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20화 (120/366)

120화

【오만한 탕자】

“셰프를 진작에 바꿀 걸 그랬어. 이제야 좀 먹을 만하네.”

“길드장님 입맛이 너무 까다로운 거예요. 전 전에 계시던 분도 괜찮았는데.”

말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하지만 눈앞은 여전히 캄캄하고 몸은 어디에 묶였는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내가 깨어있다는 걸 알리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풀고 천천히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김강희와 식사를 마친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웬 괴한들이 집에 있었다. 그들이 갑자기 날 제압해 어딘가로 끌고 갔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분명 헌터였어.’

바닥 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이동계 스킬을 갖고 있는 놈일 확률이 높다. 일단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나저나 저 자매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설마 길드전에 투입시키실 건 아니죠?”

“상황에 따라선 그렇게 할 수도 있지. 그건 저 애송이가 일어난 다음에 판단할 문제다.”

“지금 입고 있는 저게 아이테르의 로브 같은데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네요.”

“귀속 아이템이니까 그렇지. 이제 저건 쟤 살가죽이나 마찬가지일 거다.”

세 사람의 목소리가 정신없이 들려왔다.

‘듣다 보니 익숙한 목소리가 있는 것 같은데.’

날이 잔뜩 선 말투를 가진 낮은 음성. 저 목소리의 주인이 생각날 듯 말 듯했다.

‘레일리야.’

‘…뭐?’

그때 자아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올랐던 흐릿한 형체가 선명하게 자리했다.

‘아무래도 여기 노블레스 길드 내부인 것 같아.’

‘걔네들이 날 납치한 거야? 왜?’

‘이유는 직접 물어보면 알겠지.’

탁.

손끝에 자아가 걸렸다. 손잡이를 꽉 쥔 후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라파엘라, 후추 좀.”

“여기요.”

내가 깬 걸 모르는지 레일리는 식사에 여념이 없었다. 속박을 풀 찬스는 지금이다.

우우우우웅―

“윽?!”

공기가 크게 진동하자 누군가의 억눌린 신음 소리가 들렸다. 내 몸을 옥죄고 있던 것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는 느낌과 함께 어두웠던 시야가 밝게 돌아왔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린 천장과 온갖 고풍스러운 그림이 걸린 벽. 오른쪽 벽은 커다란 창문이 줄지어 나있어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중세 유럽의 귀족 저택 같은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여기에 날 묶어뒀군.’

내 발치에 부서진 나무 의자와 밧줄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재밌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레일리를 포함한 세 명의 사람이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쥔 채 지옥의 멀미와 싸우고 있었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레일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허리까지 오는 긴 백발이 가볍게 흔들렸다.

“입만 막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군.”

“읍……!”

‘안 벌어져!’

누군가 테이프를 꽉 붙여놓은 양 입술이 조금도 벌어지지 않았다. 손으로 더듬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탕!

“푸하……!”

얼굴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고 나서야 입술이 자유로워졌다. 숨을 토해 낸 후 얼얼한 입술을 손등으로 매만지며 호흡을 정리했다.

“…하.”

레일리가 눈을 크게 뜬 채 걸음을 멈췄다. 자폭 행위처럼 보이는 내 행동에 놀란 눈치였다.

“알렌의 스킬을 풀어버리다니. 아주 못 써먹을 애송이는 아닌가 보군.”

“제, 제 스킬을 풀었다고요?”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던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장 고개를 돌렸다.

‘귀에 통역기는 또 언제 꽂은 거야.’

이 인간들의 말이 자연스럽게 들리길래 귀를 한 번 만져보니 익숙한 기계가 손끝에 닿았다.

“예의상 인사는 하도록 하지.”

레일리가 내 앞에 섰다. 검은색 안대로 가린 왼쪽 눈과 이글거리는 금색의 오른쪽 눈, 마치 짐승을 앞에 둔 느낌이다.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 노블레스의 길드장이다.”

그는 입술을 한쪽으로 말아 올리며 웃었다.

레일리, 노블레스의 길드장이자 현 국왕의 언니. 그리고 창조자의 사도 중 하나인 ‘탕자’이기도 하다.

