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21화 (121/366)

121화

세빈의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켜졌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가 당장이라도 넘칠 것처럼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우리, 절대 사라지지 말자.”

지의가 했던 말이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사라지지 말자고 한 소꿉친구가 자신을 혼자 두고 사라졌다. 차분하게 생각해야 방법이 나온다는 걸 알고 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강세빈 헌터.”

세빈이 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가 신지의 헌터의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민의 한마디에 숨 막히는 정적이 두 사람의 몸을 짓눌렀다.

‘이 여자가 뭐라는 거야.’

세빈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손안에 생긴 그림자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넘쳐 바닥에 쏟아졌다.

“지금 장난…….”

“장난도 아니고 제가 벌인 짓도 아닙니다.”

민이 세빈의 말을 잘랐다. 평소의 그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세빈에게 상황을 설명하지 않으면 그의 그림자가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다는 생각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신지의 헌터가 경계에서 쓰러졌을 때도 저런 얼굴이었지.’

빛이라곤 조금도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은 새카만 눈동자에 기묘한 광기가 어려 있어서일까. 민은 눈앞의 세빈이 몇 개월 전의 그와 겹쳐 보였다.

“신지의 헌터를 구한 후부터 그의 위치가 보입니다.”

“…지의의 위치가요?”

“네. 그리고 지금은 그 위치가 영국 윔블던이라고 나옵니다.”

세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 지의가 그곳에 있는 거라면……. 지의의 어머니의 말씀은 뭐지? 그가 알고 있는 자신의 소꿉친구는 누군가의 이름을 대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납치당한 거야.’

세빈이 아랫입술을 씹고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일단 회장님에게 이 상황을 알리죠.”

“……아.”

“왜 그러시죠?”

민이 대답하려다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에게 지의의 납치 사실을 이야기해도 될까?’

강희가 만약 이 사건의 주동자라면, 지의가 더욱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그리고 현재 상황을 이야기하려면 자신이 얻은 업적인 ‘구원자를 구한 자’를 필연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순식간에 모든 패가 강희에게 노출되고 말 것이다.

“…이건 저희끼리 처리합시다.”

“네?”

사아아―

바람이 불어 나뭇잎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서늘한 정적 속에 세빈의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

“납치 사건입니다. 저희끼리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오히려 많은 사람이 개입하면 신지의 헌터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이상하리만치 침착한 민의 태도에 세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지의가 민을 악몽에서 꺼낸 후, 그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그 미세한 변화를 알아챈 세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민을 한참 바라보았다.

“지의를 들먹이면서까지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지만…….”

“…….”

“솔직히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소리를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세빈이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민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순 없었다. 지의가 영국에 있다는 사실은 민만이 알고 있는 정보다. 오롯이 민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이었기에 어디서, 어떻게 알아낸 정보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터다. 즉, 강희에게 국제 공조 요청을 하기엔 물증이 너무 없다.

‘차라리 현장을 급습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

세빈은 민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갖고 있는 증거가 최민 헌터의 말과 제 통화 기록뿐이니, 이번만큼은 최민 헌터의 의견을 수용하죠.”

“감사합니…….”

“대신 한 사람을 더 투입 시키겠습니다."

텁.

세빈이 인벤토리에서 업무용 핸드폰을 꺼냈다.

“당신과 단둘이 지의를 구하러 가기엔 여전히 수상한 점이 너무 많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을 수상하게 여기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의 입장에서도 지의를 구하러 갈 사람이 하나라도 더 는다는 것은 오히려 희소식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민은 상태창을 다시 한번 띄웠다.

[구원자의 위치 : 영국 윔블던]

[구원자의 상태 : 약간의 긴장]

* * *

“언제까지 붙어 있을 셈이야?”

“성가시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자매님~ 돈 주고도 못 할 노블레스 길드 본부 투어라고요?”

“하아…….”

난 내 팔을 내려다보았다. 내 팔은 라파엘라의 왼팔에 팔짱을 낀 채로 고정되어 있었다. 알렌이라는 남자가 손을 대자마자 보이지 않는 실로 단단히 묶인 덕분에 이 여자에게 끌려다니는 꼴이 되었다.

뜯어낼 순 있었지만 굳이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서 가만있었다. 내가 순순히 팔을 내어주자 라파엘라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다시 노블레스 길드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지난 시간선과 크게 다르지 않군.’

노블레스 길드는 명실상부 영국의 제1 길드다. 길드가 설립된 역사 자체는 짧지만 서서히 힘을 키워 설립 10년 만에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길드장이 현 국왕의 언니다 보니 왕실에서 뒤를 봐준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영국 왕실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퇴출된 핏줄에겐 단 한 방울의 피도 주지 않았으며, 앞으로 줄 일도 없다.”

자신의 혈육을 향한 영국 국왕의 경고였다.

레일리는 어렸을 때부터 행실이 불량했기 때문에 왕실은 그의 동생을 후계자로 삼았다. 일찍이 내놓은 자손이나 다름없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창조자가 쟤한테 탕자라는 이명을 붙인 건가.’

