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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비명헌터-118화 (118/366)
  • 118화

    “하~ 역시 마사지 받고 나서 마시는 차는 정말 맛있네요.”

    “사장님이 차를 너무 좋아해서 아예 찻잎 밭을 하나 매입했대. 화끈한 연상 남성이라……. 귀엽네.”

    “…저, 근데 신지의 헌터는 왜 저렇게 된 거예요?”

    “하하, 난생처음으로 버프를 저렇게 들이부었으니 천국을 본 거지.”

    하미준 헌터의 말에 태클을 걸 수 없었다. 마사지가 끝난 이후로 지금까지 내 입에선 ‘와’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직원이 준 차를 손에 든 채로 소파에 완전히 녹아내려 있었다.

    꿈을 꾼 건가? 두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자신을 삼도천의 세 자매 중 둘째라고 소개했던 안이 내 어깨를 주무를 때마다 근육을 이루는 세포 하나하나가 반응하는 듯했다. 간단히 몸을 풀어준 것만으로도 무릉도원에 온 기분이었는데 회복 오일을 고른 이후가 진짜였다.

    안은 오일 여러 개를 보여주며 각각의 효능을 설명했는데, 다 거기서 거기처럼 들려서 오늘의 추천 코스로 받았다.

    그리고 하미준 헌터의 말마따나 천국에 갔다 왔다.

    눈을 잠깐 감았다 떴을 뿐인데 깊게 자고 일어난 것처럼 정신이 맑았고, 뻐근한 팔다리를 새로 끼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안은 자기 이름이 편안 안(安) 자를 쓴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언니 이름은 복(復), 동생 이름은 치(治)인 것까지 이야기하며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하지만 그 말소리마저 자장가처럼 들렸고 대꾸 한 번 제대로 못 한 채 또다시 곯아떨어졌다.

    “계산되셨습니다.”

    직원이 하미준 헌터에게 카드를 돌려주고 다시 데스크로 돌아갔다.

    ‘아, 차 다 식었겠네.’

    한진우 헌터가 칭찬한 차를 한 모금 마시자 구수한 곡물 향이 목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멍했던 정신이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 이제야 적응됐나 보네. 어때? 할 만하지?”

    “네…….. 진짜 좋네요.”

    “해외 헌터들도 이거 받으려고 한국까지 온대요!”

    7천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지만 이 정도 효과면 주기적으로 오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한 수준이었다. 몸에 남아있던 피로는 씻은 듯이 사라졌고 치유력 증가 효과 때문인지 살짝 긁힌 상처엔 어느새 새살이 돋아있었다.

    “현장에서 쓰기엔 약간 애매한 스킬이지만, 이런 가게를 운영하기엔 최고지.”

    하미준 헌터가 모자를 눌러쓰며 말을 덧붙였다. 난 남은 차를 입안에 털어 넣고 빈 잔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아, 그러고 보니 시카고에서 준 게이트 수습 지원 보상금은 제대로 들어왔어?”

    “네. 입금된 걸 오늘에서야 확인하는 바람에 좀 놀랐지만요…….”

    “난 현장 대피 담당이었는데도 많이 챙겨주더라고. 신지의 헌터는 클리어 담당이라서 훨씬 많이 들어왔을 거야.”

    그래서 그런 거구나.

    당황스러운 금액이긴 했지만 정당하게 얻은 돈이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걸로 일단 집 빚부터 갚고, 나머지는 아자디바르 남매 연구 지원금이나 사도들의 소원을 대신 이뤄줄 때 사용하는 걸로 해야겠다.

    우웅―

    그때 업무용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인벤토리에서 핸드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누군데 그래?”

    “미래 씨요.”

    “미, 미래 씨가 전화를요?!”

    한진우 헌터는 아예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웬만해선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미래 씨라서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다.

    전화가 끊어지기 전에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퇴원했다며.

    “네? 네.”

    ―그럼 그 로브 들고 내 연구실로 와라. 지금 바로.

    뚝.

    5초도 안 돼서 종료된 통화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뭔가 지나가긴 한 것 같은데.

    “하여간 미래는 그 버릇 좀 고쳐야 한다니까.”

    하미준 헌터가 키득대며 테이블 위에 있던 쿠키를 집어 먹었다.

    “그래도 미래 씨한테 전화가 오는 게 좀 부…….”

    한진우 헌터가 말을 하다 갑자기 양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무안해할까 봐 일부러 못 들은 척을 하니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이테르의 로브가 어떤 아이템인지 제대로 확인 안 했잖아요. 그것 때문에 부르셨나 보네요.”