“사람이 소개를 했으면 너도 네가 누군지 밝혀야지. 그 정도 예절도 없나?”

“납치범에게 갖출 예의는 없거든.”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내 말에 레일리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어쩌려고 도발을 해…….’

자아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레일리는 언젠가 내가 개화시켜야 하는 대상 중 하나다. 그를 천천히 구슬려 내 편으로 끌어와야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까지 그에게 굽힐 필요는 없다.

“호오.”

[발언 결과 : 흥미]

‘오히려 그는 자극해야 틈을 보이는 사람이니까.’

레일리는 냉철한 성격이지만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릴 땐 그 누구보다 빠르게 흥분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도발할수록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창조자와 어떤 계약을 한 건지 알 기회가 생길 것이다.

“길드장님, 신지의 자매님.”

그때 테이블 쪽에서 사제복을 입은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동그란 안경 너머로 생글생글 웃는 눈이 보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가 쪽에 있던 소파를 두드렸다. 손이 소파에 닿을 때마다 그의 목에 걸린 보랏빛 머플러 같은 것이 흔들렸다.

“그러지 마시고 앉아서 말씀 나누시죠.”

“너는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라파엘라.”

“두 분 다 불편해 보이시니까 그런 건데.”

‘저 두 명이 핵심 간부진인가.’

테이블에서 레일리의 눈치를 보며 빵을 먹고 있는 남자는 알렌, 그리고 소파를 두드리며 우리가 앉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여자는 라파엘라인 듯했다.

“하아아…….”

레일리가 소파 쪽으로 성큼 걸어가 그대로 털썩 앉았고, 나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날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뭐야.”

“글쎄. 넌 뭐라고 생각하는데?”

고작 몸값을 뜯어내려는 목적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노블레스 길드는 영국에서 제일 큰 길드이기 때문에 길드원은 물론 재산도 많다. 한국 헌터 협회에 시비를 걸기 위해 이런 만행을 저지를 만큼 멍청하지도 않았다.

즉, 길드 차원이 아닌 레일리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한 일이란 소리다.

‘그렇다면 창조자와 관련이 있을 확률 100퍼센트네.’

“이렇게 해서라도 날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 보지, 뭐.”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누구였어? 날 만나보라고 시킨 게.”

쾅!

레일리가 주먹으로 내리치자 굉음과 함께 나무 테이블이 두 동강 나며 흙먼지가 일었다.

[발언 결과 : 치욕]

내가 자신을 농락하고 있다고 생각한 건지 그는 이까지 드러내 보이며 씩씩댔다.

“엇, 음.”

레일리의 소파에 팔을 댄 채 나를 보고 있던 라파엘라가 당황했는지 두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생글생글 웃으며 제 길드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검은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이 눈에 띄었다.

“오늘따라 너무 흥분하셨네요. 성경이라도 읽어드려요?”

“개소리하지 마라.”

“어머나…….”

레일리의 입에서 나온 상스러운 말에 라파엘라가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레일리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여러모로 아주 흥미롭다.”

“…그래?”

“원래 계획대로라면 네가 깨어나는 대로 죽여서 포츠머스 앞바다에 버릴 생각이었지만.”

쿵!

그가 큰 메이스를 꺼내 테이블의 잔해를 찍자 다리를 타고 큰 진동이 느껴졌다.

“마음이 바뀌었다.”

그가 내 쪽으로 상체를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담배 냄새와 독한 향수 향이 섞인 오묘한 체향이 코를 찔렀다.

“그 자식보다 내가 먼저 네 정체를 까발려 주지.”

* * *

<업적>

[구원자를 구한 자]

[구원자의 위치에 이상이 감지되었습니다.]

[구원자의 신체에 이상이 감지되었습니다.]

‘뭐?’

퍼버벙!

민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얼음 창을 녹여버리며 눈앞에 뜬 상태창을 읽었다. 지의가 전주 A급 던전 앞에 쓰러져있을 때 보았던 상태창과 동일한 것이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엔 위치에도 이상이 감지되었다는 것이다.

‘구원자 위치와 상태 확인.’

