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23화 (123/366)

123화

끼이익―

“길드장님~ 자매님이 묵을 방이……. 오우, 신이시여.”

노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건 라파엘라였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테이블을 보자마자 난처한 듯 울상을 지었다.

“자꾸 과격하게 행동하시면 신께서 노하십니다.”

“내가 아는 신은 안 그러던데.”

“하아…….”

라파엘라가 길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의 상사의 성격에 완전히 질려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레일리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옷을 털며 메이스를 다시 반지 형태로 돌려놓았다.

“아무튼 우리 지의 자매님께서 머물 방이 준비됐다고 하시네요.”

“아, 그래?”

레일리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일 출발하기 전까진 손님방에서 지내라. 관리를 안 한 방이라 좀 허름하겠지만.”

“출발이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서 일어나자 라파엘라가 큰 소리를 냈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레일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 헝가리 A급 던전으로 간다. 물론 너도 포함이고.”

“너무 갑작스럽네요…….”

라파엘라가 안경을 살짝 내린 후 미간을 짚었다.

“어쩔 수 없죠, 뭐…….”

그러곤 얼마 안 있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라파엘라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아, 자매님께서 지내실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나는 그의 손을 잡는 대신 아이테르의 로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멋쩍어할 줄 알았는데, 그는 태연하게 자신의 머리를 정돈한 후 먼저 방을 나섰다.

그의 뒤를 따라 중앙 계단으로 올라가 2층으로 발을 옮겼다. 코너를 두 번 정도 돌자 화려한 손잡이가 달린 문이 보였다.

끼이익―

“여기가 지의 자매님이 지낼 공간입니다.”

‘뭔 방 하나가 거의 우리 집만 한 사이즈네.’

손님방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커다란 창문이었다. 창문 너머로 작은 테라스가 있었고, 티타임을 가질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도 보였다.

오른쪽은 거실처럼 보였다. 푹신해 보이는 소파와 낮은 탁자.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디저트 트레이가 눈에 띄었다. 왼쪽엔 침대 두 개가 협탁을 사이에 두고 벽에 붙어 있었다.

“욕실은 안쪽에 있고, 갈아입을 옷이랑 속옷들도 저희가 모두 준비해 놨습니다.”

“근데 왜 침대가 두 개야?”

“그야 저도 누워야 하니까요.”

“뭐?!”

‘아주 제대로 감시를 하는구나.’

어차피 창조자의 파편을 부수기 전까지 먼저 도망칠 생각은 없지만 감시가 붙는 건 여러모로 성가신 일이다.

질색한 나와 달리 라파엘라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윽…….”

“어이쿠. 자매님, 괜찮으십니까?”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어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아까부터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가, 피로가 갑자기 몰려왔다.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후 라파엘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씻을 테니까 갈아입을 옷 좀 줘.”

“네. 그러지요.”

짧은 대답이 끝나고, 라파엘라는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곤 어딘가로 사라졌다.

* * *

“후…….”

샤워를 하고 나니 아까보다는 피로가 조금 풀린 기분이다.

툭.

머리의 물기를 턴 후 수건을 세면대 옆쪽에 대충 던져두었다. 라파엘라가 가져다준 잠옷 위에 아이테르의 로브를 걸쳐 입으며 욕실 문 쪽으로 몸을 빼 귀를 기울였다.

‘나갔나?’

아까까지 들리던 라파엘라의 콧노래가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끊긴 걸 보니 그가 방 밖으로 나간 것 같다. 온전히 혼자 남았음을 확인한 나는 숨을 죽인 채 조심스럽게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리고 업무용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평소에 사용하는 핸드폰은 이미 뺏겼지만 인벤토리 안에 있는 건 전부 무사했다. 애초에 인벤토리는 본인밖에 열 수 없으니 당연한 결과이긴 하다.