    “그런가 봐요. WIDB에도 아직 등록 안 했으니까.”

    최초로 발견된 아이템이 있으면 세계 아이템 데이터베이스, ‘WIDB’에 등록하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다. 의무는 아니기 때문에 등록 여부는 획득한 사람의 의사에 달렸지만 등록하지 않으면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그 아이템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니까.’

    비록 소속은 다르더라도 던전과 몬스터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 있으니 상호 협력하자는 취지의 규칙이었다.

    탁.

    핸드폰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두 분 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하미준’이 동요한다.]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한진우’가 동요한다.]

    “당연한 일을 한 거지.”

    “그럼요! 우린 동료잖아요!”

    [발언 결과 : 기쁨]

    변수가 많았던 만큼, 뿌듯한 순간도 많은 시간선이다. 간지러운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든 후 먼저 가게를 나왔다.

    “신지의 헌터님!”

    “신지의 헌터니임!”

    “왁!”

    퍽.

    미래 씨의 연구실 문이 열리자마자 아자디바르 남매가 내 품에 뛰어들었다. 넘어지진 않았지만 하마터면 귀에 꽂은 자동 통역기가 빠질 뻔했다. 한 손으로 통역기를 안쪽으로 꾹 밀어 넣은 후 울상이 된 남매를 바라보았다.

    “진짜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맞아요! 미나랑 저랑 한숨도 못 잤어요!”

    “구라 좀 적당히 쳐라. 잠은 잤잖아. 그 돌바닥에서 담요 깔고 잘만 자더만.”

    남매의 물기 어린 목소리 너머 건조한 대답이 들려왔다.

    남매에게 양쪽 팔이 붙들린 채 연구실 안 소파에 앉았다. 아자디바르 남매를 소개해 주러 왔을 때랑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위이잉―

    그때 정육면체의 로봇이 웬 뜨거운 차와 함께 내 앞에 나타났다. 녹차처럼 보이는 옅은 녹색의 액체가 머그컵에 담겨 있었다.

    “마셔.”

    “미래 씨한테 차도 얻어 마셔보네요.”

    “불만이냐?”

    컵을 들어 조심스럽게 입가로 가져왔다.

    “푸훕……! 콜록! 켁, 이게 뭔……!”

    “허, 헌터님. 괜찮으세요?”

    “휴지 여기 있어요!”

    ‘이게 대체 무슨 맛이야?!’

    기력 회복제보다 한 다섯 배는 떫고 쓴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무하가 건네준 휴지로 입가와 옷을 대충 닦은 후 미래 씨를 올려다보자 그가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엄살 심하네.”

    “이거 뭐예요? 기력 회복제 원액이에요?”

    “면역 증진제. 지리산 E급 던전 부산물 추출해서 만든 거다.”

    면역 증진제는 처음 보는데. 미출시 제품인 걸까.

    말도 안 되게 쓴맛에 더 먹기가 무서워질 정도였다.

    툭.

    그때 미나가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그러더니 내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신지의 헌터님 병원에 계실 때 소장님께서 부산물 요청해서 직접 배합하신 거예요.”

    “미래 씨가 직접?”

    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 씨는 우리가 귓속말을 하든 말든 아이템 스캐너처럼 보이는 기계를 이리저리 누르고 있었다.

    ‘좀 감동인데.’

    연구 말고는 관심도 없는 그가 나를 위해 따로 약을 만들었다고 하니 다시 먹을 용기가 생겼다.

    “후우…….”

    숨을 길게 내쉰 후 머그컵에 담긴 증진제를 단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최대한 혀에 안 닿도록 목구멍에 바로 들이붓자 아주 조금은 쓴맛이 옅어졌다.

    “어으그극…….”

    “여기 물이요!”

    “고맙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말도 안 되는 맛이긴 했다. 물을 거의 반 통을 마신 후에야 지옥의 맛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고마워요, 미래 씨.”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비각성자 ‘안미래’가 동요한다.]

    미래 씨가 내 쪽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잔말 말고 아이테르의 로브나 내놔.”

    [발언 결과 : 기쁨]

    미래 씨의 본심에 웃음이 샜지만 애써 무시한 채 입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이거냐?”

    “방송으로 보긴 했지만 현대적인 생김새네요…….”

    아이테르의 로브는 내가 평소에 입고 다니는 점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광택이 살짝 있는 새하얀 천으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주머니가 많이 달렸다는 점이겠지.

    “최상급 아이템이니까 형태 변형 기능이 있었겠지. 아마 니가 받자마자 떠올린 게 이런 외투였을 거고.”