[구원자의 위치 : 영국 윔블던]

[구원자의 상태 : 약한 불안 증세]

어제 퇴원한 사람이 오늘 영국에 있을 확률은 0에 가까웠다. 만에 하나 직접 갔다고 하더라도 약한 불안 증세를 보인다는 건 그가 위험에 처해있다는 걸 의미한다.

무언가 굉장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서걱.

민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꼬일 무렵 세빈의 ‘영(影)’이 평창 A급 보스 몬스터인 혹한의 오륜기의 마지막 고리를 벴다. 몬스터는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끈적한 액체가 되어 사라졌다.

“후! 3인 팀이라서 걱정했는데 역시 S급이 두 분이나 계셔서 금방 끝났네요!”

“이상욱 헌터도 고생하셨습니다.”

세빈은 그를 향해 싱긋 웃으며 부산물을 챙겼다.

“협회에 팔겠습니다.”

“최민 헌터! 가시죠!”

“아, 네.”

민이 지면에 착지한 후 가장 먼저 게이트를 열었다. 그러곤 곁눈질로 세빈을 쳐다보았다.

‘강세빈 헌터라면 뭔가 알고 있으려나.’

세빈은 민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영을 다시 손목에 차고 있었다. 급하게 파견된 업무라 그의 얼굴엔 피곤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럼 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또 봐요~”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상욱이 손을 흔들며 먼저 자리를 떠났다.

우웅―

그때 갑자기 세빈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업무용 핸드폰 쪽으로 손을 뻗다 멈칫했다. 울리고 있던 건 자신의 개인 핸드폰이기 때문이었다.

‘누구지?’

이모나 지의를 제외하고 이 전화로 연락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는 개인 핸드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지의 어머님

쿵.

“우왁?!”

스캔 담당 직원의 책상에 있던 휴대용 스캐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직원은 허둥지둥 그것을 주워 깨진 곳이 없는지 살폈다.

그동안 세빈은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의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지의의 부모가 자신에게 연락하는 때는 지의와 연락이 안 되거나, 아니면 단순히 안부를 물을 때다.

‘…어제 퇴원해서 집에 있는 애한테 무슨 일이 생겼겠어.’

세빈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자신의 그림자를 발로 꾹 누른 후 핸드폰을 귀로 가져왔다.

“네, 어머님. 안녕하세요~”

―어, 어어! 세빈아, 잘 지내니?

“네. 어머님이랑 아버님도 잘 지내시죠?”

―으응. 그럼. 가평 던전에서 무사히 나왔다길래 전화 한번 걸어봤어.

다행히 후자였다. 세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가에 은은히 미소를 지었다.

‘부모님과도 연락하는 사이면 역시 강세빈 헌터에게 물어봐야겠군.’

민도 세빈의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지의 모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끼익.

세빈은 컨테이너 박스 문을 열며 다정한 안부 인사를 건넸다.

―그래,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까 좋다.

“저도요. 나중에 한번 좋은 데서 모실게요.”

―아유, 됐어. 아무튼 어때? 거긴 좀 좋니?

“…네?”

세빈의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문장이 그의 귀에 꽂혔다.

―너희 지금 제주도라며~ 지의가 문자로 세빈이 너랑 제주도 놀러 와있다고 하던데.

두근, 두근.

세빈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심장은 당장이라도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대고 피가 차갑게 식어 몸이 덜덜 떨렸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민과 눈이 마주쳤다. 통화 볼륨이 크게 설정되어 있던 터라 그의 귀까지 들어간 것이다. 민도 눈을 크게 뜬 채 세빈의 핸드폰을 응시하고 있었다.

“네, 좋더라고요.”

―다행이네. 혹시 지의 좀 바꿔줄 수 있니? 전화가 꺼져 있어서 말이야.

“…아, 피곤했나 봐요. 지금 완전 곯아떨어졌네요.”

―그래? 알겠어. 잘 놀다 오렴.

“네.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세빈은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 자세를 유지했다. 불안한 예감이 걷잡을 수 없이 몸집을 불려 세빈의 그림자에 덕지덕지 붙었다.

“…강세빈 헌터.”

무거운 분위기를 뚫고 민이 입을 열었다.

쿵!

시커먼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순간 압도당했지만 그는 금방 정신을 차리곤 말을 덧붙였다.

“제가 신지의 헌터의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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