 힘차게 밀었다.

끼이익―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폐허가 된 마을이 펼쳐졌다.

하나, 형태만 마을이지. 집의 형태를 갖춘 건물은 단 하나도 없었고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를 커다란 자루들이 거리에 널려 있었다. 게다가 자루 겉면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여긴 16세기 헝가리를 배경으로 한 던전이다.”

레일리가 입을 열었다.

“이곳의 몬스터라곤 보스 몬스터밖에 없지. 대신 4페이즈까지 있어서 클리어하려면 하루 좀 넘게 걸린다.”

까악, 까악―

까마귀 떼가 일제히 한곳을 향해 날아갔다.

까마귀가 날아간 쪽에는 거대한 저택이 있었다. 우중충한 날씨 탓인지 왠지 모르게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꼭 뱀파이어의 성 같지 않나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라파엘라의 물음에 대충 대답해 주며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뱀파이어 설화의 근원이거든요.”

“…….”

“흥미롭지 않으신가요?”

라파엘라는 내 태도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떠들어 댔다

“보스 몬스터는 바토리 에르제베트예요. 피의 백작 부인이라고 불렸던 실제 헝가리 귀족이지요.”

“피의 백작 부인?”

“젊은 여자들의 피로 목욕한 연쇄 살인마라는 소문이 있던 녀석이지.”

레일리가 말을 덧붙였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흘끔 보곤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귀족이다 보니 사형은 면했다고 하더군.”

꺄아아악―

저택을 향해 마을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날카로운 비명이 더욱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거리의 악취와 흙먼지 냄새는 어느새 피비린내로 변했다.

“키야아아악!”

그때였다. 거리에 널려 있던 주머니 중 하나에서 갑자기 시체가 튀어나와 레일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새하얀 탄환과 묵직한 메이스가 동시에 시체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시체는 먼지가 되어 바닥에 쌓이다 이내 바람과 함께 날아갔다.

“…소리로 만든 탄환이라.”

레일리가 메이스로 땅을 찍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긴 후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입을 열었다.

“보스전에서 어떻게 날 놀라게 할지 기대가 되는군.”

맹금류의 눈 같은 황금색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레일리의 저 발언은 나를 향한 경고다. 자신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거래는 물거품이라는 경고.

난 그의 말에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의 헌터가 저택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꾹, 꾸룩.

저택 정원에 발을 들이자마자 까마귀들이 일제히 한곳에 모여 얼굴을 파묻고 있는 게 보였다.

“윽…….”

“오, 아멘.”

까마귀들이 파먹고 있던 건 사람의 시체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어서 눈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라파엘라는 그 모습을 보며 짧게 기도를 한 후 시체 주위에 있던 까마귀를 내쫓았다.

정원을 지나 저택 입구에 들어서자 커다란 나무 문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이제 이 문을 열면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있다.”

레일리가 문고리에 손을 얹은 후 나와 라파엘라를 번갈아 보았다.

키이잉―

라파엘라는 메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에 손을 댔다. 그러자 그것이 빛에 휩싸여 그의 키보다 더 큰 금색 십자가로 변했다.

‘내 핸드폰을 개박살 냈던 그 무기네.’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다. 맘껏 날뛰도록”

나는 아무 말 없이 자아를 손에 쥔 채 레일리가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끼이이익―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의 끝에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것에게 천천히 다가가자 그의 크기가 평범한 인간의 크기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이게 아니야……. 이게 아니란 말이야…….”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린 여자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한참 보던 그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젊은 피는 구해왔나?”

콰앙!!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중얼거림과 함께 천장에서 쇳덩이가 떨어졌다.

‘아이언 메이든이군.’

경계에서도 만나봤던 아이언 메이든 형태의 몬스터였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 있는 악어처럼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콰과광!!

그러고는 우리를 향해 매섭게 달려들었다.

“1페이즈 시작입니다~”

“지금부터 저 아이언 메이든이 미친 듯이 떨어질 거다. 잡혀서 바토리에게 피 빨리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잘 피하도록.”

까앙―!

레일리가 가장 먼저 떨어진 아이언 메이든을 메이스로 날려버리는 걸 시작으로 1페이즈가 시작되었다.

콰과과광!

레일리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사람 키보다 큰 아이언 메이든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나는 그것들을 피하기 위해 발 없는 말과 낮말을 듣는 새를 이리저리 섞어가며 저 미친 아이언 메이든들과 거리를 두었다.

“후욱!”

콰그작!

자아를 작살 총 형태로 바꾸어 구석 쪽 벽에 박아 넣었다. 나는 곧장 방아쇠를 당겨 녀석들과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러고는 방아쇠를 꾹 눌러 범위 공격을 시도했다.

우우우웅―

새하얀 파동에 맞은 아이언 메이든들이 부르르 떨더니 이내 모든 머리가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아하하!”