    미래 씨가 아이테르의 로브를 이리저리 둘러보다 나를 향해 손짓했다. 스캐너 쪽으로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그는 내게 아이테르의 로브를 넘긴 후 스캐너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WIDB에 등록할 거지? 안 해도 상관없긴 하지만.”

    “할게요. 안 하면 제 평판이 엄청 떨어질 테니까요.”

    공개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일은 없다. 오히려 잔뜩 생색내서 사람들이 내게 우호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앞으로의 일에 있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우웅―

    다시 아이테르의 로브를 가져간 미래 씨가 커다란 박스 형태로 된 스캐너에 그것을 넣은 후 뚜껑을 덮었다.

    “아이템 전용 스캐너다. 아이템의 형태와 속성, 등급처럼 대체적인 정보는 다 알 수 있지만 이름이나 특이 사항들은 출력되지 않아.”

    “그 부분을 제가 알려드리면 되는 거죠?”

    “이제 머리가 잘 돌아가나 보네.”

    우우우웅―

    시퍼런 빛과 함께 스캐너가 진동하자 연구실 벽에 붙은 스크린에 아이테르의 로브 모양이 출력되었다.

    삐빅.

    스캔이 종료되자 새파란 조명이 꺼졌고 화면엔 ‘출력 중’이라는 글자가 떴다.

    [방어구―의상/빛 속성/SS급]

    [*추가 정보를 입력하셔야 WIDB에 등록이 가능합니다.]

    [*추가 정보 : 아이템명, 특이 사항]

    화면에 아이테르의 로브의 원형인 천 형태의 사진과 함께 안내창이 깜박거렸다.

    “너가 직접 입력해.”

    “네.”

    미래 씨가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던 키보드를 쭉 끌어와 내 앞에 놓아주었다.

    ‘상태창.’

    상태창을 옆에 띄운 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흠. 역시 이것도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아이템이군.”

    특이사항을 입력하자 미래 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세빈이 입고 다니는 그 트렌치코트도 처음엔 저런 형태였지.”

    “검은 뱀의 허물이요?”

    “어, 그 아이템. 그것도 처음 공개됐을 땐 좀 시끄러웠는데.”

    세빈이의 귀속 방어구인 ‘검은 뱀의 허물’은 상대의 공격을 흘리는 효과가 있다 보니 세빈이처럼 근접 전투계 헌터에겐 최고의 방어구였다.

    “스틱스 강? 스킬도 붙어있냐?”

    “네. 그리스에서도 저 스킬 덕분에 두 발로 걸어 나온 거예요.”

    “오…….”

    미래 씨는 보기 드물게 감탄한 후 내가 입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타다닥.

    아이테르가 가이아에게 전하는 말까지 전부 입력하니 텅 비어있던 상세 화면이 어느새 가득 찼다.

    “이게 전부냐?”

    “네.”

    “자가 치유에 완전 치유 스킬까지…….”

    미래 씨가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등록 버튼을 눌렀다.

    ‘아이테르의 로브‘가 WIDB에 성공적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전설의 아이템이라고 할 만하군.”

    미래 씨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걸렸다.

    턱.

    그는 스캐너에서 아이테르의 로브를 꺼내 내게 던졌다.

    “내 연구실에 올 때마다 네 분위기 조금씩 바뀌는 거 알고 있냐?”

    쿵.

    예리한 지적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녹두를 검사하러 갔을 땐 과거의 기억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고, 아자디바르 남매를 소개할 땐 일부의 기억이 돌아온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시간선을 전부 알고 있는 나다. 미래 씨가 그렇게 느낄 만도 했다.

    “가평 던전에서 많이 성장했나 봐요.”

    “그걸 니 입으로 얘기하냐?”

    미래 씨의 비아냥거림을 뒤로하고 다시 아자디바르 남매가 있는 소파로 돌아왔다.

    “배리어 연구는 어떻게 돼가고 있어요?”

    “이제 막바지예요. 저희 비자가 다음 달까지인데 이 정도 속도라면 1차 시제품을 금방 보여드릴 수 있을 거예요!”

    남매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종말을 막기 위한 모든 계획들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양팔로 남매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 짓자 두 사람도 눈까지 접어가며 환하게 웃었다.

    우웅―

    ‘오늘따라 날 찾는 사람이 많네.’

    업무용 핸드폰이 또 울렸다. 인벤토리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밀었다.

    “…하.”

    “뭐예요?”

    내 핸드폰 화면엔 예상치 못한 인물의 메시지가 떠있었다.

    [신지의 헌터, 혹시 오늘 저녁에 같이 식사라도 어떤가?]

    [주소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 L타워 107층] ―김강희 회장

    악(惡)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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