탁―

라파엘라를 따라 긴 복도를 한참 걸어가자 중앙 현관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거대한 기둥과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러울 정도인 샹들리에가 숨 막히게 웅장했다.

계단 밑으로는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길드보다는 어느 귀족의 저택에 온 듯한 광경이었다.

“다른 길드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저희도 처음부터 이렇게 큰 길드였던 건 아니랍니다.”

저택을 안내하듯 라파엘라가 왼쪽 벽을 가리켰다.

“오…….”

고개를 돌리자 중앙 현관을 바로 보는 벽에 어마어마하게 큰 레일리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남색 제복에 커다란 왕관을 쓴 그의 모습은 황제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게 그 그림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길드장님은 왕실에서 퇴출된 직후 각성을 하셨어요. 그리고 곧바로 이 길드를 만들었죠.”

“그리고 소형 길드들을 하나씩 흡수한 건가?”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라파엘라’가 동요한다.]

내 말에 라파엘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저희 길드를 아예 모르시는 건 아니군요?”

“이 정도는 인터넷에 검색하면 다 나와. 너희가 비밀 길드도 아니고.”

[발언 결과: 흥미]

이 길드는 온전히 레일리의 힘으로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무력으로 소형 길드들을 하나씩 흡수해 세력을 넓혔다. 그러한 과정 끝에 이런 대형 길드를 만든 것이다.

‘핵심 간부는 얘랑 알렌이라는 남자 그 둘밖에 없는 것 같지만.’

눈동자를 굴려 라파엘라를 바라보았다.

“이 길드에 S급 헌터는 몇 명이나 있어?”

“길드장님과 저, 그리고 알렌뿐입니다.”

“세 명?”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숨기는 것일 수도 있지만 노블레스씩이나 되는 대형 길드에 S급 이 세 명밖에 없는 건 좀 의외였다.

터벅, 터벅.

중앙 계단을 통해 내려가자 1층에 있던 사람들이 라파엘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생각보다 S급 헌터가 많이 없네.”

“하하. 아직은 그렇죠. 또 유럽은 몇 국가를 제외하고 전부 각성 신고제이니, 자신이 S급인 걸 숨기고 사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라파엘라의 보라빛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리고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바로 데려와야겠지만요.”

라파엘라는 계단에서 내려와 1층 복도 안쪽으로 몸을 틀었다. 복도 바닥에도 붉은 융단이 길게 깔려 있었다.

“아, 알렌도 그중 한 명이었어요. 길드장님에게 걸려서 결국 길드에 가입하게 됐지만.”

“넌?”

“어머.”

라파엘라가 허리를 살짝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저희한테 관심이 생기셨나 봐요?”

“관심이 아예 없던 건 아니야. 나도 너희 길드장을 한 번 만나고 싶었으니까.”

“푸흐흐.”

그가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까도 느낀 건데, 납치당한 사람의 태도치고 재밌는 구석이 있으시네요.”

“그래서 넌 어떻게 들어온 건데?”

“저는 뭐…….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운 좋게 길드장님의 눈에 띄어서 들어온 케이스죠.”

“그 전에는 뭘 했…….”

“아, 다 왔네요.”

라파엘라가 내 말을 뚝 끊었다.

‘과거에 예민하군.’

나는 적당히 상황을 파악하며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도 가장 안쪽에 커다란 마호가니 문이 있었다.

똑똑―

라파엘라가 그 문을 가볍게 두드리자 기다렸다는 듯 양쪽으로 열렸다.

문이 열리자 내가 눈을 뜬 방과 비슷한 공간이었다.

붉은 카펫이 깔린 바닥과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창문, 그리고 중앙에 있는 커다란 소파와 나무 탁자.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장소였다.

“아, 왔나?”

방 중앙에 있는 소파엔 레일리가 다리를 쩍 벌린 채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어때. 제법 괜찮은 길드지?”

“응. 나쁘지 않았어.”

라파엘라는 나를 이끌고 레일리 쪽으로 걸어가더니 그의 앞에 있는 긴 소파에 앉았다.

그동안 레일리는 옆에 서있던 남자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남자는 트레이에서 찻잔과 디저트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홍차는 좋아하나?”

“음식은 안 가려.”

“잘됐네.”

남자가 내 찻잔에 홍차를 따르자 새하얀 김이 올라왔다. 겉보기엔 내가 알고 있는 홍차의 생김새와 같았다.

“평범한 홍차다. 독이나 이상한 약을 타진 않았으니 편하게 먹어라.”

명령조가 완전히 입에 붙었는지 레일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깔보는 듯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그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왼손으로 컵을 들어 홍차를 들이켰다. 향긋하고 쌉쌀한 맛이 혀를 감쌌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그때 레일리가 상체를 앞으로 숙여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맹금류 같은 황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너, 절대자와 접촉한 적이 있나?”

‘됐다.’

그의 입에서 내가 원하는 주제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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