라파엘라가 즐거운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커다란 십자가를 양손으로 잡고 휘두르며 머리가 떨어진 아이언 메이든을 하나씩 부수고 있었다.

쿵, 쿵.

그때 내 앞뒤로 또 다른 아이언 메이든이 소환되었다.

“후읍!”

두 쇳덩이가 나를 향해 입을 벌리자마자 위쪽으로 도약했다. 그 탓에 그것들은 보기 좋게 서로 부딪혔다. 가시들끼리 꽉 엉켰는지 아이언 메이든들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삐걱거렸다.

타앙―

소리 탄환이 아이언 메이든을 관통하자 아이언 메이든 속 가시가 서로를 향해 발사됐다.

두 쇳덩이가 소멸하고 나서야 나는 다시 땅 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조심하세요~”

“어? 아악!”

후웅―

묵직한 바람과 함께 무언가 내 머리 바로 위를 스쳐지나갔다.

쾅!!

굉음이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라파엘라의 십자가가 아이언 메이든을 바닥에 처박는 모습이 보였다.

붉은 융단 바닥에 수십 개의 가시가 박히고 아이언 메이든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모든 아이언 메이든이 사라진 뒤, 라파엘라는 내게 성큼 다가오며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신가요?”

“…일부러 그랬어?”

“그럴 리가요!”

라파엘라가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안경 너머의 반짝거리는 눈은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날 시험해 본 건가.’

끼기긱―

그때 아이언 메이든 하나가 라파엘라의 뒤쪽에서 나타났다.

‘구원자의 무기 창고.’

창고가 열리자마자 바주카 형태의 자아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아이언 메이든을 향해 발포했다.

퍼엉―!

소리 포탄이 아슬아슬하게 라파엘라의 머리 옆을 지나 아이언 메이든의 몸통에 명중했다. 그러자 두 쇳덩어리를 잇던 이음새가 풀어지더니 이내 아이언 메이든이 반으로 갈라졌다.

“…흐음.”

라파엘라가 포탄이 지나갔던 자신의 왼쪽 귀를 더듬으며 말꼬리를 늘렸다. 그러곤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

“오히려 널 구해줬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라파엘라’가 동요한다.]

“아하하!”

동요한 건 라파엘라였건만, 멀리서 레일리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쾅!

그는 메이스로 바닥에 있던 아이언 메이든을 내려찍은 후 손을 가볍게 털었다.

“그래, 라파엘라. 오히려 네가 감사 인사를 해야겠군.”

“흐흥.”

[발언 결과 : 흥미]

라파엘라는 싱긋 웃으며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곱슬거리는 금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감사합니다, 자매님.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감사 인사를 받은 것치곤 영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 두 사람이 내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며, 나의 쓸모를 판단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뭐, 슬슬 2페이즈로 넘어갈까.”

레일리가 품 안에서 작은 잭나이프를 꺼내더니 그대로 손바닥을 그었다.

“뭔……!”

“괜찮습니다, 자매님. 다음 페이즈로 넘어가기 위한 절차입니다.”

라파엘라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말에 곧바로 레일리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살폈다. 언뜻 봐도. 더할 나위 없이 평온했다.

후드득―

그가 주먹을 꽉 쥐자 핏줄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어억!”

그와 동시에 화장대 앞에 앉아 있던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벌떡 일어나더니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거의 2층짜리 건물만 하군.’

녀석이 가까이 오자 커다란 그림자가 우리 위에 걸렸다.

쿵!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레일리의 피가 떨어진 카펫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후 카펫 털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숨을 헐떡였다.

“피! 피, 피……!”

아까까지의 우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녀석은 게걸스럽게 카펫에 있던 피를 핥기 시작했다. 녀석의 굽힌 척추 뼈가 비정상적으로 치솟았다.

“2페이즈부터는 이 녀석이 본 모습을 보인다. 뭐, 최선을 다해 후드려 패도록.”

“피를 먹으면 체력이 회복되는 몬스터니까 웬만하면 다치지 말아주세요~”

텁.

레일리가 라파엘라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라파엘라, 치료.”

“네~”

“…치유계였어?”

“아하하. 의외인가요?”

신부복을 입은 치유계 헌터라. 어색하지 않은 조합이긴 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속이 새카만 것 같은 라파엘라의 분위기 때문에 잘 어울리진 않았다.

라파엘라는 레일리의 손을 잡은 후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쉴 새 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속삭이듯 말하는 터라 내 귀엔 들리지 않았다.

치이이익―

라파엘라의 손바닥 위로 검은색 빛무리가 내려앉았다.

반짝거리는 검은 가루가 꿈틀대며 그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얘 스킬도 한번 볼 필요가 있겠어.’

“피를…….”

레일리의 손바닥 치료가 끝나자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녀석의 눈에선 피눈물이 흘렀고, 입은 귀 끝까지 찢어져 그로테스크했다.

“더 많은 피를 내놔!!”

녀석의 절규와 함께 2페이즈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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