핸드폰 잠금을 풀자마자 헌터넷 아이콘을 눌렀다. 그러자 ‘서비스 연결 중입니다’라는 글자가 빠르게 떴다.

우선 세빈이와 최민 헌터에게 연락해야 한다. 김강희의 귀에 들어가면 일이 크게 번질 확률이 높다. 그러니 그들이 김강희를 찾아가기 전,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정도는 알리는 게 좋을 것이다.

‘진짜로 협력이 필요한 순간은 파편을 부술 때니까.’

파편 속 던전 난도가 어떨지 모르기 때문에 웬만하면 높은 등급의 헌터들로 배치하는 게 좋다. 노블레스 길드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쪽 상급 헌터들을 이쪽으로 파견시키는 방향도 고려해야 한다.

“흠…….”

그나저나 헌터넷 접속이 평소와 다르게 시간이 걸렸다. 라파엘라의 감시가 벗어난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데 야속하게도 로딩 화면에서 헌터넷 페이지로 넘어가질 않았다.

[신지의 헌터 인증 완료]

‘됐다!’

화면이 바뀌자마자 연락처 버튼부터 눌렀다. 다행히 세빈이가 가장 첫 화면에 떴다. 이제 연락만 하면……!

쾅―!!

“컥! 콜록, 커, 뭐야?!”

그때, 나무 조각과 먼지를 날리며 욕실 문이 뚫렸다. 거대한 쇠판 같은 것이 내 눈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문을 박살을 내놓았다.

턱―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문 앞에 주저앉았다.

콰그작!

내가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문 틈새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고 그대로 내 핸드폰을 낚아챘다.

“자매님~”

욕실 문짝이 뒤로 넘어가자 거기에 기댔던 내 몸도 보기 좋게 바닥에 처박혔다. 바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갑자기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만 겨우 들 수 있었다.

“라파엘라……!”

눈앞에는 키보다 훨씬 큰 십자가에 몸을 기댄 채 내 핸드폰을 이리저리 살피는 라파엘라가 있었다.

그는 내 핸드폰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더니 이내 십자가를 한 손으로 들었다.

콰그작―

업무용 핸드폰이 무슨 과자 마냥 너무나 쉽게 부서졌다.

시선을 다시 라파엘라에게로 옮기자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저 면상에 대고 뭐라 말이라도 한마디 쏘아주고 싶지만, 몸이 점점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희 길드 내에 있는 모든 전자 기기들은 추적이 가능하답니다.”

“…젠장.”

“웬 처음 보는 기기가 뜨길래 위치를 확인했더니… 우리 지의 자매님이 계신 욕실이지 뭐예요!”

라파엘라의 말끝에 옅은 웃음이 맺혔다. 비아냥거리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내가 핸드폰을 꺼내도록 유도한 거구나.’

“길드장님은 우리 지의 자매님께서 도망갈 리가 없다고 하셨지만 저는 영~ 못 미더워서 말이죠.”

“너 진짜 성가시……. 윽.”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아까처럼 머리가 핑 돌아 다시 주저앉았다.

‘분명 스킬 때문일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 정도로 몸에 힘이 안 들어갈 리 없었다.

내가 아랫입술만 콱 문 채 라파엘라를 노려보자 그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생글거리는 얼굴이 얄미울 정도였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그는 양손을 모아 기도를 하곤 허리를 접어 나와 눈을 맞췄다.

“일단 좀 쉬세요, 지의 자매님.”

누적된 피로 때문인지 그의 스킬 때문인지, 눈꺼풀이 자꾸만 감겼다. 일어서려는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자 라파엘라가 내 어깨를 잡았고 그대로 둘러멨다.

그의 어깨에 얼굴이 묻히고, 온몸에 힘이 점점 빠졌다.

끼익―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장미 향기가 나는 침대에 등이 닿는 것을 느껴졌다.

그렇게 내 의식은 완전히 날아갔다.

* * *

“그게 사실이야?”

미준의 말에 민과 세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준은 자신의 사무실 안을 빙빙 돌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과 헤어졌을 때가 5시 무렵이었고 지의는 약속 때문에 잠실로 간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세빈은 그의 부모의 전화를 받았다.

즉, 지의의 행방이 묘연해진 건 그날 새벽이다.

“그 신지의 헌터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스킬인지 뭔지는 정확한 거야?”

“지금까진 전부 정확했습니다.”

민의 대답에 세빈이 곁눈질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있었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지의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신지의 헌터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일도 없었을 텐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오리무중 한 가운데, 민이 입을 열었다. 미준과 세빈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두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더니 그들을 향해 화면을 들어 보였다. 화면엔 영어로 된 사이트가 떠있었다.

“노블레스 길드?”

“본부가 영국 윔블던에 있습니다.”

“이 길드가 지의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죠?”

세빈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민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검은 눈동자와 눈을 맞췄다.

‘내 말을 믿어줄지 걱정이군.’

노블레스의 길드장이 창조자의 사도라는 설명 없이 어떻게든 두 사람을 설득시켜야 한다.

민은 지의가 알려준 정보와 자신이 조사했던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유럽 길드전이 일주일 후에 열립니다. 노블레스는 이 길드전에서 매번 1위를 차지했었죠.”

“그러고 보니 벌써 그렇게 됐네. 이번에도 나한테 무기 제작 의뢰가 많이 들어왔어."

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올해 여름, 이탈리아의 ‘아우레올라’ 길드가 1위를 탈환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길드네?”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길드입니다. 길드장은 피에트로 리나. 고유 스킬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S급의 어둠 속성 헌터라고 밝혀졌습니다.”

어둠 속성이라는 말에 세빈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어둠과 빛 속성은 완전한 반대 상성이다. 서로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서로의 공격에 가장 취약하다는 걸 말한다.

어둠 속성의 길드장이 이끄는 길드가 노블레스 길드를 몰아내고 1위를 탈환했다면 노블레스 길드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단 하나.

빛 속성의 상급 헌터를 데려오는 것이다.

‘왕가에서 퇴출당한 인간이라고 듣긴 했지만, 이 정도로 과격할 줄은 몰랐는데.’

세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지금 최민 헌터 말은, 노블레스 길드가 다시 1위를 차지하기 위해 신지의 헌터를 납치했다는 말이야?”

“…그게 제일 유력한 가설입니다.”

민 역시 노블레스 길드가 지의를 데려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창조자에게 무언가를 듣고 그를 죽이기 위해 행동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두 사람을 설득하려면 사실을 기반으로 한 추측이 아닌 그나마 그럴싸한 다른 이유를 대는 수밖에 없었다.

“납치 이유는 나중에 생각할게요.”

세빈이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지의가 지금 영국에 있는 건 변하지 않잖아요. 일단 움직이죠.”

“맞는 말이야.”

미준도 거들었다. 그는 옷걸이에 걸어놓은 재킷을 입으며 곁눈으로 핸드폰을 살폈다.

“전용기는 눈에 띌 테니 일반 국적기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고……. 노블레스 쪽 동태는 내가 한번 살필게. 아는 사람이 있거든.”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민의 인사에 미준이 생글생글 웃었다.

텁.

그러고는 민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민이 고개를 들자 미준의 웃는 눈매 속의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신지의 헌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큰일일 거야, 그치?”

“…….”

“소중한 동료를 잃는 일 없게 하자고.”

미준은 다시 몸을 돌려 세빈 쪽으로 발을 옮겼다. 민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미준의 방금 그 발언은 명백한 경고였다. 한번 믿어줄 테니 무조건 지의를 구해오라는 경고.

민은 다시 상태창을 열어 지의의 상태를 확인했다.

[구원자의 현재 위치 : 영국 윔블던]

[구원자의 현재 상태 : 안정]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까보다 나아 보이는 지의의 상태에 그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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